소설리스트

광세일소-179화 (179/201)

#   179 - 광세일소_한추영 - 167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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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4)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주판알을 튕기느라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대는 모습을 보니 역겨움을 넘어 허탈감이 몰려왔다.

이런 자를 주군으로 섬기느라 스승님과 황보 장로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그래서 목숨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전 자신에게 목숨을 잃은 맹환이 차라리 더 당당했다. 그 녀석은 죽을 줄 알면서도 자신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달려들지 않았던가.

석추명은 한참이나 남무궁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남무궁을 두려워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무궁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신공을 익혔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자신이 꿈꾸던 복수는 이게 아니었다. 자신이 익힌 무공으로 보란 듯이 남무궁을 격퇴하고 분해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스승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다. 보아라. 네놈의 무공이 고강하다 하나 이제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약육강식이라, 강호에서는 무공이 강한 자가 곧 법. 그러니 남무궁 네놈도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쳐서 이렇게 비실대는 남무궁을 상대로는 아니었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사람과 싸우자고 신공을 익힌 것이 아니었다. 남무궁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하려면, 남무궁이 압도적인 패배감으로 절망하게 하려면, 이렇게 다친 상태가 아니어야 했다. 게다가 중상자를 상대로 이겨본들 자신의 명성에 먹칠만 하는 것이리라.

남무궁은 석추명이 잠시 말이 없자 자신의 설득이 먹힌다고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석 대주 자네도 남궁진악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내가 도와주겠네. 그놈의 술수는 내가 훤히 꿰고 있으니 자네와 내가 손을 잡으면 남궁진악 그 늙은이를 잡아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네. 어떤가?”

입안이 자꾸 마르는지 남무궁이 입맛을 다시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신의 눈앞에서 남무궁을 쫓아버리고 싶었다. 가라. 내상을 회복하고 기다려라. 그 질긴 목숨, 내 손으로 끊어주마. 석추명은 이제 자신의 무공으로 언제든지 남무궁을 압도하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 남무궁을 놓아주는 것이 뱀을 수풀에 다시 풀어주고 호랑이를 숲에 다시 놓아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 자신은 언제든지 남무궁을 처단할 수 있지만 그 사이에 남무궁이 또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노린다면?

문득 죽어가던 음양사자의 간곡한 부탁이 떠올랐다.

- 자, 자네는, 마음이 너, 너무 약해서 적을 쉬, 쉽게 용서하려고, 할 것이네. 그, 그래서는 안 되네.

나 자신의 명예 따위 무엇이 중하랴. 남무궁이 저지를 악행을 미리 막을 수만 있다면 중상자를 공격했다는 비난을 좀 받은들 어떤가. 어쩌면 그것이 스승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정리한 석추명이 차가운 눈길로 남무궁을 응시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알아내야 할 게 있었다.

“설랑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석추명의 느닷없는 질문에 남무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인가?”

“설랑이 임예린을 납치해갔다. 총단 뒤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찾을 수가 없어.”

“그런 일이 있었군. 하기야 설랑 그놈이 강시가 된 이유가 바로 임 소저 때문이었으니.”

일봉이 했던 말을 남무궁의 입에서 다시 듣게 되자 석추명은 마음이 착잡했다. 임예린이 설랑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설랑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네. 설랑은 강시이기는 하나 죽은 몸이 아니기에 아직도 제 의지가 있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임 소저를 납치했다면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이네. 다만....”

“다만 무엇이냐?”

“그렇다 하더라도 청동방울 소리를 듣게 되면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그 말은 곧 임 소저도 남궁진악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뜻이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남무궁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자 석추명은 잠시 흠칫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임예린 개인으로 보나 정도련이라는 집단으로 보나.

“설랑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설랑은 활강시라 죽일 수가 없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산 채로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네. 하지만 쉽지 않지. 그놈을 도대체 무슨 수로 제압한단 말인가?”

“그렇군.”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무궁이 다시 슬쩍 물었다.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제안. 제안이라.

비천검이 번쩍 빛을 내뿜었다. 비천검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철혈서생이 다급하게 철부채를 펼치며 검을 막았다. 하지만 철부채는 이미 반 이상이나 베여 밑동밖에 남지 않았고 비천검은 어느새 철혈서생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철혈서생이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졌다.

석추명이 제아무리 고수라고 하나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철혈서생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어, 어떻게 이럴...!”

석추명을 바라보던 철혈서생이 돌연 앞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철혈서생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남무궁의 신발을 붉게 물들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간다고 생각한 남무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 잠깐만!”

“이제는 네놈 차례다.”

석추명이 태사의에 앉은 남무궁을 내려다보았다.

“저승에 가거들랑 스승님께 무릎 꿇고 사죄부터 드리거라.”

휙. 검이 공간을 베는 소리가 나더니 비천검이 빛살같이 빠른 속도로 남무궁의 목을 베었다.

내상을 입었어도 고수는 고수인지라 남무궁이 그 짧은 순간에 팔을 뻗으며 맨손으로 검을 잡았다. 손바닥이 갈라지며 붉은 핏물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왜...?”

남무궁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두 눈은 의혹으로 가득했다. 평소에 독사 같은 눈빛으로 수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남무궁이 지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문득 남무궁의 거듭되는 손찌검에 무기력하게 몸을 떨던 황연화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 생각났다.

석추명의 눈빛이 일순간 강렬해진다 싶더니 검이 그대로 팔을 타고 쭈욱 내려갔다.

“아아악!”

남무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쇠도 두부처럼 자르는 비천검이 남무궁의 오른팔을 손바닥에서 어깨까지 정확히 양분한 것이다.

“이 정도 고통으로 엄살 피우지 마라.”

석추명이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이 그대로 남무궁의 갈비뼈와 심장, 척추를 가르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남무궁은 숨이 끊어져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석추명이 남무궁의 옷자락에 칼날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이제 맹주 그 늙은 여우만 잡으면 되겠군.”

밖으로 나온 석추명은 수라각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남무궁의 시신과 수라각을 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그 불길을 바라보던 석추명이 발걸음을 돌렸다. 남무궁에게 복수를 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허탈한 느낌만 들었다.

스승 뢰정과 황보, 초의공, 황연화, 담예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무고한 줄 알면서도 교주의 명이라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베야 했던 대웅대협 부부와 두려움에 질려 있던 그들의 어린 아들 모습도 떠올랐다.

“후”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진 하늘에는 어느새 별이 하나둘씩 반짝이고 있었다.

****

딸랑딸랑.

남궁진악이 신기한 듯 손에 든 청동방울을 계속 울렸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소리에 감응한다고?”

남궁진악이 단상 아래에 서 있는 귀령자를 내려다보았다.

귀령자가 얼른 답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사마경이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귀령자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그, 그러하옵니다.”

남궁진악이 백련신교 화련산 총단을 방문한 날, 귀령자는 사제였던 사마경에게 설득되어 무림맹으로 함께 돌아왔다. 귀령자는 아직도 남무궁이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것참 기이하구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남궁진악이 계속 청동방울을 울리며 물었다.

“그 청동방울을 만들 때 설랑의 피와 혼백을 부르는 향을 섞었습니다.”

“혼백을 부르는 향?”

“예. 음혼향(陰魂香)이라고 하는 것인데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음양술의 비법에 따라 만든 것이옵니다.”

남궁진악이 흡족한 듯 청동방울을 바라보며 계속 울렸다. 맑지만 어딘지 괴이한 느낌이 드는 소리가 맹주전 밖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그렇구먼. 아주 마음에 들어. 설랑과 같은 놈이 열 놈만 되어도 강호 전체뿐만 아니라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귀령 도인, 어떻게 안 되겠나?”

맹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눈길을 툭 던지듯 귀령자를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귀령자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온몸이 떨리자 목소리마저 떨려 나왔다.

“그, 그것이, 소, 소인이 거짓을 아뢰는 게 아니라, 활강시는 정, 정말로 어, 어렵―”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구먼.”

귀령자가 말을 심하게 더듬자 맹주가 짜증을 냈다. 그러자 사마경이 귀령자의 말을 냉큼 받았다.

“활강시는 살아있는 사람을 쓰는 것이라 사강시보다 만들기가 몇 배나 더 어렵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 욕심 많은 남무궁조차 하나밖에 만들지 못했겠습니까?”

사마경의 대답을 듣던 남궁진악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니 남무궁 그놈이 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그런데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아깝군. 정말 아까워.”

남궁진악은 아쉬워하며 청동방울을 계속 울렸다.

“이봐 군사, 자네가 일전에 말한 천검총의 검진은 언제부터 가동할 수 있는가?”

“조금만 손을 보면 금방 가동할 수 있습니다만...?”

남궁진악이 하는 말의 진의를 몰라 사마경이 남궁진악을 올려다보았다.

“석추명과 기하진, 그 두 놈을 검진으로 끌어들여 끝장을 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놈들은 단오절 수장 비무 때 처리할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사마경이 의아한 눈빛을 하자 남궁진악이 방울을 멈추고 한심하다는 듯이 사마경을 내려다보았다.

“단오절까지 언제 기다리겠나? 나는 기다리는 것이 질색인 사람이야. 단오절 전에 그놈들을 검진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봐.”

사마경이 황급히 다시 허리를 굽혔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놈들만 없애면 나머지 놈들이야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지. 아 참, 그놈들을 없앨 때 칠선도 함께 처리하면 좋겠어. 검진이니 가능하겠지?”

남궁진악이 다시 사마경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이번에는 사마경의 등골이 오싹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남궁진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그때 맹주전 후원에 무엇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설랑이 온 것 같습니다.”

귀령자가 바깥의 동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아뢰었다.

“오, 그래? 그럼 어서 나가봐야지.”

남궁진악이 일어서자 사마경이 급히 허리를 굽히고 문을 열었다. 남궁진악이 앞장서자 사마경과 귀령자가 좌우에서 뒤따랐다.

맹주의 수신호위를 담당하는 암영단 군사 수십 명이 반월형으로 대열을 정비한 채 맹주전 후원 한구석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군사들이 검을 겨눈 지점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우리 편이니 신경 쓸 것 없다. 다들 물러가라.”

“존명”

남궁진악의 한마디에 군사들이 고개를 숙이더니 일제히 사라졌다.

군사들이 사라지자 희끄무레한 형체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귀령자의 말대로 설랑이었다. 설랑의 흰 몸이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빛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설랑은 혼자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전신이 축 늘어진 사람을 두 팔에 안고 있었다.

“...?”

설랑이 다가오자 팔에 안겨 있던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정도련 군사, 임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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