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78화 (178/201)

#   178 - 광세일소_한추영 - 16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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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3)

30여 명의 수라대원 중 제일 앞에 있던 10여 명이 석추명을 향해 덤벼들었다.

쏴아.

백련신교의 최정예 무사들답게 단숨에 3장의 거리를 도약해오면서도 한 사람이 움직이는 듯 행동이 일사불란했다. 수라대원들이 순간 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열 자루의 검 끝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검이 꽂히려는 찰나, 석추명이 비천검을 떨쳤다. 어떻게 떨쳤는지 누구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석추명의 동작이 끝나자 10여 자루의 검이 갑자기 땅바닥에 우르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석추명을 공격하던 수라대원들은 그 자리에 못 박혀 꼼짝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맹환은 두 눈을 치켜떴다.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란 말인가.

검을 쥐었던 수라대원들의 손목에는 하나같이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 바로 석추명의 검봉점혈에 당한 것이었다. 검으로 점혈을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맹환은 석추명이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맹환이 좌우에 늘어선 20여 명의 대원에게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뭐해? 당장 한꺼번에 몰아쳐.”

이번에는 좌우에서 10명씩 20명이 동시에 공격했다.

챙.

석추명이 검을 좌우로 휘두르자 스무 자루의 검이 모조리 중간에서 잘려나가더니 잘려나간 검날의 끝부분이 핑그르르 돌면서 제 주인의 손목을 찍었다. 칼끝의 방향과 찌르는 힘 조절이 얼마나 절묘한지 맹환은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지?”

맹환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석추명이 검을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하지만 맹환은 비켜서지 않았다. 석추명의 무공이 놀랍기는 하나 자신의 광풍마검(狂風魔劍) 48식도 만만치 않은 검법이니만큼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교주에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맹환이 이를 악물고 첫 번째 검초를 펼쳤다.

휘리릭. 하지만 맹환은 찌르던 검을 급히 회수해야 했다. 검로가 차단되어 검을 더 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검을 뻗어낸다면 오히려 상대방의 검에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맹환은 속이 뜨끔하여 급히 검로를 바꾸었다. 검세가 변하며 그야말로 광풍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낙엽이 흩날리는 듯 급격한 공세가 이어졌다.

하지만 맹환은 이번에도 검초를 끝까지 펼칠 수가 없었다. 검을 펼치려 할 때마다 석추명의 비천검이 어느 틈엔가 자신의 검로를 막고 있었다. 아무리 초식을 바꾸고 검법을 바꾸어봐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비천검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맹환은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석추명은 자신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고수였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물러나라.”

석추명이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맹환은 물러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모든 공력을 검에 모아 검기를 내뿜으며 단칼에 베려고 했다.

“헉!”

하지만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불에 덴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아랫배에 몰려들었다. 어느새 석추명의 검이 자신의 아랫배를 관통해 있었다.

“잘 가라.”

석추명이 검을 뽑자 맹환은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석추명은 쓰러진 맹환을 지나 수라각의 방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방문이 대번에 두 쪽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방 한가운데 있는 태사의에 남무궁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어깻죽지에 검붉은 피가 살과 뒤엉켜 말라붙어 있었다. 남무궁 옆에는 좌사 철혈서생 뿐이었다.

“천하의 남 교주가 이런 곳에 숨어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추명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남무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무엄하다, 석 대주. 교주님께 예의를 갖추어라.”

철혈서생의 말에 석추명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좌사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신교를 떠난 지가 언제인데 그런 소리를 하나?”

“네놈이 감히―!”

철혈서생이 철부채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남무궁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남무궁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남무궁은 음양사자와 겨루다가 내상을 입었는지 안색이 초췌했다.

“그것이 궁금한가? 당신의 동업자가 알려주더군.”

남무궁의 인상이 구겨졌다.

“역시 그 늙은 여우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후후, 남궁진악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 당신에게 속았다고 말이야.”

“...!”

남무궁이 눈을 부릅떴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태사의를 붙잡은 손이 허옇게 변했다.

“남무궁, 네놈에게 받아내야 할 목숨 빚이 한두 명이 아니다. 일어서라. 일어서서 검을 잡아라.”

석추명이 남무궁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석 대주. 교주님은 지금 심각한 중상을 입으신 상태이다. 이제는 정파의 무리에 속한 네가 감히 다친 분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려고 하느냐?”

철혈서생의 말에 석추명은 기도 차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좌사, 한 번만 더 그 입을 놀리면 입을 베어 버리겠다. 나는 지금 남 교주와 이야기하는 중이니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

석추명이 준엄한 눈빛으로 철혈서생을 바라보았다. 철혈서생은 한마디 더 하려다가 석추명의 눈빛에 기가 눌렸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남무궁, 다쳤으니 이번에는 봐달라는 것이냐? 십만 교도를 거느린 신교의 교주요, 대종사라고 자부하던 네가 그깟 부상에 이렇게 치졸해졌느냐?”

석추명의 말에 남무궁은 뜨끔한지 안색이 변했다.

“그게 아니다. 다만 먼저 남궁진악 그 늙은이를 처단할 시간을 다오. 한 달이면 된다. 남궁진악 그놈을 처단하면 내 발로 너를 찾아가겠다. 그때 겨루어서 네 손에 죽는다 해도 나는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이다.”

남무궁의 말에 석추명이 노해 주먹으로 벽면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벽면에 대번에 구멍이 나며 수라각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여한? 여한이라고 했느냐? 네놈이 언제 한 번이라도 네놈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여한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뢰정, 황보, 초의공, 황연화, 이 사람들의 이름을 듣고 느끼는 바가 없느냐 말이다.”

분노를 참지 못한 석추명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무궁이 자신 앞에서 태연하게 ‘여한’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당장 찢어 죽이고 싶었다.

“나는 교주였다. 내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게 철퇴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그들의 죽음을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라.”

남무궁의 말에 석추명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비천검을 뻗었다.

챙.

하지만 비천검이 남무궁의 목에 닿기 전에 철혈서생의 철부채에 가로막혔다.

“남궁진악이 설랑을 조종하는 청동방울을 빼앗아갔다.”

남무궁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석추명이 검을 찌른 그대로 물었다.

“무슨 소리냐?”

“지금 신교의 총단에 군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느냐? 며칠 전, 맹주가 신교의 고수들을 포함해서 대규모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당연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요청을 수락했지. 그리고 맹주가 나에게 말하더군. 골치 아픈 늙은이 여덟 명을 보낼 테니 대신 좀 처리해 달라고 말이야. 나는 흔쾌히 그러마 했지. 자네도 만나봤겠지만 내게는 천하무적이라고 해도 좋을 강시 열한 구가 있었으니. 맹주가 말한 늙은이 여덟 명 외에도 석 대주 자네와 기하진, 그리고 정도련 떨거지들이 왔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 강시들 앞에서는 숫자가 소용없으니 말이야.”

삼천에 달하는 소림사 승려들이 강시 열한 구에 당했으니 남무궁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석추명은 맹주가 설랑을 조종하는 청동방울을 뺏어갔다는 소리에 불길한 느낌이 들어 검을 내리고 남무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도련 떨거지 놈들이 모두 지하 석실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석실의 문을 봉인했는데 뒤늦게 음양사자 모용회가 나타났다. 그놈이 독한 마음으로 양물을 떼고 신공을 익혔다고 하더니 정말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더군. 음양사자를 막을 만한 고수들은 모두 신교의 병력을 이끌고 총단 밖으로 나간 탓에 내 곁에는 맹환 같은 덜떨어진 놈밖에 없었어.”

교주를 지키느라 목숨을 바친 맹환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저승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남무궁의 말은 계속되었다.

“교주전이 무너진 것도 모두 정도련의 짓이라고 생각했었지. 그 늙은 여우의 계략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으니.”

남무궁이 분하다는 듯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계속해라.”

설랑의 얘기가 궁금한 석추명이 재촉했다.

“결국 불모전에서 음양사자와 겨루다가 보다시피 그놈의 귀조수와 장력에 크게 당하고 말았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그때 갑자기 남궁진악이 나타나더군.”

석추명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남무궁은 살아날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했던지 창백하게 질렸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그리고는 전음으로 설랑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하더군. 그러면 음양사자의 손에서 구해주겠다고 말이야. 설랑은 활강시야. 활강시는 낮에도 활동할 수 있으니 밤에만 움직일 수 있는 사강시보다 훨씬 귀하지. 하지만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내 목숨보다야 귀하겠나. 그래서 설랑을 조종하는 청동방울을 넘겨주었어.”

남무궁의 이야기를 듣던 석추명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급하게 남무궁의 말을 잘랐다.

“잠깐만! 그렇다면 음양사자 선배는 남궁진악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냐?”

“그래. 그게 바로 거래의 조건이었으니. 음양사자는 남궁진악이 자신에게 손을 쓰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지. 그래도 한 20년 한솥밥을 먹었으니까. 남궁진악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나 정정당당하게 겨루었다면 음양사자가 절대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숨이 차는지 남무궁은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내상이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남궁진악의 일격에 음양사자는 중상을 입고 말았지. 나도 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지만 남궁진악은 나보다 더한 놈이야. 영문을 모르고 죽어가던 음양사자에게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을 밝혔으니. 그 비밀을 듣자 음양사자는 원통해서 죽으려고 하지 않았어. 남궁진악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 모습을 지켜보더군.”

남무궁의 말을 듣는 석추명의 심장 고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남무궁도 석추명이 긴장했음을 눈치챘다.

“석 대주 자네는 음양사자 모용회가 왜 그토록 나를 증오했는지 아는가?”

남무궁이 시간을 끌려는 것인지 석추명에게 난데없이 질문했다.

“당신이 흑련교도 삼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음양사자 선배는 당신에게 복수하려고 수많은 세월을 인고하며 신공을 닦으셨지.”

“잘 아는군. 음양사자 모용회는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남성을 포기한 사람이야. 그리고 신공을 완성할 때까지 내 눈에 띄지 않으려고 맹주 남궁진악에게 몸을 의탁했지. 하지만 말이야....”

남무궁이 잠시 말을 끊으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모용회도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야. 자신의 진정한 흉수를 지척에 두고도 몰랐으니....”

‘진정한 흉수’라는 말에 석추명은 머리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음양사자가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며 자신에게 말하려던 것이 바로 흑련교의 ‘진정한 흉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교권을 잡고 교세를 강화하기 위해 나에게 반기를 드는 흑련교도 삼천 명을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었지. 당시 흑련교도들을 하남성 운대산(雲臺山)의 골짜기에 유인한 다음 퇴로를 막은 사람이 바로 남궁진악이었지. 운대산 골짜기는 길이 좁고 양옆으로 기암절벽이 늘어서 있어 퇴로를 막으면 결코 나갈 수가 없는 곳이야. 남궁진악 덕분에 나는 흑련교도 삼천 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베어버릴 수 있었어. 만약 그때 남궁진악이 퇴로를 막지 않았다면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살아서 나갔을 테지.”

진정한 흉수는 ‘남...’이라고 하던 음양사자의 고통스러운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은 그 ‘남’ 자가 당연히 남무궁을 가리킬 것으로만 생각했지 남궁진악을 가리킬 것으로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남궁진악을 눈앞에 두고도 그대로 보냈다는 사실에 석추명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모용회는 20년이 넘도록 남궁진악 옆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죽기 직전에야 알게 된 것이지. 그러니 원통해서 눈을 제대로 감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남궁진악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음양사자를 내려다보며 즐거워하더군. 그때는 나도 조금 소름이 돋았어.”

“남궁진악 이놈을!”

석추명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자단목 탁자가 두 동강이 났다.

“자네의 심정, 충분히 이해 가네. 나도 그놈에게 속아 넘어갔으니 말이야. 남궁진악 그놈은 나를 구해줄 것처럼 하면서 설랑을 조종하는 청동방울을 훔쳐간 뒤에 결국 자네에게 내가 숨은 곳을 알려주었어. 내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남궁진악 그 늙은 여우는 반드시 처치해야 죽어도 눈을 감겠네.”

여기까지 말한 다음 남무궁이 석추명을 슬쩍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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