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 광세일소_한추영 - 167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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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2)
불모전에 발걸음을 내디딘 석추명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텅 빈 방 안, 출렁이는 불빛, 바닥에 쓰러진 음양사자의 붉은 옷에 이 방의 주인이 목숨을 잃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
“선배님!”
석추명이 다급하게 음양사자를 부축했다. 가뜩이나 창백하던 음양사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랬고 입가에는 흘러내린 선혈이 마르지도 않은 채 묻어있었다. 붉은 옷이라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피를 많이 흘렸는지 석추명이 음양사자를 부축하자 금세 자신의 팔과 옷에 붉은 물이 들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선배님? 누구의 짓입니까?”
석추명이 음양사자를 부축하자 음양사자가 힘없이 두 눈을 떴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눈빛에 초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오래 버티지 못할 성싶었다.
“삼, 삼천 교도의 원, 원한을.... 자, 자네가 갚아주게.”
음양사자가 석추명의 손을 붙잡더니 갑자기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기침이 멎자 음양사자는 석추명의 손을 다시 꽉 쥐었다. 피 묻은 음양사자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약, 약속해 주게. 원한을 가, 갚아, 준다고 말이야.”
음양사자가 사력을 다해 말을 내뱉었다. 한 자 한 자 내뱉을 때마다 숨을 헐떡였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약속드리겠습니다.”
“자, 자네는, 마음이 너, 너무 약해서 적을 쉬, 쉽게 용서하려고, 할 것이네. 그, 그래서는 안 되네.”
음양사자가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맥박이 금방이라도 멈출 듯 느려졌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남무궁을 처단하여 선배님과 삼천 교도들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음양사자를 안심시키려고 석추명이 음양사자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석추명이 하는 말을 듣던 음양사자가 멍한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본, 본교의 진, 진정한 흉, 흉수는 바, 바로....”
음양사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석추명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원수가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뭣 하러 굳이 이렇게 무리하는 것일까.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는 게 중요했다.
“선배님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으니―”
음양사자가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흉수는 바, 바로... 남... 남.....”
흐릿하기만 하던 음양사자의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지며 석추명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사람처럼 음양사자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드러나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뱉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음양사자는 기력이 다했는지 그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석추명의 손을 잡았던 손아귀에 힘이 풀리더니 털썩 땅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선배님!”
설마 이렇게 가신단 말인가. 아직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가신단 말인가. 석추명이 다급하게 음양사자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손가락을 코끝에 대어 보았으나 이미 호흡은 끊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목과 목 등 맥이 뛰는 곳을 짚어보았으나 맥박도 뛰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선배님! 선배님!”
석추명이 음양사자를 계속 흔들었다. 감히 넘볼 자가 없는 절세 무공을 자랑하던 희대의 고수가 허무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니 초조함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선배님!”
석추명의 목소리가 텅 빈 불모전을 메아리쳤다.
“이럴 수가! 아, 내가 조금 늦었군.”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석추명은 사람 소리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잔뜩 경계했다.
불모전 문이 드르륵 열렸다.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맹주 남궁진악이었다.
“어허, 모용회 이 사람, 뭐가 급하다고 그리 빨리 간 것인가.”
남궁진악이 음양사자의 시신을 바라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남궁진악이 나타나자 석추명은 벌떡 일어섰다. 머릿속에 교주전을 폭파한 사람이 남궁진악일 것 같다던 임예린의 말이 떠올랐다.
“남궁진악, 당신이 여기는 어쩐 일이지?”
남궁진악이 한숨을 내쉬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석 대주, 자네도 알다시피 음양사자 모용회는 내가 거느리던 아랫사람일세. 모용회가 남무궁을 치러 간다고 내게 미리 얘기하더군. 그때 나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모용회를 만류했다네. 모용회는 무공은 높아도 사람이 솔직담백하여 거짓술수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네. 하지만 남무궁은 그렇지 않아. 그자는 가슴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일세. 음흉하기가 늑대 같고 간교하기는 뱀과 같지. 그래서 남무궁을 상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내 누누이 강조했었다네.”
남궁진악의 말에 석추명이 코웃음을 쳤다.
“흥!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맹주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니 정말 우습군. 그런 늑대 같고 뱀 같은 자와 손을 잡은 것은 바로 당신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남 교주를 비방하며 음양사자를 염려하는 척하다니, 당신의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은가?”
석추명이 손을 위로 펴자 비천검이 챙 소리와 함께 저절로 검갑에서 뛰쳐나오더니 석추명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라도 검을 펼칠 준비를 한 것이다.
그 모습에 남궁진악은 상당히 놀란 눈빛이었다.
“믿을 수 없겠지. 나도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그래서 자네는 더욱 내 말을 믿어야 한다네. 왜냐면 나야말로 남무궁을 속속들이 겪어봤으니까 말이야. 자네 앞에서 까놓고 말하겠네. 나는 권력욕이 있네. 사내가 권력욕이 있다는 것이 지탄받아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욕구를 이루기 위해 나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남무궁과 손을 잡았다네. 그때만 하더라도 백련신교라는 거대 집단의 수장이라는 자가 그렇게 야비할지는 전혀 몰랐었지. 나도 사실 남무궁에게 속았다네.”
남궁진악이 비탄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절절한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등을 두드리며 위로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석추명의 눈에는 가증스럽게만 여겨졌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당신은 죄 없는 젊은이들만 노려 목숨을 빼앗았어. 그리고 화산파와 무당파, 소림사를 풍비박산 내고 무참히 살육했지. 어디 그뿐일까?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보내어 팽가장 1,000여 식솔들의 목숨을 거두려고 한 것은 또 어떻고? 그것이 과연 두 세가 간의 정당한 비무였을까? 당신의 죄과는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없어. 맹주 당신은 악의 화신과 같은 사람이야!”
석추명이 분노하여 지르는 소리에 남궁진악은 그저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허허허. 내 다 인정하네. 물론 그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이 있으나 어찌 됐던 방금 자네가 말한 모든 일에 크든 작든 내가 관여되어 있으니 발뺌하지는 않겠네. 다만 그 모든 일에 사실 나 말고도 남 교주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만은 알아주게나. 남 교주야말로 실질적으로 그 일들을 꾸미고 조종한 사람이지.”
“흥! 맹주라는 사람이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군. 자신이 한 짓을 남에게 덮어씌우다니. 귀면쌍살을 시켜 같은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살해한 것조차 남 교주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정말이라네. 귀면쌍살 석문이 후기지수들을 살해한 배경에는 사실 남무궁의 요청이 있었다네. 당시 남무궁은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중양일지 하반부를 넘겨주는 대가로 후기지수들의 목을 요구했다네.”
갑자기 남궁진악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아, 그때 그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나는 신공에 눈이 먼 나머지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네. 그래서 무림에 이토록 평지풍파가 불어닥친 게지. 내 지은 죄가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남궁진악이 또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죄를 지금 인정하는 것인가? 남궁진악의 말을 들어보면 지난날을 후회하는 게 분명했다. 석추명은 남궁진악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음양사자의 눈에 들어 흑련교의 부교주가 된 사람이니만큼 음양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것이야. 내가 자네 말마따나 악의 화신이라면 어떻게 음양사자 같은 이가 나를 도왔겠는가?”
“그건....”
석추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석추명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음양사자가 손속이 잔인하고 성정이 오만해도 거짓을 일삼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맹주가 하는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방금 자네 귀로도 분명히 듣지 않았나? 진정한 흉수는 ‘남....’이라고 말이야. 모용회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겠나? 바로 남무궁, 이 이름 석 자가 아니었겠나 말일세.”
석추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음양사자는 흉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남....’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남무궁이 흑련교의 삼천 교도를 몰살한 것은 이전부터 이미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니 음양사자가 말을 끝내지는 못했으나 석추명도 남무궁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용회의 부탁을 들어줄 터인가?”
“들어드려야지. 남무궁은 음양사자와 흑련교도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내 스승을 해친 원수이기도 하니까.”
석추명의 눈에서 남무궁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그 눈빛을 바라보는 맹주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내비쳤다.
“자네의 마음이 정 그렇다면, 내 자네를 도와주겠네.”
맹주가 잠시 말을 끊으며 다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남무궁이 지금 어디 있는지 내가 알고 있네. 자네가 중양검법을 익히고 화산파의 비전을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혼자서는 처치하기 어려울 것이네. 그러니 가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는 게 어떤가?”
맹주가 은근슬쩍 석추명의 자존심을 들쑤셨다. 네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남무궁에게는 안될 것이리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석추명은 맹주의 수작이 눈에 뻔히 보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승의 복수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음양사자도 자신에게 복수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만 얘기해주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석추명의 단호한 대답에 맹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남 교주는 지금 수라각에 몸을 숨기고 있다네. 빨리 가지 않으면 놓칠지도 모르니 신속히 움직이게나.”
남궁진악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가 있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테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부디 몸조심하게나.”
남궁진악이 몸을 돌렸다.
“나에게 남무궁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혹시 나에게 남궁세가 사람들을 빼내 달라고 부탁할 요량이면 포기하라고 미리 말해주고 싶군.”
석추명의 냉랭한 목소리에 남궁진악이 난감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어허, 이 사람, 내 의도를 오해했구먼. 그런 게 아닐세. 나는 다만 내가 데리고 있던 모용회의 원한을 자네가 풀어주었으면 하는 게야. 나와 정도련 사이의 일은 단오절 악양루에서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했으니 그때 해결하면 되네. 오늘은 그저 모용회가 걱정되어 온 것뿐이라네.”
남궁진악은 그 말을 남기고 불모전 밖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번에는 오늘처럼 말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맹주.’
석추명은 숨을 거둔 음양사자를 그대로 두고 즉시 일어나 수라각으로 향했다. 맹주를 이대로 순순히 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바로 스승과 음양사자의 복수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맹주 남궁진악을 처단하는 일은 자신보다 기하진이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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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각은 신교의 사대장로 중 수라검 뢰정의 처소였다. 스승의 처소에 스승의 원수인 남무궁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능욕을 당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무궁은 스승의 생명을 빼앗고 영면해야 할 스승을 강시로 만들어 죽음마저 모독했다. 또한, 스승을 자신과 싸우도록 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짓밟은 데다 이제는 스승의 숨결이 닿았던 거처마저 유린하고 있었다. 스승 뢰정과 관련된 모든 것이 남무궁의 손에 철저히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남무궁, 어디 숨은 게냐. 당장 나와라!”
석추명이 수라각 앞에서 사자후를 토해냈다. 소림 신승에게 받은 막강한 공력을 실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수라각의 기와가 들썩이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수라각 안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대주, 오래간만이오. 안 본 사이 많이 변하셨구려.”
뛰쳐나온 사람은 수라대의 부대주였던 맹환이었다. 맹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석추명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남무궁은 어디 있느냐?”
그러거나 말거나 석추명은 수라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맹환이 휘파람을 불자 어디선가 수라대원 30여 명이 나타나더니 석추명 앞을 막아섰다.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 마시오. 교주님께서는 옛정을 봐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라고 하셨으나 나 맹환은 그럴 수 없소. 본교의 대주였던 자가 교를 배반하고 떠난 것도 모자라서 교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욕되게 하고, 적을 이끌고 와서 본교를 유린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맹환이 수라대원 30명을 앞장세우고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석추명의 무공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에 맹환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라도 한 듯 눈빛이 반짝였다.
적반하장이라더니. 석추명은 맹환이 ‘유린’이라는 단어를 쓰자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었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안 된다. 목숨을 헛되이 잃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라.”
석추명은 눈앞에 늘어선 수라대원들이 보이지 않는 듯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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