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76화 (176/201)

#   176 - 광세일소_한추영 - 1668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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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1)

석추명이 어검술을 펼쳤다. 등 뒤에 꽂혀 있던 비천검이 저절로 허공으로 튀어 오르더니 설랑의 등을 겨냥하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설랑은 검이 날아오자 임예린을 잡지 않은 손을 뒤로 떨쳤다. 그러자 비천검이 ‘띵’ 소리를 내며 숲속으로 튕기며 떨어져 버렸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맨손으로 검기가 깃든 검을 쳐내는 것은 절세고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설랑과 처음으로 손을 섞어본 석추명은 상당히 놀랐다. 방금 자신의 검을 떨쳐낸 위력으로 보건대 적어도 힘으로만 판단하면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설랑이 석추명의 검을 쳐내는 사이, 기하진이 상당히 따라붙었다. 기하진은 장풍을 내쏠 거리까지 따라붙자 노성을 터뜨리며 허공에 쌍장을 뿌렸다.

“네 이놈. 당장 예린이를 내려놓지 못할까.”

‘펑’ 소리와 함께 거대한 힘줄기가 정통으로 설랑의 등 한복판을 때렸다. 보통사람이라면 즉시 피를 토하며 내상을 입을 장력이었으나 설랑은 그저 한번 비틀거렸을 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석추명은 당장 혼원일기검을 전개하여 검기의 그물을 뿌리고 싶었으나 임예린이 다칠까 봐 함부로 검기를 뿌릴 수 없었다.

“예린아, 금방 구해줄 테니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있어야 한다.”

석추명이 단전에 기를 모아 힘껏 소리쳤다. 거리가 멀어 임예린의 답은 들리지 않았으나 아마 자신의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형님, 어검술을 한 번 더 펼쳐요. 그때 내가 격공탄지를 펼칠 테니 동시에 공격해요.”

기하진의 제안에 석추명이 회수한 비천검을 다시 한번 공중에 띄웠다. 비천검이 설랑을 향해 질풍처럼 날아가더니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며 설랑의 등 쪽 심장부위를 겨냥했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이 설랑의 무릎 뒤쪽을 겨냥하고 무형의 기운을 모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동시에 공격했으니 놈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둘 다 막아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비천검과 격공탄지로 뿌린 강기(剛氣)가 설랑의 몸에 닿기 전에 설랑이 별안간 껑충 뛰더니 수 장 앞으로 도약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중에 다시 도약하는 것은 늑대 같은 짐승들이나 가능하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랑의 도약으로 석추명의 비천검과 기하진의 격공탄지는 허공을 때리고 말았다. 하지만 석추명과 기하진은 설랑을 놓치지 않고 계속 뒤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로는 일봉과 마룡자가 역시 전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설랑이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석추명이 보니 앞에 길이 없었다. 설랑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 도달한 것이다.

설랑과 석추명, 기하진이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설랑이 임예린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꽉 붙잡았다. 사색이 된 임예린의 모습에 기하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무작정 덤벼들려고 했으나 석추명이 앞을 막아섰다. 만약 그랬다가 설랑이 임예린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예린이를 놓아줘.”

석추명이 설랑을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차분히 얘기하며 슬며시 한 걸음 다가갔다. 설랑은 석추명이 다가오자 목 깊숙한 곳에서 으르릉 소리를 내뱉으며 벼랑 끝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 일봉과 마룡자도 도착했다. 설랑 한 명을 두고 네 명의 고수가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였다.

- 저 녀석을 벼랑 끝에서 앞쪽으로 좀 끌어내야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추명이 세 사람에게 전음을 했다. 세 사람 모두 석추명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세 걸음 천천히 물러섰다. 설랑이 벼랑 끝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임예린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랑은 네 사람을 노려보기만 할 뿐 벼랑 끝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한 상태로 잠시 시각이 흘렀다. 임예린이 발버둥을 쳐보았으나 설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기만 할 겁니까? 그냥 들이치자고요.”

초조한 기하진이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쌍장을 시전했다.

“잠깐만!”

석추명이 놀라서 하진을 만류하려고 했으나 이미 기하진의 장력이 해일처럼 설랑의 가슴에 밀려들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일봉의 보문검이 번쩍, 하고 검기를 뿜어냈다.

콰르릉.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검기가 석 자나 뻗어 나가며 설랑의 하반신을 베어갔다. 점창파의 대고수인 마룡자는 문파의 검법인 사일검법(射日劍法)을 펼쳐 점을 찍듯 어깨를 공격하며 일봉과 장단을 맞추었다.

한 손에 임예린을 붙잡고 있는 설랑이 이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석추명은 설랑이 임예린을 낭떠러지로 던져버릴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임예린을 방패 삼아 검기를 막아낼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세 고수의 장력과 검기가 자신을 공격해오자 설랑은 오히려 임예린을 보호하려는 듯 가슴 안쪽으로 감싸 안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 찰나지간에 기하진의 장력이 설랑의 등을 때리고, 일봉과 마룡자의 검기가 설랑의 다리와 어깨를 베었다. 분명히 세 공격이 모두 적중했건만 설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예린아!”

석추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황급히 벼랑 끝으로 달려갔으나 설랑은 가속도가 붙어 이미 10여 장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벼랑 아래는 운무가 자욱하게 피어 있어 얼마나 깊은지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예린아!”

석추명이 애타게 임예린을 불렀다. 기하진을 비롯한 나머지 두 사람도 설랑이 설마 벼랑 아래로 뛰어내릴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기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하진, 이 자식아! 조심하라고 내가 그렇게 일렀건만. 예린이가 잘못되면 네 녀석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석추명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기하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기하진도 눈꼬리를 추켜올리며 석추명에게 맞섰다.

“그게 왜 제 잘못입니까? 그러는 형님은 뭘 했습니까? 멍청히 보기만 한다고 예린이를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랑 그 자식이 넙죽 예린이를 갖다 바쳤을까요? 형님은 뭘 잘했다고 큰소리냔 말입니다.”

“뭐라고? 이 자식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석추명이 비천검을 움켜쥐고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좋아요. 한판 붙어봅시다. 그 잘난 어검술, 나한테도 통하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기하진이 지지 않고 자신의 검을 뽑았다. 천마검법을 펼칠 태세였다.

“오냐, 한번 붙어보자. 그러지 않아도 진즉에 네놈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주고 싶었으니까.”

카강.

기하진과 석추명의 검이 맞부딪히려는 찰나 두 사람 사이에 일봉이 번개같이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무공에 비해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석 소협, 기 소협, 왜들 이러십니까? 이럴 시간에 아가씨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봉의 간절한 말에 석추명과 기하진은 서로 노려보다가 검을 내렸다.

“휴, 일봉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죄송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어서 아가씨를 찾으러 가야지요.”

그때 마룡자가 껄껄 웃으며 일봉에게 말했다.

“그냥 두 놈이 좀 치고받고 싸우게 내버려 두지 뭐하러 말려? 에잉, 좋은 구경 놓쳤구먼.”

일봉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마룡자를 쳐다보았다.

“아까 보니 설랑이라는 놈, 그 처자를 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장력과 검기에서 오히려 그 처자를 보호했던 걸 보면 말이야. 게다가 아까 보니 그놈의 신체 능력이 아주 비상하더구먼. 그놈 이름 그대로 한 마리의 늑대 같았어. 내 장담하건대 그놈 죽지 않네. 그리고 그 처자도 얌전히 보호하고 있을걸세.”

일봉은 임예린이 죽지 않았으리라는 말에 기뻐하면서도 얌전히 보호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놈은 3년 전부터 아가씨를 노리던 놈입니다. 아가씨가 안전하리라고 절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설랑이 임 소저를 노리는 이유가 뭔가? 임 소저가 미색이 곱긴 하지만 강시가 된 놈이 그것을 알까?”

일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랑은 원래 천산산맥의 비적단 두목입니다. 당시 그놈이 아가씨를 납치한 이유는 아가씨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일봉의 말에 석추명과 기하진이 모두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가씨를 범하려고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놈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때도 혼인예식을 따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아가씨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설랑이 활강시가 된 이유도 어쩌면 아가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가씨 주위에 있는 고수들을 뚫고 아가씨를 데려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일봉의 말을 듣던 기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난번에 그놈과 잠깐 겨루어봤을 때 그놈의 무공은 그리 높지는 않았습니다. 신체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으나 상승무공을 익히지 못한 탓에 대단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놈이 활강시가 된 것이 어쩌면....”

“예, 어쩌면 기 소협 때문일 것입니다. 기 소협과 겨루고 나서 절망했을지도 모르지요.”

일봉이 우려섞인 눈길로 기하진과 석추명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아가씨께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일봉의 말에 기하진이 소리쳤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절벽 아래로 내려가 봅시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요.”

그때 신교의 총단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대주님, 대주님!”

달려온 사람은 사소혜였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대주님, 여기 계셨군요. 헉헉. 음양사자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음양사자가 중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사소혜의 말에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의 인상이 동시에 굳었다. 음양사자가 중상을 입다니, 소림 신승과 맞붙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고수를 누가 해쳤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지? 누가 음양사자에게 중상을 입혔단 말이냐?”

다급한 석추명의 물음에 사소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음양사자가 지금 대주님을 급히 찾고 있습니다.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예린이를.....”

석추명이 말을 잇지 못하고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임예린을 찾으러 가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죽어가는 음양사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데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예린이는 우리가 찾을 테니 형님은 음양사자에게 가보세요. 음양사자는 남 교주 뒤를 쫓고 있었으니 어쩌면 남 교주에게 당했을지도 모르지요. 남 교주는 형님의 불구대천의 원수 아닙니까?”

조금 전까지 서로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으나 지금 이 순간 석추명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기하진이었다.

석추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를 찾는 일은 하진이가 잘할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냉철하고 결단력 있는 녀석이니.

“그래. 네 말이 맞다. 남 교주는 내 스승님의 원수야. 나는 가서 어떻게 된 것인지 음양사자를 만나보마. 너는 예린이를... 꼭 구해서 오너라.”

석추명의 눈빛을 바라보며 기하진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기하진 일행과 헤어진 석추명은 사소혜와 함께 총단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음양사자 선배는 지금 어디 계시지?”

“불모전에... 계셔요.”

사소혜가 잠시 석추명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불모전이라는 말에 석추명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문득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우아한 한 떨기 수선화 같던 사람. 자신을 구한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던 황연화의 처량한 눈빛이 떠올랐다. 내세에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고 싶다던 황연화의 바람에 자신은 답도 해주지 못했다.

문득 심장에 까슬까슬한 작은 가시가 박힌 듯이 가슴이 쓰라렸다.

“갑자기 불모님 생각이 나서 불모전에 갔었는데 뜻밖에 음양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거기에 쓰러져 있었어요. 계속 대주님을 찾기에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랍니다.”

사소혜의 말을 들으며 석추명은 심호흡을 한번 내쉬고는 허공으로 신형을 길게 뽑아 올렸다.

“먼저 불모전으로 갈 테니 거기에서 보도록 하자.”

석추명의 뒷모습이 떨어지는 유성처럼 순식간에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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