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 광세일소_한추영 - 1666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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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생사대전(生死大戰) (6)
‘생명은 사그라들었어도 몸이 무공을 기억하는구나.’
뢰정이 삼도종검세를 펼치자 세 개의 원반 같은 검기가 상, 중, 하로 나누어 석추명을 향해 날아왔다. 삼도종검세는 검기의 위력이 워낙 막강하여 파훼법이 따로 없었다. 결국 피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뒤에 있는 곤륜칠검의 목숨이 위험했다.
예전 같으면 뢰정의 검세를 절대 막아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석추명은 스승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은 상태라 한번 무모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석추명이 즉시 검을 곧추세우고 역시 삼도종검세를 펼쳤다.
지이잉, 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자 세 개의 검기가 발출되어 뢰정이 뿌린 검기에 부딪혀 갔다. 원반 모양의 검기는 면적은 넓으나 두께는 면도날처럼 지극히 얇았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서로 엇갈린다면 검기가 상충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 비록 자신의 검기에 상대방이 다치더라도 자신도 역시 상대방의 검기에 당하고 마는 위험천만한 수법이다.
콰르르르.
원반 같은 검기가 서로 맞부딪히며 빠른 속도로 소멸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던 것이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석추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옆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곤륜칠검 중 다섯째가 초의공의 검에 그만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운래야!”
칠검 중 맏이인 운기자가 다급하게 다섯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곤륜칠검은 초의공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사제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검날에 사정을 두었었다. 하지만 초의공은 곤륜칠검의 그런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다섯째의 팔 하나를 잘라낸 것이다.
챙. 챙. 챙. 챙.
곤륜칠검의 검이 좌우에서 세 개씩 동시에 초의공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초의공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검날을 사뿐히 밟아 허공으로 도약하더니 한쪽 팔을 잃고 비틀거리는 다섯째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았다.
“윽”
“사제!”
“운래 사형!”
다섯째가 그대로 절명했다. 드디어 첫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피를 보자 강시는 더욱 미쳐 날뛰었고 반대로 육검이 되어버린 곤륜칠검은 손발을 허둥댔다.
“으악!”
또 한 명이 초의공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칠검 중 막내였다.
“안돼! 의공 사제, 자네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막내가 죽자 운기자는 초의공이 강시라는 사실도 잊고 울부짖으며 초의공에게 달려들었다.
“운기야, 위험하다.”
운기자가 이성을 잃고 막무가내로 초의공에게 덤비자 옆에 있던 태허자가 검광을 떨치며 운기자보다 한발 앞서 초의공을 공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검광이 난무하더니 스승과 제자가 몇 차례나 검을 주고받았다. 태허자는 싸울수록 놀라웠다. 죽은 몸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강시가 어떻게 생전의 무공을 모두 기억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초의공의 검법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검기가 불꽃처럼 작렬하기 시작했다. 태허자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황급히 초의공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처음 보는 검법이라 손발이 잠시 어지러웠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운기자가 소리쳤다.
“그 검법은 의공 사제가 창안한 중천자미유성검이라는 검법입니다.”
그 말에 태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의공은 오성(悟性)이 뛰어나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수법을 종종 생각해내곤 했지. 나는 의공이 우리 곤륜파의 무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리라고 믿고 있었거늘....”
태허자의 목소리가 처량했다. 앞날이 창창했던 애제자가 목숨을 잃고 강시가 되어 오히려 스승과 동문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 90년이 넘도록 수련에 매진했던 태허자도 허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잃은 초의공에게는 태허자도 곤륜칠검도 그저 섬멸해야 할 적일 뿐이었다. 초의공이 내뿜는 살기가 점점 강해지더니 태허자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놀란 곤륜칠검이 뒤에서 초의공을 공격해 들어갔으나 곤륜칠검의 공격은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휘리릭. 초의공이 공중으로 높이 도약하면서 검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태허자가 놀라서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검이 서로 부딪히는 순간 태허자의 검이 대번에 챙강 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갔다.
“스승님!”
스승이 다치자 운진자와 운기자가 소리치며 달려와 동시에 초의공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초의공은 두 사람의 검은 막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태허자의 가슴에 검을 찔렀다.
“아!”
태허자의 하얀 도포가 금세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의공아, 이 불쌍한 녀석.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면 얼마나 괴로워할꼬.”
사형의 검에 양 옆구리를 찔린 초의공의 모습이 태허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의공의 검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 무슨 비극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스승은 죽어가면서도 제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며 탄식했다.
“아, 이 사부가 쓸데없이 너무 오래 살았구나.”
태허자가 가쁜 숨을 내쉬더니 결국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스승님!”
태허자가 죽자 운진자와 곤륜칠검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20년 만에 스승을 만났는데 같은 날 다시 스승을 잃은 것이다.
“남무궁 네 이놈! 어디 숨어있느냐? 당장 나오지 못할까!”
운진자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스승과 사제를 한꺼번에 잃은 슬픔이 분노가 되어 석실 안을 메아리쳤다.
“태허 도장님!”
태허자가 숨을 거두자 석추명도 놀라서 소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허자의 제자인 초의공의 손에 죽은 것이다. 이지(理智)가 없는 초의공은 태허자가 죽은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곤륜 제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곤륜 제자들의 절규에 석추명은 남무궁에 대한 분노가 새삼 다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어떻게 이다지도 악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들이 존경하던 스승과 사랑하던 제자의 손에 죽어 나가는 이 상황이 정말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만약 뢰정과 초의공의 영혼이 이 광경을 지켜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타들어 갈 것인가.
석추명이 흘깃 보니 기하진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기하진은 눈시울을 붉힌 채 한때 가장 친했던 친우의 가슴에 검기를 뿌리고 있었다. 석추명이 알기로 지학이라는 저 승려도 사천대전 당시 기하진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검을 찔러넣어야 하는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강시는 아무리 검으로 베고 찔러도 끄덕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칠 줄을 모르니 쉬지 않고 덤벼들었다. 남무궁의 말대로 죽어서야 여기를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태허자가 죽으면서 백련신교의 전대 교주 백정천과 세 장로를 상대하던 혼원팔괘진의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칠선의 무공에도 금방 우열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보다 체격이 왜소한 마룡자가 가장 먼저 백정천의 목표물이 되었다. 백정천이 삼 장의 거리를 단숨에 도약하며 마룡자의 등 뒤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 순간 마룡자는 신교의 전대 장로 중의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기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룡자의 양옆에 있는 두 사람이 마룡자를 대신해 백정천의 검을 막아야 하나, 진법이 깨진 이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 순간, 백정천의 모습이 석추명의 눈에 들어왔다. 석추명은 몸을 비틀어 뢰정의 공세에서 빠져나온 다음, 옆에 있는 석관을 발로 차서 백정천에게 날렸다.
쿠쿵.
백 근도 더 나갈 듯한 거대한 석관이 석추명의 발길질에 허공을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백정천의 옆구리를 그대로 때렸다. 그런데 석관이 날아가자 갑자기 뢰정이 목구멍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석관을 따라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석관이 바닥에 닿기 전에 낚아채서 얌전히 내려놓는 것이었다. 석관이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무척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석추명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다른 석관 두 개를 연거푸 발로 차서 석벽으로 날려 보냈다.
콰르릉. 쾅.
꺄르륵.
석관이 석벽에 부딪혀 박살이 날 지경이 되자 황보와 신갈 장로 역시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석관을 잡으러 다급히 몸을 날렸다. 석관을 보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석관이 저들의 약점인 것 같습니다. 석관을 벽으로 날려 보내십시오.”
석추명의 말을 들은 기하진이 자신의 앞에 있는 석관 두 개를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그러자 덜커덩 소리와 함께 석관이 앞에서 누군가 잡아끄는 것처럼 석실 끝으로 쭉 밀리며 벽으로 돌진했다. 또다시 두 구의 강시가 싸우다 말고 석관을 보호하려고 석벽 끝으로 날아갔다.
그 광경을 곁눈질하던 일봉이 자신의 옆에 있는 석관을 깨부술 요량으로 보문검을 휘둘렀다.
쐐액, 소리와 함께 검이 석관의 정중앙을 자르려는 순간, 신교의 전대 우사인 모용추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일봉의 검을 막았다.
약점이라고는 전혀 없던 강시들이 석관에 예민하게 반응하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전세가 바뀌었다. 당장 강시들을 소멸시킬 수는 없으나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놈들아, 어디 다리가 부서지도록 좀 움직여 보아라. 껄껄.”
마룡자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석관 하나를 가볍게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육중한 석관이 공중에서 한차례 빙그르르 돌더니 마룡자의 발길질에 마치 공처럼 석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번에는 지학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비틀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냐?”
석추명이 비틀거리는 기하진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기하진은 석추명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해가 뜨려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석추명이 저린 팔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글쎄.”
빛이 완전히 차단된 석실 안은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밤새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석추명과 기하진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고 몸에는 온갖 자잘한 검상과 상처가 가득했다.
그때 어디에선가 임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잘 들으세요. 이제 반 시진만 지나면 해가 뜹니다. 그때까지만 좀 더 버티세요.”
임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가운 마음에 석추명이 힘껏 소리쳤다.
“예린아, 너는 괜찮으냐? 지금 어디냐?”
“저는 괜찮아요, 오라버니. 이곳은 교주전에 있는 방인데 지하 석실이 한눈에 다 보이는 방이에요. 방법을 강구해서 꺼내 드릴 테니 조금만 더 버티세요.”
임예린의 목소리가 들리자 석추명, 기하진, 일봉은 힘이 솟구치는지 세 사람이 동시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룡자가 강시와 싸우면서도 껄껄 웃으며 매곡자에게 말했다.
“젊은 게 좋긴 좋구나. 아리따운 처자 목소리에 금방 활기를 띠는 것을 보면. 우리도 한때는 저랬는데 말이야. 껄껄껄.”
다시 시간이 흘렀다. 반 시진은 훨씬 지난 것 같은데 강시들의 움직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린아, 아직 반 시진이 지나지 않은 거야?”
기하진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해는 이미 떴어요.”
“그래? 그런데 왜 강시들은 그대로인 거야?”
이미 해가 떴다는 말에 기하진과 석추명, 일봉은 놀라 서로 쳐다보았다. 강시는 음기가 강해서 해가 뜨면 움직일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들은 그대로일까?
“저도 모르겠어요. 혹시 햇빛이 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임예린의 말에 세 사람은 흠칫했다. 이 석실은 지하라 원래 햇빛이 들지 않은 데다 앞뒤 석문까지 막혀 버려 횃불이 없다면 깜깜한 암흑지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바깥은 해가 뜨더라도 이곳은 여전히 어두운 밤이 아니겠는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세 사람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거대한 바위를 통으로 깎아 만든 석문은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몇 날 며칠이고 죽을 때까지 계속 강시와 싸울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때 돌연 어디선가 콰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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