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73화 (173/201)

#   173 - 광세일소_한추영 - 1663521

#

제172화 생사대전(生死大戰) (5)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스승 뢰정이 지금 석추명의 눈앞에 서 있었다. 꿈속에서라도 한 번만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스승이었다. 하지만 스승의 눈은 예전의 자상하고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다. 겉모습은 분명히 똑같은 스승이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은 살기로 충만했다. 앞을 막아서는 것은 무엇이든지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뢰정이 다가오자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스승의 몸에 검을 갖다 댈 수 있을까? 아무리 강시로 변했다지만 스승의 형상을 한 사람을 검으로 찌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어떻게 스승의 몸에 검을 갖다 댄단 말인가?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신 분께 어떻게 내가 검을 갖다 댄단 말인가.

석추명이 머리를 도리질 치며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석관에서 나온 강시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은 석추명 혼자가 아니었다.

“의공 사제! 자네가 어찌, 어찌...!”

입안이 바싹 마른 듯 운진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또 다른 석관에서 초의공이 나타났던 것이다. 얼굴빛이 유독 검을 뿐, 초의공은 생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가만히 서서 운진자를 주시했다.

“의공아, 네가 어찌 거기서 나오느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태허자가 초의공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초의공의 얼굴은 유독 생기가 없고 무표정했으나 태허자는 그것이 강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안됩니다. 스승님!”

태허자가 초의공에게 다가가자 운진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초의공은 태허자가 다가오자 돌연 검을 비켜 잡더니 불시에 태허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무공조차 생전에 쓰던 곤륜파 무공 그대로였다.

태허자는 초의공이 자신에게 검을 휘두를 것으로 예상치 못한 탓에 얼른 피하기는 했으나 그만 검날이 얼굴에 스치고 말았다. 태허자의 얼굴에 가느다란 칼자국이 생기며 대번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연로하신 스승이 다치자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황급히 태허자 앞을 막아섰다.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태허자는 다친 것보다 사랑하던 애제자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 더 놀란 눈빛이었다.

“괜찮다. 검이 스친 것뿐이니라. 그런데 의공이가 어째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냐?”

태허자의 말에 운진자가 눈시울을 붉히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초의공이 죽었다고 석추명이 말했을 때 자신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부님, 의공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의공이 저기 저렇게 버젓이 서 있지 않으냐?”

운진자가 충혈된 눈으로 스승의 손길을 따라갔다. 초의공이 텅 빈 눈빛으로 다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것은 의공이 아니라, 의공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의공은 간악한 마교 놈의 손에 강, 강시가 되었습니다.”

운진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곤륜파에서 가장 촉망받던 검객이 허무하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은 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강시가 되어 자신들 앞에 서 있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운진자의 말에 태허자를 비롯하여 나머지 팔선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금 강시라고 하였느냐?”

운진자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허, 어찌 이런 일이! 역천(逆天)이로다. 누가 도대체 천리를 거슬러 생과 사를 어지럽힌단 말이냐.”

태허자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하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닌지 싶어 계속 눈을 깜박였다. 일전에 사마경의 진법에 갇혔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기에 지금 보이는 사람이 혹시 환상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하진의 앞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림 승려가 손에 제미곤을 들고 서 있었다. 두툼한 눈썹, 초롱초롱한 눈매, 쭉 뻗은 콧대와 붉은 입술은 옥면나한이라는 별호가 붙어있던 지학이 분명했다.

기하진은 지학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몸에 군데군데 상처를 기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죽을 때 생겼던 상처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죽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과 함께 신나게 장난치던 천림원 시절의 장난꾸러기로만 보였다.

“지학아.”

기하진이 가만히 지학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학의 눈빛은 분명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암흑. 무저갱과 같이 끝없이 침잠하는 텅 빈 암흑이었다.

속에서 별안간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이런 씨벌!”

기하진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벽면을 내리쳤다.

쾅!

천룡파천장의 막강한 공력이 실린 기하진의 장력에 석벽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졌다.

“으하하하, 그렇게 힘을 헛되이 쓰면 안 된다고 내가 경고했을 텐데?”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 남무궁의 목소리가 다시 석실 전체에 울렸다.

“남무궁, 이 미친 새끼야. 이리 나와. 나랑 한번 붙어보자.”

기하진이 분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에서 핏대가 불끈 솟았다.

“흐흐흐, 기 단주. 자네가 싸워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자네 앞에 있는 그놈일세. 자, 그럼 어디 한번 신나게 싸워 보아라. 어차피 살아서는 나가지 못할 테니. 으하하하.”

남무궁의 웃음소리가 석실 안을 가득 채웠다.

“저 시끄러운 놈은 도대체 누군가?”

마룡자가 묻자 곤륜칠검 중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저자가 바로 마교 교주 남무궁입니다.”

“무슨 소리냐? 마교 교주는 저놈이거늘.”

마룡자가 제일 뒤에 있는 강시를 가리켰다. 구레나룻을 길러 표정이 엄숙하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만큼 키가 큰 강시였다.

“저놈이 바로 마교 교주 백정천이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고 들었거늘 여기에 숨어있었다니.”

마룡자의 말에 운진자를 비롯한 곤륜칠검이 모두 놀라 눈을 치켜떴다. 백정천은 당대에 당할 자가 없다던 마교 제일의 고수였다. 심지어 비천검 독고양이나 소림 신승마저도 일 대 일로 싸운다면 반 수 가량 뒤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세인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더니 여기서 나타날 줄이야.

매곡자가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강시가 된 것으로 보아하니 저놈도 죽은 거야. 저놈도 남무궁의 손에 죽었겠지. 그나저나 저놈뿐만 아니라 마교의 3대 장로와 우사였던 모용추도 모두 죽었구먼. 남 좌사가 교주와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했을 것이라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열 개의 석관에서 나온 강시는 초의공과 지학을 제외하면 모두 신교의 고수들이었다. 남무궁이 잔인한 피의 숙청으로 교권을 잡았다고 하더니 그 증거가 눈앞에 드러난 셈이었다.

“으흐흐, 늙은이 말이 맞아. 그동안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는데 대신 얘기해주니 속이 다 후련하군. 오늘 이 석실에서 죽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내 그대들을 모두 강시로 만들어 향후 신교의 무림제패라는 대업에 동참하게 해줄 테니 말이야. 으하하하.”

광인의 웃음소리가 저럴까? 동상이몽이라 하더니 맹주 남궁진악과 신교의 교주 남무궁이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마치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남무궁의 말에 석실에 있던 모든 사람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여기서 죽게 되면 죽어도 죽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강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죽여라.”

남무궁의 말이 떨어지자 열 구의 강시가 동시에 검을 들고 진격해왔다. 죽은 자의 몸이라 뻣뻣하고 움직임이 어색하리라 생각했던 추측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생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나 무공이나 움직임은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무공의 위력이 생전보다 몇 배로 더 강해진 듯했다.

뢰정이 석추명을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내찔렀다. 신교에 갓 입문했을 때 어린 제 손을 잡아주며 스승이 친히 지도해주었던 바로 그 검법이었다. 사대검왕 중 으뜸이라는 수식어답게 뢰정의 검법은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공격으로 상대방의 허점을 유도하여 적을 제압하는 수라검. 석추명이 비록 검초와 검식을 모두 알고 있으나 이전의 그였다면 결코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석추명은 숨 쉴 틈 없이 펼쳐지는 스승의 공격을 일일이 막아내면서도 감히 반격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반격을 한다는 것은 곧 스승의 몸에 검을 찔러 넣는다는 것. 하지만 차라리 제 몸에 검을 찔러 넣을지언정 스승의 몸에 검을 대지는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도 상황이 다르지 않아 지학과 싸우는 기하진, 초의공과 싸우는 운진자와 곤륜칠검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자신들의 친우와 동문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다 보니 모두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석실이 넓다고 생각했으나 쌍방 간에 싸움이 시작되자 절대 넓지 않았다. 석추명과 기하진 은 상대방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없으니 절정의 경공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평상시보다 두세 배는 힘든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팔선이 창안한 혼원팔괘진 무공이 워낙 신묘하여 아직은 백중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적은 아무리 싸워도 지치지 않지만, 이쪽은 싸울수록 지쳐갔다. 공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한 곤륜칠검은 벌써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했다.

문득 석실 바깥에서 격전이라도 벌어진 것인지 거센 파공음이 들려왔다. 간간이 고함소리와 함께 남무궁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더니 한참이 지나자 투닥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석추명,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만 다닐 셈이냐?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것은 너의 스승이 아니라 남무궁의 꼭두각시 살인 병기일 뿐이다. 그놈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놈은 밖으로 나가 온 세상을 대환란으로 빠뜨릴 것이다.”

음양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양사자 역시 어디선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무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서 남무궁이 있던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분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석추명이 허공을 향해 강변했다.

“그렇게 물러 터져서야 어떻게 천하의 안위를 도모하겠느냐? 오늘 뢰정을 없애지 못하면 뢰정은 밖으로 나가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해칠 것이야. 게다가 너마저 뢰정의 손에 죽게 되면 네놈도 남무궁의 꼭두각시가 되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텐데 그래도 좋단 말이냐!”

음양사자의 말이 죽비가 되어 석추명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머리가 얼음물에 들어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혹한 모습으로 목숨을 잃은 소림 승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승 뢰정이 소림 승려들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강시 열 구의 손에 3,000명에 달하는 승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으니 뢰정의 손에 죽은 숫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림사의 고수들이 그렇게 당할 정도라면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승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스승 뢰정은 지금 이지(理智)를 잃고 오직 남무궁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다. 음양 사자의 말대로 살인 병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스승을 위한다면 스승이 영면에 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 뜰 때까지만이라도 버티어라. 버티려면 맞서 싸워야 한다. 해가 뜨고 나면 방법을 찾아 시신을 불태울 테니, 그렇게 되면 네 스승도 영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음양사자의 말에 석추명이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정말 이기적이고 위험한 생각이었다. 결국 자신만 편하자고 하는 것일 뿐,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스승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석추명의 마음이 정리되자 비천검에서 막강한 검기가 터져 나왔다.

콰르릉 쾅.

비천검을 떠난 푸르스름한 검기가 천군만마처럼 뢰정을 향해 돌진했다. 뢰정의 몸이 난무하는 검기에 파묻혀 잠시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추명이 검을 쥔 손에 공력을 돋우었다. 스승님, 이대로 영면에 드십시오. 제발.

“숭양일기검(崇陽一氣劍) 삼도종검세(三到鐘劍勢)!”

석추명의 검에서 원형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커다란 검기가 수평으로 발출되었다.

찌이잉.

검기에 닿은 석관이 절삭기에 갈린 것처럼 그대로 평평하게 잘려나갔다. 이 정도의 공력이면 황소라도 통째로 절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퍽!

검기가 사라진 뒤 뢰정의 몸에는 무수한 검상이 남았다. 온몸의 살갗이 종횡으로 베여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이지를 잃었다고 생각한 뢰정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자 석추명은 순간 속이 뜨끔했다.

뢰정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저절로 봉합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기이한 노릇이었다.

뢰정이 검을 곧추 들고 석추명에게 달려들었다. 그 검세를 보는 순간 석추명은 숨이 턱 막혀왔다. 뢰정이 지금 펼치는 수법은 자신이 방금 스승에게 썼던 것과 똑같은 검법의 초식이었다.

‘숭양일기검 삼도종검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