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 광세일소_한추영 - 166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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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생사대전(生死大戰) (4)
저 멀리 석양이 지고 있었다. 말을 달리는 석추명의 눈앞에 화련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드러났다. 화련산 위로 보이는 하늘에 붉은 놀이 물들고 있었다. 그날 봤던 스승의 피 같은 붉은 놀이.
화련산이 눈에 들어오자 석추명은 가슴이 먹먹했다. 스승과 초의공, 황 장로와 불모 황연화가 하루 사이에 모두 죽고, 어슴푸레한 새벽녘 혼자서 미친 듯이 화련산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았다.
“산은 그대로구나.”
자신도 모르게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산은 그대로지만 사람은 그대로가 아니었다. 자신은 스승의 유언대로 화산으로 가서 비천검 독고양을 만나 심법을 얻고 화산신검이 되었다. 이제는 정파인들의 집단인 정도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백련신교의 출신이라기보다는 화산파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같이 일하기 편하기에 그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석추명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물론 화산 심법을 얻고 화산파에 발을 디디긴 했으나 그 전에 자신을 가르치고 이끌어주셨던 분들은 모두 백련신교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좋으나 싫으나 자신은 신교 출신인 것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여기부터 신교의 총단까지는 형님이 안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하진의 목소리에 석추명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하마.”
백련신교는 총단의 위치를 은밀히 감추어 왔다. 신교가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취지를 내걸고 관군과 맞서면서 조정은 몇 번이나 대군을 파견하여 백련신교의 총단을 소탕하려 했다. 하지만 총단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만큼 신교의 위치는 극비사항이었다.
“팔선 어르신들은 아무래도 저희보다 먼저 가신 듯합니다. 아직 아무런 종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일봉이 산길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총단에 닿을 때쯤 석양이 완전히 질 텐데 그렇게 되면 강시가 되살아나니 위험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큰일이네. 좀 더 속도를 내세나. 석 소협, 어서 앞장서시게.”
운진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석추명을 채근했다. 운진자는 여전히 초의공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의공이 죽었다고 말했던 석추명과의 갈등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탓에 평소에도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온종일 석추명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으나 지금은 사부인 태허자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는 듯했다.
석추명도 그런 운진자의 마음을 잘 알기에 얼른 걸음을 옮겼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중간중간에 신교의 경계병들이 있으니 소리는 가급적 내지 말아야 합니다.”
석추명이 앞장서자 그 뒤를 따라 기하진, 일봉,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바닥을 박차며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화련산은 크기도 웅장했지만 산세도 무척 험했다. 가파른 산길은 오악에 버금갈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드디어 해가 지고 하늘에 별이 뜨기 시작했다. 불빛도 없는 어두운 산길을 찾아가기 쉽지 않으련만 석추명은 마치 평지를 가듯 훨훨 날아갔다. 10여 년간 오르내리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이상하게 경계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일봉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경계 초소를 벌써 몇 개 지나쳐온 것 같은데 초소마다 경계병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신교에 몸담을 때만 하더라도 총단이 외부에 노출될까 봐 이중, 삼중으로 경계를 섰었는데 그새 많이 바뀐 듯했다.
-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암튼 빨리 올라가 보시지요.
다시 반 시진이 지나자 드디어 울창한 나무숲 속에서 총단을 이루는 석각이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감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팔선을 찾아야 했다.
총단 입구에서부터는 더욱 발걸음을 은밀히 움직였다. 생각보다 외부에서 경계를 서는 군사의 수가 현저하게 작았다. 석추명은 의혹이 들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 임예린이 봤다면 왜 그런지 금방 알아냈으리라.
- 팔선 어르신들이 어디로 가신 것 같소?
운진자가 석추명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 팔선 어르신들은 강시가 있는 곳으로 갔을 텐데 강시가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교주전으로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기하진이 석추명에게 물었다.
- 음양사자는 어디서 만나기로 했습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음양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련산으로 출발하기 전 석추명은 은밀히 퍼져 있는 교의 연락망을 통해 음양사자에게 연락했다. 백련신교의 총단을 치러 가니 함께 가자는 말에 음양사자는 총단에서 만나자는 회신을 곧바로 보내어왔다. 자신의 말은 철석같이 지키는 사람이니 온다고 한 이상 반드시 올 것이다.
- 총단에서 보기로 했다. 우리가 먼저 팔선 쪽으로 움직이면 그쪽으로 찾아올 것 같구나.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까지 신교의 수뇌부가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수상합니다.
일봉이 다시 전음을 해왔다. 생각해보니 총단에 팔선과 자신들이 침입해왔는데 장로나 대주급 고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수상하기는 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 한들 설마 지금까지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이건 마치 오라고 일부러 길을 터 주고 있는 형국 아닌가?
석추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팔선을 강시가 있는 쪽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경계를 줄인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그렇다면 경계 무사가 이토록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설명되었다. 아마 이조차도 맹주와 남 교주 간에 서로 이야기가 된 사항일 수도 있었다.
일부러 유인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몸을 숨기고 은밀히 움직일 필요는 없으리라.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석추명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낮은 목소리이긴 했으나 전음(傳音)이 아니라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석추명이 교주전을 향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질주했다. 기하진과 일봉 등 나머지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석추명의 뒤를 따랐다.
교주전에 가까워지자 과연 어디선가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말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투덜거리는 말투로 보아 팔선이 분명했다.
‘교주전 지하다!’
그때야 석추명은 이 말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있었다. 교주전 지하에 있는 대형 석실에서 나는 것이 분명했다. 지하 석실로 가려면 반드시 교주전을 통해 내려가야 했다.
남 교주가 안에 있을까? 잠깐 망설였다. 두렵다기보다는 남 교주를 만나면 참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다.
‘더 지체할 수 없다. 빨리 내려가야 해.’
석추명은 뒤에서 따라오던 기하진과 일봉, 운진자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곧장 교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훤히 불이 켜진 교주전 안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이거 이상하구먼. 마기가 이렇게 짙은데 도대체 이놈들은 어디 숨어있는 거야?”
“마교의 10대 고수들이 교주전 지하에 숨어있을 거라고 맹주께서 일러주셨거늘.”
“우리가 오는지 알고 미리 도망친 게 아닐까?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도 우리를 막지 않았잖는가?”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먼. 마교 놈들 무림팔선이 온다고 하니 잔뜩 졸았던 게지. 으하하하.”
팔선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다행히 아직 강시는 나타나지 않은 듯했다.
석추명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신속히 몸을 날렸다. 팔선이 있는 곳은 교주전 지하에 있는 석실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실이었다.
걸음을 옮기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눅진한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검은 이끼가 잔뜩 낀 벽면 군데군데 횃불 몇 개가 초라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죽은 자의 몸에서나 뿜어나올 듯한 음침하고 차가운 냉기가 석실 전체에 감돌았다.
“...!”
팔선이 있는 석실로 들어서자 석추명은 숨이 턱 막혀왔다.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수백 명이 운집할 만한 넓은 석실 한가운데 커다란 석관 열 개가 다섯 개씩 나란히 놓여 있었다. 텅 빈 석실에 석관 열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팔선은 석관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석관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심지어 석관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선배님들.”
석추명의 목소리에 팔선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질!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화산파 매곡자가 석추명을 보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늘 붙어 다니는 점창파의 마룡자도 함께였다.
“오호라, 우리가 마교랑 싸운다고 하니 걱정이 돼서 왔나 보군. 착한 녀석이야, 암.”
마룡자가 통통한 볼에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표정으로 보건대 눈앞의 석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곧 기하진, 일봉,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당도했다.
“사부님!”
갑자기 운진자가 석실이 떠나갈 듯이 목청을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일제히 우르르 달려가더니 어떤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운진자는 목이 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20년 만에 만난 스승이었다. 자신이 석추명 나이였을 때 헤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스승이었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그간 곤륜파가 맹주에게 당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떠올라 운진자는 눈이 벌게진 채 어깨만 들썩였다.
“오랜만이로구나, 운진아.”
태허 도장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 사람처럼 편안하게 운진자와 곤륜칠검을 맞이했다. 그제야 입술만 깨물고 있던 운진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부님, 평생 다시 못 뵐 줄 알았습니다. 강녕하신지요?”
“오냐. 이 사부는 평안하게 지냈느니라. 일어들 나거라.”
태허 도장이 운진자와 곤륜칠검을 잡아 일으켰다. 운진자의 입술이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던 기하진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봐, 젊은이. 무림팔선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 이 친구, 보기보다 간담이 작구먼. 쯧쯧.”
마룡자가 볼록한 배를 앞으로 내밀며 혀를 찼다.
석추명은 뚜껑이 굳게 닫힌 석관을 바라보았다. 해가 진 다음에는 절대 강시와 마주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던 임예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진이 말이 맞습니다. 선배님들, 여기서 일단 나가시지요. 나가서 저희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석추명까지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자 노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있다던 마교 놈들은 없고, 네 녀석들은 오자마자 밖으로 나가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우리 사질이 나가야 한다니 일단 나가고 보세나.”
마룡자가 투덜거리자 매곡자가 석추명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쿵’ 하고 육중한 소리가 울리더니 커다란 석문이 내려와 석실의 후문을 막았다. 불길한 느낌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빨리 이쪽으로 오십시오.”
석추명이 재빨리 석실의 앞문으로 튀어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석추명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다시 ‘쿠르릉’ 소리가 나더니 바위를 깎아 만든 거대한 석문이 내려왔다. 석실 앞문도 닫힌 것이다.
석추명은 깜짝 놀라 석문에 대고 공력을 높여 보았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봉 형님, 하진아, 나를 좀 도와다오.”
당대 최고의 고수인 석추명, 기하진, 일봉이 함께 밀어 보았으나 석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흐흐흐, 오랜만이로군, 석 대주.”
어디선가 남무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 교주?”
석추명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남무궁의 목소리는 석실 전체를 가득 채운 채 웅웅 울려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네라면 그렇게 헛심을 빼지는 않을 걸세. 이제 만나봐야 할 자들이 있지 않겠나?”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남무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자네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네.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말이야. 으하하하.”
남무궁의 거친 웃음소리가 다시 석실을 가득 메웠다.
어디선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설랑을 조종할 때도 방울이 울린 기억이 있었다.
“일어나라.”
남 교주의 말이 떨어지자 석실에 놓여 있던 석관 가운데 제일 앞에 있던 관이 ‘쿵’ 소리를 내며 갑자기 일어섰다. 그것을 선두로 열 개의 관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석관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바람에 벽면에 꽂힌 횃불이 출렁거렸다.
마치 말 잘 듣는 짐승처럼 남 교주의 말 한마디에 석관이 저절로 벌떡 일어서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으나 모두 섬뜩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나와서 저들을 섬멸하라.”
남 교주의 명이 떨어지자 덜커덩 소리와 함께 석관의 문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강시가 나오는 것인가. 하지만 석관을 바라보던 석추명은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스, 스승님...!”
석관 안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스승 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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