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71화 (171/201)

#   171 - 광세일소_한추영 - 1660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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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생사대전(生死大戰) (3)

“자네 방금 누구라고 했나?”

청풍 도장이 벌떡 일어나며 석추명에게 되물었다. 청풍 도장의 반응에 석추명이 놀라 말을 더듬었다.

“예? 아, 화산파의 매곡 도장, 말씀입니까?”

“아니, 그 전에!”

“아, 진뢰 도장 말씀이시군요.”

청풍 도장의 눈가가 벌게지더니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내 생전에 사부님 존안을 다시 뵙지 못하나 했었는데, 사부님이 살아 계시다니...!”

청풍 도장이 석추명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은 청풍 도장뿐만 아니었다. 현암자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주먹을 쥐었다 폈다, 왔다 갔다 했고, 운진자와 곤륜칠검은 기뻐서 껄껄 웃었다. 평소에 근엄한 표정의 허각 도장마저 콧등이 시큰한 듯 코를 자꾸 훌쩍거렸다.

“료료 사숙께서 건재하시다니 하늘이 우리 무당을 아직 버리지 않으신 게야. 암, 그렇고말고.”

모두 석추명에게 팔선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타난 반응이었다.

“중양일지를 잃어버린 다음, 도가 문파를 중심으로 이에 버금가는 무공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었네. 중양신공을 만든 왕중양도 도가인 전진교의 교주였던 만큼, 도가 무공의 정수만을 모은다면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던 것이지. 사실 각 문파는 자신의 무공이 전진 무공에 뒤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이 컸었네. 그래서 7대 도가 문파의 최고 고수들이 맹주의 명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거야. 여기에 당시 명망이 높았던 맹주의 사숙, 건곤검 남궁현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던 것이고.”

운진자가 석추명, 임예린 등 무림 비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지난 일을 얘기해주었다. 새삼 옛일을 듣게 되자 허각, 청풍 도장, 현암자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20년일세. 이분들이 중양신공에 버금가는 무공을 만들지 못하면 영원히 나오지 않겠다는 필사의 서원을 하시고 무림맹 회각동에 들어가신 지 20년 째란 말일세. 처음 몇 년 동안이야 우리도 그러려니 했네. 하지만 5년, 10년 지날수록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네. 몸은 건강하실까, 살아는 계실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분들만 따로 모아 폐관수련을 시킨 것 자체가 맹주의 계략일지도 모르지.”

운진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맹주가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각 문파를 치기 시작하자 우리는 맹주가 이 어른들에게 이미 손을 썼으리라고 판단했지. 생각해보게. 이 어른들이야말로 각 문파의 정신적 지주들인데 맹주가 자신의 등 뒤에 이분들을 그대로 두고 행동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설랑의 잘못으로 이 어른들이 서원을 이루지도 못한 채 나오게 된 것이로군요.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은 설랑에게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것 같군요.”

임예린의 말에 운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야. 그 강시 놈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네.”

“맹주의 계략으로 무림 명숙들이 사라지는 지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기하진이 덧붙였다.

“그래, 이분들이 무림맹에 몸을 담고 계시기는 하나 그래도 사문의 일이 우선 아니겠나? 맹주가 그동안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걸세.”

운진자가 속이 후련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맹주가 이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겠군요.”

임예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맹주의 성격으로 보건대 팔대 장로가 자신의 비밀을 알기 전에 제거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석추명과 기하진의 말을 들어보면 팔대 장로의 무공은 맹주라도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맹주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 노인들을 해치우려고 할까? 어쩌면 독을 쓰는 것이 제일 쉬울지도 몰랐다.

임예린의 우려는 며칠 안 가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개방의 송 방주가 정도련주 앞으로 급보를 전해온 것이다. 개방은 지난번 사건 이후 수석 장로였던 송길을 방주로 추대하고 정도련의 첩보를 담당하고 있었다.

- 무림맹 팔대 장로, 어젯밤에 마교 총단으로 비밀리에 출발. 길잡이 외에는 함께 움직이는 마교나 무림맹 인물 없음.

“팔대 장로를 마교 총단으로 급파하다니 맹주의 심산이 무엇일꼬?”

청풍 도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맹주가 남 교주와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팔대 장로를 특사로 파견하는 것이 아니겠소?”

현암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 어르신들은 출관하지 얼마 안 되어 맹의 일은 잘 모르실 텐데?”

허각 도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 군사의 의견은 어떤가 하는 눈빛이었다. 석추명이 생각해도 팔선(八仙)은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있어 두 집단 간의 중대사를 논의하기에 적당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임예린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맹주가 팔선을 제거하려고 백련신교와의 싸움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마교의 강시를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겠지요.”

임예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강시들과 싸운다면 아무리 팔선이라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 단적인 예가 소림 신승 아니던가?

“맹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지요. 남 교주의 강시들은 맹주에게도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겁니다. 남 교주가 언제 돌변하여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요. 따라서 이 기회에 팔선의 무공을 빌어 남 교주의 콧대를 좀 꺾어 두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강시들은 도검불침의 몸이거늘 어찌 처단한단 말이오?”

허각 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 팔선을 가장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명분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마교의 예봉을 꺾는 일이니까요. 아마 팔선도 흔쾌히 동의했을 겁니다.”

석추명은 독고양의 사제라던 매곡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화산파의 원로 고수들이 모두 죽어 나간 마당에 매곡자마저 이대로 허망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분들은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무림의 원로 고수들이시다.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석추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맹주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우리 측에서도 급히 화련산 신교 총단으로 고수를 파견하는 것이지요.”

임예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팔선은 자신들이 강시들과 맞서게 되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낮에는 강시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맹주는 분명히 밤에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거예요. 그래야 강시의 힘을 빌려 팔선을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임예린의 말을 듣고 있던 청풍 도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맹주 그 후레자식이 감히!”

청풍 도장의 격한 반응에 임예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서 팔선에게 어떻게 해야 강시를 소멸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팔선과 힘을 합쳐 강시를 없앨 수만 있다면 맹주의 뒤통수를 치는 동시에 남 교주의 계획을 꺾을 수 있죠. 아울러 팔선은 맹주의 참모습을 알게 되니 향후 맹주와의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게 아니겠어요?”

임예린의 말을 듣고 있던 허각 도장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절묘한 방법이야! 그렇게만 된다면야 맹주를 몰아내는 것도 금방이겠구먼.”

“다만 지난번 소림사 참사의 경우에서 봤듯이 강시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당도하여 밤에 싸우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행여 팔선이 먼저 도착하여 싸움이 시작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제 생각에는 우리 측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고수를 동원했으면 합니다.”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계신 분들 외에 개방의 송 방주와 팽가장의 팽 장주께서도 함께 하실 거야.”

“그분들도 함께하면 좋지만 더 강력한 우군이 한 분 계시지요.”

석추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바로 음양사자입니다.”

임예린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음양사자는 흑련교의 교주. 흑련교나 백련교나 정파의 입장에서는 모두 마교였다. 게다가 음양사자는 요혜신니의 흉수로 지목되지도 않았던가? 비록 귀면쌍살이 저지른 일로 밝혀지긴 했으나 정도련 수뇌부 일부는 여전히 음양사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음양사자의 손에 장문인을 잃은 허각 도장은 창백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당파를 공격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맹주지만 실제로 장문인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은 음양사자였다. 그러니 아무리 음양사자의 처지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음양사자와 손을 잡는 것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석추명도 허각 도장의 그런 심정을 알고 있었다. 허각 도장뿐만 아니라 정도련 수뇌부가 모두 음양사자에 적대적이라 음양사자의 도움을 받자는 임예린의 제안에 오히려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

“그렇게 하세나.”

석추명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허각 도장이 쉰 듯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석추명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추켜 뜨고 허각 도장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무림의 안위가 걸린 중대사이네. 장문인마저 잃은 마당에 료료 사숙마저 잃을 수는 없지. 그렇게 하세나. 나는 임 소저의 뜻에 따르겠네.”

허각 도장이 임예린의 제안에 찬성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허각 도장의 말이 맞았다. 음양사자가 각 문파와 척을 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모두 맹주의 명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음양사자가 싫어 손을 잡지 않는다면 죽었다 살아난 것만큼이나 반가운 팔선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흠흠, 나도 동의하네.”

현암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임예린의 제안에 동의했다.

“나도 동의하겠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계신 분들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음양사자와의 빚은 그다음에 한 번 생각해보겠네.”

청풍 도장도 동의했다. 그런 식으로 모두 동의하자 임예린이 석추명에게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추명 오라버니가 음양사자에게 이야기를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지금 즉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발이 빠른 분들은 먼저 가셔서 팔선이 밤에 강시와 맞닥뜨리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마.”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와의 일전을 앞둔 사람들은 소림사의 참상이 떠올라 두렵기도 했으나 20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문파의 최고 어른들을 곧 만나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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