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 광세일소_한추영 - 166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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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생사대전(生死大戰) (2)
깨진 석문 사이로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 방금 그거 비천검 아닌가? 이봐 매곡(梅谷), 혹시 자네 사형이 찾아온 게 아니야?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려고?”
“껄껄껄, 마룡 네놈은 폐관수련 한 20년 더 해야겠구나. 내 사형이 검동에 은거한 게 언젠데 고작 20년 못 봤다고 찾아오겠나?”
“하지만 방금 그 기운은 분명히 화산파의 신물인 비천검이었어. 자네 사형 말고 비천검을 쓸 사람이 또 있는가?”
“아마 사형이 드디어 뒤를 이을 제자를 찾았나 보지. 하지만 검에 깃든 내공은 소림 내공이니 그건 좀 이상하군.”
“흠, 어디 보자. 화산파 뿐만 아니라 아미파도 있구먼. 이건 분명히 아미 내공이야. 예전에 내가 요혜라는 소사매를 만난 적이 있는데 아 글쎄 키도 작은 아이가 성격이 어찌나 당찬지 내가 쩔쩔맸다니까. 그 아이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구먼.”
“어라? 중양 내공을 쓰는 놈도 있군. 요놈은 잡아다가 연구 좀 해야겠군. 우리가 폐관한 이유도 중양신공 때문이니. 한 20년 연구하면 우리도 중양신공에 버금가는 내공을 만들어내지 않겠나?”
“이 사람 욕심하고는. 20년 뒤라면 자네는 무덤 속에 있을 텐데 무슨 무공을 또 만들겠다고 그러나?”
“어허, 다들 조용히 좀 하시게. 끔찍한 사기(邪氣)를 내뿜는 마귀가 앞에 있거늘 그놈부터 제압해야 하지 않겠는가.”
“맞아. 이놈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구먼. 특이한 놈이야.”
“당장 나가서 이놈부터 박살을 내세나.”
한두 사람이 아닌 듯했다. 갑자기 깨진 석문에서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동시에 허공을 휘리릭 날아서 나왔다. 여덟 명이나 되는 노인들이 기다랗게 연결되어 허공을 나는 모습이 꼬리에 꼬리를 문 연을 연상시켰다.
노인들은 순식간에 설랑을 에워싸더니 좌장은 서로의 어깨에 댄 채 우장을 번쩍 들어 장력을 뿜었다.
쿠르릉 쾅.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강기(剛氣)의 폭풍우가 설랑의 몸을 때렸다. 공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기하진조차 넋을 잃을 정도로 강력한 장력이었다.
강시라도 통증은 있는 것인지, 기하진의 장력에는 꿈쩍하지 않던 설랑이 괴로운 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이 늙은이야, 자네 장력에 내 사질이 다칠 뻔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무슨 소리야? 내가 그것까지 다 생각하고 장력을 뿌렸거늘.”
노인들이 주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들처럼 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어험!”
남궁진악이 기침 소리를 내자 그제야 노인 중 한 사람이 남궁진악을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들아, 맹주께서 여기 계신 데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 참이냐?”
“맹주님이 계셔? 오, 맹주님, 그새 풍채가 더 늠름해지셨구려. 오랜만이오. 하하하.”
친근하게 말하는 노인들과 달리 남궁진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하진과 석추명은 이 노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으나 어수선한 지금이 바로 달아날 적기라고 판단했다.
석추명이 얼른 기하진에게 눈짓을 했다. 기하진이 석추명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추명이 주위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몸을 내빼는 순간, 노인 중 한 사람이 득달같이 석추명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놈아, 사숙을 보고도 그냥 갈 셈이냐? 고얀 놈이로고.”
“사숙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석추명이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이놈아, 네놈이 비천검을 가진 걸 보니 독고 사형의 제자가 분명한데 어찌 시치미를 딱 잡아떼는 게야.”
“독, 독고양 선배님이 사형되십니까?”
석추명은 독고양을 사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타나자 얼떨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기 이를 데가 없었다. 원로들이 모두 죽고 없는 지금, 독고양 선배의 사제가 나타난다면 의지할 곳 없는 화산파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게다가 화산파의 심법만 알 뿐, 무공은 모르는 자신과는 달리 화산파 재건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독고양 선배님이라니, 제자가 아니야?”
“글쎄, 그런가 봐.”
“그럼 어느 문파라는 소리야?”
석추명의 말에 노인들이 설랑은 제쳐 두고 모두 석추명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선배님들은 누구십니까?”
“하하하, 그것참 좋은 질문이구나.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무림팔선(武林八仙)이라고 하지.”
키가 작고 머리가 벗어진 데다 배가 볼록 나온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무림팔선이야? 무림맹팔선이지. 줄여서 맹팔선이라고 한다고.”
“맹팔선은 발음이 이상하잖아? 그냥 무림팔선으로 하자고.”
노인들이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다시 제대로 소개해 주마. 저기 키 크고 목청 좋은 분이 청성파의 청학 도장, 그 옆에 계신 분은 종남파의 수미 도장, 저기 삐쩍 마른 양반은 곤륜파의 태허 도장, 저 눈빛 사나운 사람은 공동파의 진뢰 도장, 그리고 이자는 네놈의 사숙일 가능성이 높은 화산파의 매곡 도장, 그리고 저기 점잖은 양반 두 분은 무당파의 료료(了了) 도장과 맹주의 숙부이신 남궁세가의 건곤검 남궁현, 남궁 검객이시지. 그리고 나는 에헴, 점창파의 마룡자라고 한단다. 복호일이 바로 내 제자야.”
마룡자가 마지막 말을 자랑스러운 듯이 덧붙였다.
“남궁현이 검객이라니 이 사람아, 우리가 팔선이니 검선이라고 해야 말이 되지.”
마룡자의 말에 화산파의 매곡자가 다시 참견하고 나섰다.
“점창파 복 장문인께서 도장의 제자시라구요?”
복호일이 누군지는 석추명도 아는 터라 깜짝 놀랐다. 복호일의 스승이라면 도대체 이들의 연배가 얼마나 높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화산파의 매곡자는 비천검 독고양의 사제라고 했는데 그 말은 돌아가신 화산파 장문인의 사숙이라는 말이었다. 모두 한참 윗세대의 기인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폐관수련 중이라는 무림맹의 팔대 장로가 분명했다.
“네가 복호일을 아는구나? 그놈이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을 텐데.”
석추명의 물음에 마룡자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물었다.
석추명이 난감해하며 막 대답하려는 찰나, 그때까지 뒤에서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던 설랑이 괴성을 터뜨리더니 팔선에게 덤벼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팔선의 장력에 얻어맞아 화가 난 터라 기세가 여간 흉포한 것이 아니었다.
“어이쿠, 이 마귀 놈이 실성했구나.”
“저놈 힘이 보통이 아니야. 한 대만 맞으면 그길로 바로 황천행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만든 혼원팔괘진을 한번 써 보세나.”
“이 무공을 언제 한번 써먹나 했더니 이렇게 나오자마자 쓰게 될 줄은 몰랐군. 하하하.”
노인들이 입으로는 제각기 떠들면서도 행동은 한 사람이 움직이듯 일사불란했다. 설랑의 좌우에 네 명씩 포진하더니 제일 앞에 선 사람이 쌍장을 들이밀었다. 역시 나머지 세 사람은 각기 자신의 장을 앞사람의 어깨에 대고 있었다. 혼원팔괘진이란 일종의 내공 전이법인 듯했다.
펑!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설랑의 몸이 10여 장이나 뒤로 밀리더니 회각동 마당 끝자락에 심어놓은 소나무에 부딪혔다. 설랑의 거구에 부딪힌 소나무가 대번에 우지끈하고 부러져 나갔다.
설랑은 화가 나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부러진 소나무를 양손에 들고 노인들을 향해 냅다 던졌다.
“어이쿠, 매곡자,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네 사람의 공력을 합치면 400년에 가까운데 저놈이 어떻게 그 장력을 맞고도 아직 살아있는 게야?”
마룡자가 투덜거렸다.
“이것 봐. 아무리 바빠도 계산은 바로 하자고. 우리 여덟 명이 모두 때린 셈이니 저놈이 맞은 장력이 거의 800년 공력이야. 그런데도 무사한 거라고.”
“그러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냐고. 저놈 몸이 동근철골이라도 12갑자가 넘는 장력을 맞고 무사한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그렇구먼. 그러니까 저놈이 마귀라는 것이지.”
끊임없이 떠들어도 네 명씩 열을 지은 노인들의 움직임은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여덟 명의 노인들은 네 명씩 열을 지었다가 다시 두 명씩 4개 조로 움직였다가 다시 길게 한 줄로 늘어서면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노인들의 무공을 지켜보던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여덟 명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심의상통(心意相通)의 경지가 원숙에 이른 것을 의미했다. 제아무리 소림 나한진, 화산 매화진이 유명하다고 해도 이처럼 물 흐르듯이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소림사 참사의 주인공인 설랑은 여덟 노인의 합공을 받아내지 못하고 또다시 뒤로 나뒹굴며 석벽에 머리를 찧었다.
노인들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다. 게다가 8명 중 7명이 맹주에게 당한 무림 7대 문파의 선배고수들이니 이들의 조력만 얻을 수 있다면 맹주와의 싸움에 크게 유리할 것만 같았다.
석추명은 노인들의 모습을 좀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맹주가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고 있어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만약 맹주의 명으로 이 노인들마저 자신들을 잡으려고 한다면 여기서 빠져나가기는 틀린 일이었다.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은 팔선과 설랑이 싸우는 사이 회각동 밖으로 급히 신형을 날렸다.
“선배님들, 저희는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오냐, 네놈이 보기보다 인사성은 바르구나.”
석추명의 말에 매곡자가 설랑과 싸우는 와중에도 대답했다.
“장로님들, 적은 그놈이 아니라 지금 도망치는 저놈들이오. 저놈들을 잡아요, 당장!”
다 잡았던 석추명 일행이 사라지려 하자 맹주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 맹주? 이놈이 아니라고? 이렇게 마기(魔氣)가 풀풀 풍기는데 이놈이 아니라는 소리요?”
“아 글쎄, 그놈이 아니라니까요!”
맹주가 역정을 냈다. 그 사이 이미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은 수십 여장 밖으로 달아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석추명의 웃음소리만 길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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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불 꺼진 맹주전에서 와장창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풀이라도 하는 듯 연거푸 서너 개가 바닥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설랑 그 멍청한 놈이 귀찮은 노인들을 깨웠어.”
맹주가 이처럼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맹주 앞에 부복한 사마경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물었다.
“팔대장로가 모두 출관했으니 앞으로 대사에 지장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어찌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다 처치해야지.”
맹주의 대답이 싸늘했다. 그런 답이 나오리라 짐작했건만 그래도 여전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팔선 중에는 맹주님의 숙부님도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눈치를 보는 사마경을 맹주가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군사,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말 모르는가?”
“대, 대의멸친 말입니까?”
“그래. 대업을 추진하다 보면 부득이 이런 경우도 생기지. 다행히 지금 가주를 비롯한 내 아우들이 모두 정도련에 붙잡혀 있는 판국이니 조용히 처리만 한다면 사숙이 밖으로 나왔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마경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얼른 머리를 숙였다. 맹주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은 알았으나 자신의 숙부조차 한 점 망설임 없이 없애려고 할지는 몰랐다.
“늙은이들이 창안한 무공기보만 따로 챙기고 조만간...! 알겠나? 군사가 좀 더 머리를 써봐.”
맹주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맹주님.”
문득 사마경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족조차 눈 하나 깜박하지 않으니 저 같은 것은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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