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9화 (169/201)

#   169 - 광세일소_한추영 - 1658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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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생사대전(生死大戰) (1)

기하진과 일봉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경계 무사들을 처치하는 사이, 석추명은 소리 없이 불 꺼진 방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잠이 든 지 오래인 듯 침상에는 사마경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석추명의 손이 벼락같이 사마경의 몸을 훑으며 대여섯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그러고는 임예린이 알려준 대로 사마경을 침상 아래에 숨기려고 이불을 홱 들쳤다.

‘...!’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석추명은 모골이 송연했다. 침상 위에서 자던 사람이 사마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마 또 속은 것인가?’

석추명은 불길한 생각에 황급히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빗방울이 후두둑 내리치는 마당 저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기하진과 일봉도 수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다.”

석추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문을 죽여놓고 그리 쉽게 갈 수 있으리라 여겼더냐?”

맹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주는 좌우에 군사 사마경, 왕취선, 남천단주 원무개를 대동하고 있었다.

맹주를 본 기하진이 코웃음을 쳤다.

“맹주, 당신이 애써 키운 개가 죽었으니 이제 알아들을 법도 한데 말이오?”

“으하하하, 건방진 놈.”

맹주가 껄껄 웃더니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개새끼를 키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호랑이 새끼였구나. 네놈이 석문을 죽일 줄이야. 그놈 하나 키우려고 들인 공이 얼마거늘....”

맹주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쩍거렸다.

“그런데 겁도 없이 다시 무림맹 총단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네놈들이 우리 사마 총군사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왔어도 나갈 때는 그렇게 안 될 것이다.”

“흥, 우리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지, 당신들이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기하진의 말에 맹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웃음을 멈추고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맹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따위 군사들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소이다.”

석추명이 검을 잡으며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하, 대주께서 오해하셨군요. 대주를 막을 자는 무림맹 군사들이 아니라 바로 이놈이올시다.”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석추명이 고개를 돌리니 놀랍게도 신교의 호교좌사, 철혈서생이 아닌가. 그 옆에는 피부와 머리털이 새하얀 거인이 자신들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좌사, 당신이 어찌...?”

석추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기하진이 새하얀 거인 앞으로 다가갔다.

“설랑, 네놈이 겁도 없이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구나.”

설랑이라는 말에 석추명은 이 거인이 임예린을 납치했다는 그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한 번 싸워본 적이 있다고 하더니 기하진은 설랑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기하진을 바라본 설랑이 씩씩대며 콧김을 내뿜었다.

“더러운 음적 놈아, 오늘 네놈을 아주 요절내주마.”

기하진이 설랑의 목을 움켜쥐려고 불쑥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설랑도 울퉁불퉁 근육투성이 팔을 바람같이 내뻗었다.

하지만 그때 석추명의 머릿속에 소림 신승의 비참한 모습과 함께 강시의 두목이 설랑이라고 했던 공각대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하진이 무엇인가를 착각하는지는 몰라도 설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조심해.”

석추명이 소리치는 순간, 설랑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려는 기하진의 팔을 틀어잡았다.

기하진은 설랑의 무공이 자신보다 훨씬 아래인 것을 아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자신의 팔이 붙잡히자 깜짝 놀란 듯했다.

펑! 기하진의 왼손이 장력을 내뿜었다. 이렇게 지척에서 중양신공 8성 공력에 가슴을 맞았으니 설랑의 호신 무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내장이 산산조각이 나서 피를 토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설랑은 기하진의 장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반대쪽 팔을 뻗어 장력을 내뿜는 기하진의 왼쪽 팔마저 붙잡아 버렸다.

그런 다음, 설랑은 기하진을 공중으로 발라당 들어 올려 두 팔을 금방이라도 찢을 듯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으윽!”

기하진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으나 두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 설랑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이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순식간에 양쪽 팔이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석추명의 머릿속에 온몸이 찢겨나갔던 소림 승려들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돼!”

석추명이 대경실색하여 즉시 비천검을 집어 던졌다.

쐐액, 소리와 함께 비천검이 설랑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석추명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만큼 어떤 고수라도 피하기 힘든 속도였다. 설랑은 검이 날아오자 목을 슬쩍 숙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목을 상당히 베고 말았다.

‘됐다.’

비천검이 설랑의 목을 베고 지나가자 석추명은 속으로 반색했다. 목은 피부가 약한 데다 주요 혈관이 모여 있어 조금만 베여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분명히 검날이 목을 파고들며 지나갔건만 설랑의 목에서는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아무런 통증도 없는지 인상 한번 찡그리지도 않았다.

석추명은 그제야 설랑이 강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조금 베는 정도로 안 된다면 잘라내는 수밖에.

석추명이 황급히 손을 휘두르자 비천검이 공중에서 한 바퀴 선회하더니 이번에는 설랑의 어깨를 곧장 찔러 들어갔다. 이전에는 어검술을 쓰더라도 3초 이상 쓰기 어려웠으나 신승에게 공력을 받고 나서는 어검술을 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푹.

비천검이 설랑의 어깨에 수직으로 박혀 들어갔다. 그제야 설랑은 귀찮은 듯, 기하진의 팔 하나를 놓고 어깨의 검을 뽑아냈다. 마치 손바닥에 박힌 조그마한 가시를 뽑아내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놈, 하진이를 내려놓아라.”

마음이 급한 석추명이 맨손으로 설랑에게 달려들어 두 팔로 목을 졸랐다. 설랑이 숨이 막히는 듯 컥컥거리더니 기하진을 내려놓고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석추명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기하진 대신 석추명이 위험에 빠진 것이다. 기하진은 오른손으로 찢어질 뻔한 왼쪽 어깨를 어루만지며 설랑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불과 몇 달 만에 설랑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설랑이 씩씩거리며 석추명의 목을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뽑을 듯이 힘을 주었다. 석추명이 위험에 빠지자 일봉과 기하진이 동시에 나서며 설랑을 공격했다.

일봉의 보문검이 설랑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살갗이 쩍 벌어졌다가 기이하게 저절로 봉합되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일봉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상처가 어떻게 저절로 치유된단 말인가. 저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일봉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검으로 베도 죽지 않는다면 저놈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설랑이 일봉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충혈된 설랑의 두 눈이 기이하게 희번덕거렸다.

“너, 죽인다. 너, 내 각시, 훔쳐간 놈이다.”

설랑이 어린아이처럼 서투르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의 내용으로 보건대 일봉을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도 장법으로는 설랑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검을 뽑아 공격했다. 그러나 검에 베이더라도 통증을 느끼지 않고 저절로 상처가 치유되니 달리 타격을 줄 방도가 없었다.

기하진과 일봉은 석추명을 구하려고 순식간에 이삼십여 초의 검초를 뿌렸지만 설랑은 요지부동이었다. 살갗을 베도 소용없다면 뼈를 잘라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공력을 높여도 뼈를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그제야 기하진과 일봉은 3,000명에 달하는 소림사 승려들이 어떻게 단 열 구의 강시에게 당할 수 있었는지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시를 없앨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설랑이 석추명을 붙잡은 손 하나를 풀더니 일봉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설랑의 손에 결국 일봉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세 명 모두 당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설랑 뒤에는 맹주와 무림맹 군사 수백 명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달아나!”

석추명이 기하진과 일봉에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돼!”

“절대 안 됩니다.”

기하진과 일봉이 석추명의 말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맞받아쳤다.

“여기서 셋 다 개죽음할 셈이야? 달아나서 예린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 그래야 대책을 세울 거 아니야. 어서 가!”

석추명이 설랑에게 붙잡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석추명을 바라보는 일봉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형님, 난 상관하지 말고 어서 달아나요. 알아서 빠져나갈 테니.”

기하진이 입술을 꽉 깨물고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석추명의 말이 맞았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셋 다 죽을 수는 없다.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할 수 있다면 사상자 수를 최소한으로 해야겠지.

기하진이 일봉을 부축하며 눈짓을 했다.

하지만 기하진과 일봉이 달아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설랑이 눈치채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이 일봉을 부축한 채 황급히 경공을 전개했다.

“후후후, 이거 정말 재밌구먼.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야. 이놈들,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한번 볼까?”

맹주 남궁진악이 입가에 미소 지었다.

“뭣들 하느냐. 저놈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막아라.”

맹주의 명에 암영단과 남천단 군사들이 즉시 무림맹 내의 길목을 막았다. 그 바람에 기하진과 일봉은 무림맹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하진과 일봉의 경공도 놀랍지만 석추명을 붙잡고 두 사람을 쫓아오는 설랑의 발걸음도 빠르기 그지없었다.

쿵. 쿵. 쿵. 쿵.

설랑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빗물에 젖은 땅바닥이 깊숙이 패며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려왔을까. 기하진이 문득 앞을 바라보니 ‘회각동(回脚洞)’이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기하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각동이라면 맹주도 들어갈 수 없다는 무림맹 내 금지구역이 아닌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나 회각동 앞에 이르는 사람은 반드시 이름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따로 경계를 서는 병사들도 없지만, 아무도 회각동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이 근처로 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기하진도 맹에 있던 10년 동안 한 번도 회각동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기이하게도 회각동은 마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장소처럼 이곳을 언급하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설랑에게 쫓겨 회각동에 들어선 것이다.

회각동은 커다란 동굴로 입구는 석문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고 양옆은 제법 가파른 절벽이었다. 동굴 앞에는 수십 명이 운집할 수 있는 제법 너른 공간이 있었고 그 둘레를 굵은 소나무가 에워싸듯 서 있었다.

설랑이 회각동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맹주가 당황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설랑을 뒤따라 온 철혈서생이 딸랑거리는 방울을 울리며 멈추라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러자 설랑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섰다. 그러나 분기가 치미는 듯 한쪽 팔로 바로 옆의 소나무를 뽑아 들더니 기하진과 일봉을 향해 그대로 내던졌다.

콰당.

육중한 소나무 기둥이 회각동 석문에 부딪히면서 석문 하나가 깨졌다.

“너, 죽인다. 반드시.”

설랑이 일봉을 향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늑대 같은 설랑의 모습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기하진은 막다른 길에 도달한 것 같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제 남은 방법은 회각동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설랑에게 붙잡힌 석추명을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뭘 망설여? 빨리 동굴 속으로 도망쳐. 이놈은 내가 붙잡을 테니.”

석추명이 다시 기하진에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설랑에게 붙잡히지 않은 한쪽 팔에 공력을 모으고 어검술을 펼쳤다. 어딘가에서 비천검이 쏜살같이 날아와 다시 설랑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비천검이 자신을 공격해오자 설랑이 위로 솟구치며 비천검을 잡으려고 손을 쫙 벌렸다. 검날에 베는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때 동굴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악한 마기(魔氣)가 진동하는 걸 보니 마교 놈이 분명하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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