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 광세일소_한추영 - 1657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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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생사지로(生死之路) (10)
삽시간에 싸움은 혼전 양상을 띠었다. 석추명의 어검술에 당하지 않으려고 무림맹 군사들이 허겁지겁 제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또다시 등 뒤를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어검술로 부리는 검의 숫자도 늘었다. 처음에는 10여 자루였는데 어느새 그 수가 30여 자루까지 늘었다. 30여 자루의 검이 허공에 일직선으로 나란히 섰다가 한 바퀴 선회하면서 군사들을 노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 광경에 군사들은 모두 넋이 빠졌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야.”
무림맹 군사들 중 누군가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군사들은 이제 석추명과 맞서 싸우기보다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게다가 앞에서는 기하진과 일봉이 천신이 강림한 듯 장력을 떨치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두둑. 두두둑.
어디선가 땅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고 최소 수십 마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병들의 진군 소리. 금위군이 분명했다.
금위군이 출병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만약 무림맹이 황제 폐하가 가까이 계시는 이곳까지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강호 일통(一統)은 고사하고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몰랐다. 따라서 금위군이 도착하기 전에 흔적을 지워야 했다.
“흔적을 지워라.”
귀면쌍살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명을 내렸다. 다 잡은 물고기를 석추명 때문에 놓치게 되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여유가 넘치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귀면쌍살의 명에 무림맹 군사들이 주변을 정리하며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군사들 속에서 귀면쌍살은 가만히 서서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 눈빛을 띤 채.
금위군의 출현은 정도련에게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여기서 존재가 발각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계속 군부와 관부의 주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맹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석추명은 무림맹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그물에 걸렸던 비천검을 회수했다.
금위군의 말발굽 소리가 이제 지척에서 들렸다.
“우리도 빨리 가야 해요.”
임예린이 귀면쌍살을 노려보는 기하진과 석추명을 재촉했다.
일봉이 임예린을 데리고 경공을 발휘했다. 석추명은 귀면쌍살에게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라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하진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귀면쌍살을 노려보았다.
“먼저들 가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기하진이 오히려 귀면쌍살 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진아!”
석추명이 놀라서 기하진을 불렀다. 하지만 기하진은 이미 귀면쌍살에게 달려들며 천룡파천장(千龍破天掌)을 내지르고 있었다.
귀면쌍살은 기하진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쌍장을 내밀었다.
쾅!
두 고수의 장력이 중간에서 부딪히며 극심한 기파(氣波)가 발생하자 주위의 무림맹 군사들이 나뒹굴었다.
“오늘은 반드시 네놈의 목을 따 주마.”
한발 물러선 기하진이 검을 꺼내어 들고 천마검법을 펼쳤다. 검에 공력을 주입하자 용암이 흐르듯 검신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았다.
귀면쌍살 석문은 기하진의 천마검을 감히 맨손으로 받을 수 없어서 역시 검을 꺼냈다. 공교롭게도 귀면쌍살이 펼치는 검법은 창궁무애검법이었다. 사실, 석문은 중양신공을 익히기 전인 암영단주 시절, 이미 맹주에게 무공을 전수받았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말하자면 사형제지간인 셈이었다.
귀면쌍살이 검을 부채살처럼 펼치며 수십 가닥의 검기를 쏟아냈다.
“흥!”
기하진이 콧방귀를 뀌며 검을 쳐올렸다. 콰르릉. 검과 검이 부딪히는데 천둥소리가 났다. 두 개의 검에 내재한 검기가 서로 충돌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귀면쌍살이 만들어내는 검기와 기하진의 화염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세찬 기류가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쳐서 기하진과 귀면쌍살의 주위 반경 3장 이내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 끝장을 보자꾸나. 애송이 사제야.”
귀면쌍살이 기하진을 비웃으며 검을 수직으로 쳐올렸다.
“누가 네놈의 사제라는 것이냐?”
“너와 내가 다 함께 맹주님께 무공을 배웠으니 우리가 사형제지간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우리 세 사람은 닮은 점도 참 많아. 맹주님의 눈이 정확하신 게지. 으하하하.”
귀면쌍살이 광소를 터뜨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숫가를 따라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금위군의 모습이 조그맣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너와 나는 둘 다 중양신공을 익혔으니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
“개소리 집어치워라.”
기하진의 검이 수평으로 큰 원을 그렸다. 검에서 일어난 화염이 귀면쌍살의 얼굴을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백무결이 죽은 날부터 네놈은 내 손에 죽은 목숨이었어. 백무결을 만나면 어떻게 사죄할지 지금부터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기하진이 내력을 더욱 끌어올려 손에 쥔 검에 쏟아부었다. 기하진의 검이 명검이기는 하나 천마신검의 화염 공격을 계속하면서 귀면쌍살의 막강한 검기를 막아내다 보니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검이 부러진다면 귀면쌍살과의 대결이 또다시 무승부로 끝날 게 뻔했다.
‘이번에도 이놈을 놓아주어야 한단 말인가.’
기하진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귀면쌍살의 명이 질긴지 그동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번번이 놓쳤다. 오늘은 절대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작정했건만 이번에는 자신의 검이 문제였다.
귀면쌍살과 기하진의 모습을 발견한 금위군 대장이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소리쳤다.
“멈춰라.”
그 뒤를 따라 석궁을 든 수십 기의 기마병이 달려왔다. 기마병의 뒤에서 달려오는 보병들 중에는 총포를 등에 멘 병사들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저들이 오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 했다. 무림맹 군사들은 시신과 함께 이미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귀면쌍살은 기하진의 검이 더는 버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검이 부러진다면 이 녀석도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는 못하리라.
“사제, 다시 한번 받아보시게나. 으하하하.”
귀면쌍살이 창궁무애검의 최강수 건곤반연(乾坤反衍)을 펼쳤다. 무지막지한 검기가 기하진의 검에 부딪혀왔다.
치지직. 챙강.
기하진의 검이 가뭄에 논 갈라지듯 쫙 갈라지더니 그대로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귀면쌍살의 검은 그대로 기하진을 베어왔다.
“하진아, 이것을 쓰도록 해.”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석추명이 자신의 비천검을 기하진에게 던졌다.
기하진이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석추명이 던져 준 비천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화살처럼 쏘아져 앞으로 날아가며 모든 공력을 모아 검을 떨쳐냈다.
염왕강림(炎王降臨).
천마신검 제8단계 가운데 최강의 초식이었다. 검기가 닿는 곳마다 뜨거운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귀면쌍살 석문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에도 불이 붙었다.
스걱.
기하진의 검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귀면쌍살의 두 팔을 베었다. 검을 쥔 귀면쌍살의 두 손이 팔꿈치에서 베인 채 땅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으윽.”
귀면쌍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다시 솟구쳤다. 귀면쌍살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나뉘며 갈라졌다. 하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검에 베이는 순간 화염에 살갗이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는 누린내가 진동했다.
그동안 숱한 악명을 떨치며 온 무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희대의 살인마, 귀면쌍살이 드디어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귀면쌍살도 두려움을 느꼈던지 부릅뜬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렇게 백무결의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니 기하진은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허전했다. 귀면쌍살의 시신 위로 끔찍한 모습으로 되돌아 왔던 백무결의 모습이 겹쳤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제 몸이 탈 줄 알고도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죽을 줄 알고도 귀면쌍살에게 달려들었을 천옥랑의 얼굴도 떠올랐다. 문득 가슴이 시큰했다.
이제 시작이다. 기다려라, 남궁진악.
기하진이 눈을 부릅떴다.
“활을 쏘아라.”
금위군 대장의 명과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이 기하진을 향해 날아왔다.
“하진아, 빨리 이쪽으로.”
석추명의 다급한 소리에 귀면쌍살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검을 휘둘러 막아내며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이놈들, 게 서지 못할까.”
금위군 대장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기하진이 있던 곳에 수십 발의 화살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기하진과 석추명은 그런 금위군 대장을 비웃듯 순식간에 10여 장 밖으로 달아나더니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오르며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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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외곽 무림맹 총단.
차가운 겨울비가 무림맹 총단의 지붕을 세차게 때렸다. 세찬 비바람 때문에 전각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림맹의 정문과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설치된 초소에서 경계를 서던 군사들이 추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총단 외곽을 순시하는 군사들이 황궁의 담장만큼이나 높은 무림맹 담벼락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검은 그림자 셋이 소리 없이 담장을 넘어갔다.
세 사람은 석추명, 기하진, 일봉이었다.
- 사마경이 잔꾀를 써서 우리를 골탕 먹였으니 받은 대로 갚아주어야지요. 지금쯤이면 맹주도 우리가 곤명호 지하 뇌옥을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겁니다. 이 일로 사마경은 다시 맹주의 신임을 잃었을 거예요. 가뜩이나 사마경을 의심하고 있는 맹주는 조금만 더 자극을 받으면 사마경을 반드시 내치려 할 거예요. 이번에 잠입하면 사마경을 잡아다가 숨겨 놓으시고 이 서찰을 사마경의 방에 두세요. 사마경은 이미 감시당하고 있을 테니 없어진 사실을 알면 맹주의 수하들이 반드시 방을 수색하러 올 겁니다. 그때 이 서찰이 눈에 띄면 맹주는 틀림없이 사마경이 배신했다 생각하고 잡아 죽이려고 할 겁니다.
- 그렇게 복잡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사마경을 잡아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일봉이 임예린에게 말했다.
- 사마경은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그리고 맹주를 치기 전에 먼저 강시를 소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마경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사마경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죠.
- 하지만 그 늙은이를 어떻게 믿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단 말이냐?
석추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 우리가 사마경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사마경이 맹주와 맞서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죠.
- 네 말은 맹주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면 사마경이 자연히 우리에게 협조할 것이라는 말이냐?
기하진의 물음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마경도 맹주를 완전히 믿지 못할 테니 그렇게 되겠죠. 저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세 분께 방해만 될 뿐이니 운진 도장, 현암 도장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번에 들어가시면 맹주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 그렇게 하마.
- 그리고 하진 오라버니, 혹시 맹주가 따로 숨겨 놓은 고수들이 있을까요? 음양사자는 떠났고 귀면쌍살은 죽은 데다 공각대사와 허각 도장 등 무림 명숙들은 이미 맹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맹주의 수하들 가운데 오라버니들을 능가할 사람은 없는 듯한데 만약 또 다른 고수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요.
- 글쎄다. 나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구나. 다만 내가 무림맹에 들어오기 전부터 폐관수련을 하는 장로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이 말했다.
- 그 장로들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무림맹에서 중양일지를 잃어버린 이후 그에 버금가는 무공을 만들어 신교를 상대하기 위해서 장로 여덟 명이 무기한 폐관수련에 들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로군.
- 그런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어쩌면 뜬소문일 수도 있습니다.
- 그렇구나.
무림맹의 지리를 잘 아는 기하진이 앞장서고 석추명과 일봉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마침 겨울비가 내리고 바람마저 거세어 몰래 잠입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게다가 세 사람의 신법이 얼마나 귀신 같은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잔가지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사마경의 처소입니다. 방문 앞에 네 명, 그리고 처마 밑과 지붕 위 등 보이지 않는 곳에 여섯 명이 숨어 있습니다.
기하진이 두 사람에게 전음으로 속삭였다.
- 보이는 사람 네 명은 일봉 소협이, 처마 밑과 지붕 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추명 형님은 사마경을 제압해 주세요.
- 그렇게 하자꾸나.
기하진과 일봉이 각자 맡은 상대를 향해 유령처럼 움직였다. 빗소리가 두 사람의 자취를 지워 경계 무사들이 누군가 다가왔다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단도에 목이 그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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