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 광세일소_한추영 - 165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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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생사지로(生死之路) (9)
“박쥐 놈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뇌옥 철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중얼거렸다. 혼잣말인 듯했으나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구불구불한 뇌옥 통로의 제일 안쪽에서도 들렸다.
“귀면쌍살!”
석추명이 놀라며 숨을 죽였다. 아직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아 무공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마주치면 큰일이었다.
“제가 가서 붙잡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나가십시오.”
천옥랑이 뇌옥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것.”
천옥랑이 기하진을 감금한 방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어서 나가십시오.”
천옥랑이 성큼 걸음을 내딛자 임예린이 천옥랑을 붙잡았다.
“천 공자.... 조심하세요.”
천옥랑을 바라보는 임예린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천옥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임 소저. 그리고... 예전에 저와 제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 모두 사죄드립니다. 부디, 조심히 나가십시오.”
천옥랑이 신법을 전개하여 귀면쌍살 앞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귀면쌍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박쥐 새끼는 너였군. 이래서 애당초에 네 아비와 함께 보내어 버리자고 했던 건데.”
말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뇌옥 안을 가득 채웠다.
“빨리 움직이자꾸나.”
석추명이 황급히 기하진을 풀어주는 사이, 일봉은 임예린과 함께 뇌옥 뒷문을 열었다. 축축하고 좁은 흙길이 구불구불 위로 나 있었다.
임예린은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천옥랑이 청성파의 수재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귀면쌍살의 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니.
희미하게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 하고 뇌옥의 석벽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일봉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옮기는 임예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혹시 저 소리가 천옥랑이 쓰러지는 소리가 아닐까?
천옥랑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기는 했으나 천옥랑의 마음이 진심인 것은 임예린도 잘 알았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세 남자 모두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천옥랑만큼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석추명은 늘 큰 오라버니로 자처하며 임예린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려고만 했다. 기하진은 임예린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따뜻한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일봉은 자신의 호위무사로 스스로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천옥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드러내놓고 애정 공세를 펼치고 귀찮을 만큼 자신을 쫓아다녔다. 싫은 내색을 했음에도 천옥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맹주가 자신의 부친을 압박하고 자신을 납치했을 때도 미안해할망정, 자신에 대한 애정은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천옥랑은 자신을 좋아해 준 네 사람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만약 석추명이나 기하진, 또는 일봉이 천옥랑만큼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더라면 자신도 상당히 흔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생각인 듯 임예린이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맑은 공기가 들어오더니 어느새 지상에 당도했다.
네 사람 모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을 헉헉거렸다. 방금 올라온 곳 뒤로 석양에 물든 곤명호가 넓게 펼쳐졌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수면을 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무림맹 군사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석추명이 소리쳤다. 어느새 100여 명에 달하는 무림맹 군사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채 다가오고 있었다. 군사들의 복장으로 보니 남천단원들이었다.
무공을 쓸 수만 있다면 자신들 세 명이 100명이 아니라 200명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 기운이 다 사라지지 않아 아직 공력을 쓸 수 없었다.
“일단 초식으로 상대하자. 남천단쯤이야 공력을 안 써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
석추명이 제일 먼저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갔다. 비천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석추명이 사용한 검법은 숭양일기검. 과연 초식이 워낙 절묘한지라 공력이 없는 검이지만 제대로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일봉도 보문검을 들고 아미복마검을 펼쳤다. 늘 공력을 운용하여 무겁게 검을 펼치다가 공력이 수반되지 않으니 중검(重劍)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쾌검으로 펼쳐야지.’
일봉의 예상은 적중했다. 쾌검의 종류도 다양하여 검이 빨라질수록 공력의 운용이 필요하나 남천단원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 초식만으로 충분했다.
기하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장기인 장법을 쓸 수 없으니 내키지 않았으나 맹주에게 전수받은 창궁무애검을 펼쳤다.
순식간에 세 사람 주위에 대여섯 명이 검에 맞아 나뒹굴었다. 하지만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싸울수록 세 사람 모두 힘이 빠졌다. 이제 불과 20여 명을 해치웠을 뿐, 아직도 80여 명이 더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귀면쌍살이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갑자기 서북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100여 명의 남천단원이 더 몰려왔다. 이곳 곤명호 근처는 황궁과 가까워 이렇게 많은 수의 사병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림맹이 무슨 수로 금위군의 눈을 피했는지 지금 200명에 가까운 무림맹 군사들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귀면쌍살이 나타나기도 전에 남천단 군사들의 검에 맞아 죽을 지경이었다.
‘공력이 회복될 때가 되었는데.’
석추명은 검을 휘두르면서 계속 단전을 자극했다. 약 기운이 제법 가셨는지 단전에서 한 가닥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있다면 좌정하여 운기행공으로 소주천을 한 바퀴만 돌리면 공력이 회복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림맹 군사들이 물밀 듯 밀려오는 데 어느 틈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운기행공을 하겠는가.
초조한 마음으로 휘두르던 비천검에서 갑자기 ‘파바밧’ 하고 시퍼런 검기가 감돌았다.
“됐다!”
공력이 돌아온 것이다. 싸우느라 몸을 자꾸 움직여서인지 미미하게 피어오르던 기운이 둑 터진 강물처럼 갑자기 전신에 흘러넘쳤다.
석추명이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리더니 10여 척 상공에서 검기를 뿌렸다.
“어천비락(御天飛落)!”
비천검이 허공을 가르자 푸른 검기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열댓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석추명에 이어 일봉과 기하진도 드디어 공력을 되찾았다.
“요놈들, 살고 싶으면 썩 물러서라!”
기하진이 노성을 지르며 쌍장을 춤추듯 휘둘렀다. 장이 뻗치는 곳마다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폭발음과 함께 서너 명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일봉의 보문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적의 병기가 부러져 나가며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이대로 간다면 적을 휩쓸어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모두 10보 뒤로 후퇴하라.”
쇠를 긁는 거북한 목소리가 무림맹 군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과연 듣던 대로 세 분 모두 대단하시군.”
무림맹 군사들이 갑자기 물결 갈라지듯 양편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귀면쌍살이 나타났다.
귀면쌍살을 보자 임예린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천 공자는 어떻게 되었죠?”
“흐흐흐,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귀면쌍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예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 설마 죽인 것은 아니겠죠? 같은 무림맹 소속이니 설마, 죽이지는 않았겠죠?”
임예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임 소저가 그렇게 천옥랑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몰랐군. 곧 만나게 해줄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으하하하.”
귀면쌍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귀면쌍살의 웃음소리를 뚫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하진이었다.
자신이 중양신공을 이룬 이후로 공력의 수위로는 오히려 귀면쌍살 석문을 압도했다.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는 석추명과 일봉까지 있으니 석문이 다시 음양사자를 데려온다 하더라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석문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새 잊었나 보군. 네놈들이 어떻게 우리 손에 붙잡혔는지.”
그러더니 주위에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금강망(金剛網)을 대령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젯밤 자신들을 꼼짝 못 하게 했던 그물이 다시 등장했다. 기이한 금속성 광채를 내뿜는 금강망은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붙잡고 있었으며, 5개 조 20명이 석추명과 기하진 일행을 빙 둘러쌌다.
그물을 바라보던 기하진의 안색이 변했다. 저 그물은 비천검과 같은 보검으로도 잘리지 않았고 한번 그물에 감기면 제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수중에 암기라도 있으면 그물을 들고 있는 군사들을 맞추어 쓰러뜨릴 텐데 지금 네 사람 모두 암기로 쓸만한 물건은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물을 든 사람들이 조금씩 다가왔다. 4명이 한 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잘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기하진이 미간을 좁혔다. 장력을 쓰기에는 아직 거리가 꽤 있었다. 그리고 섣불리 장력을 쓸 수도 없었다. 자신이 펼친 장력을 귀면쌍살이 막아내는 사이, 그물이 날아오면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격공탄지법(隔空彈指法)을 한번 써 볼까?
기하진이 그물을 붙잡은 군사 한 명을 겨냥하여 빈 손가락을 튕겼다.
무형의 기운이 응축되어 짧은 화살처럼 날아갔다. 성공할 것인가?
탱.
뜻밖에 격공탄지로 내쏜 기운이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 기하진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본 귀면쌍살이 기의 구체가 닿을 곳을 향해 손을 떨쳐 기막(氣幕)을 형성했던 것이다. 어차피 두 사람의 내공은 종류와 수준이 비슷하여 한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다.
그물을 든 사람들이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들을 구해준 천옥랑의 희생도 헛될 것만 같았다.
보다 못한 석추명이 정신감응(情神感應)으로 공력을 비천검에 집중한 다음 검을 발출했다. 어검술을 펼친 것이다. 비천검이 석추명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휘리릭. 비천검이 검광을 뿌리더니 벌써 한 사람을 베고 공중에서 저절로 빙그르르 선회했다. 검이 저절로 날아올지 몰랐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됐구나 싶어 석추명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 순간, 그물 하나가 비천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
그 광경에 깜짝 놀란 석추명이 재빨리 검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비천검은 그물에 걸려든 뒤였다.
“천하의 비천검도 금강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구나. 어디 더 부릴 재간이 있으면 부려 보거라. 으하하하.”
금강망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은 임예린을 등 뒤에 둔 채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을 뺏긴 석추명은 당황스러웠다. 이를 어쩐다? 기하진의 장력으로도, 일봉의 중검으로도 그물을 뚫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제 무기마저 없지 않은가.
그때 문득 금강망 뒤에 서 있는 무림맹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앞 열의 군사들 외에는 모두 검을 등 뒤 검집에 꽂아 넣은 채 도열해 있었다.
저 검을 쓸 수만 있다면!
석추명의 눈에서 빛이 났다. 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어검술은 검과 자신의 정신 연결이 핵심이 아니던가. 비천검이 자신의 정신에 가장 잘 감응하기는 하지만 다른 검이라고 해서 안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석추명이 재빨리 검 하나를 바라보고 정신을 모았다. 잠시 후, 석추명의 손짓에 따라 무림맹 군사의 검이 덜커덩 움직이더니 검집에서 빠져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
‘됐다!’
허공으로 솟구친 검이 저절로 날아가 금강망을 쥐고 있는 군사 하나의 등을 공격했다.
“으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등 뒤에서 검이 날아오자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다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귀면쌍살 석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하니 이것도 석추명 저놈이 한 짓이란 말인가.
석추명은 문득 검 하나를 조종할 수 있다면 두 개, 세 개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 가지 법이 하나와 다르지 않다던 소림 신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검술이라는 것이 어차피 직접 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감응을 통해 하는 것이니만큼 개수에 제한이 있겠나 싶었다.
석추명이 저 멀리 무림맹 군사들의 등 뒤에 꽂힌 검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한 다음 두 손을 휘둘렀다.
챙. 챙. 챙. 챙.
돌연 무림맹 군사들의 등 뒤에 얌전하게 꽂혀 있던 검이 허공으로 하나씩 튕겨 올라가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가득한 석추명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하나, 둘, 셋.... 총 10여 개의 검이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석추명의 손짓과 함께 쏜살같이 날아갔다. 너무나도 기이한 광경에 무림맹 군사들 중 누구도 이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으악.”
다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기하진의 손바닥이 다시 불을 뿜었다. 펑, 펑, 소리가 나며 군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물이 허물어진 곳으로 일봉이 보문검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챙. 챙. 챙. 챙.
다시 무림맹 군사들의 검 10여 개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10여 개의 검이 허공에서 동시에 빙그르르 돌며 수평으로 눕더니 검끝을 앞으로 하고 그물을 든 나머지 군사들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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