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6화 (166/201)

#   166 - 광세일소_한추영 - 165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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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생사지로(生死之路) (8)

물 위로 코를 내밀고 다가오던 악어 떼는 사람의 조련을 받은 듯 일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임예린을 제외한 세 사람은 당대 최고의 무공 고수였으나 수백 마리의 악어 떼에 둘러싸이자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다 하다 이제는 별짓을 다 하는군.”

기하진이 악어 떼를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밟을 게 없었는데 잘됐네. 저놈들을 밟고 갑시다.”

기하진이 물속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기하진 주위의 물줄기가 소용돌이치더니 10여 척 높이의 용오름이 생겼다. 허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기하진이 악어 떼를 향해 좌우 손바닥을 번갈아 내밀었다.

펑. 펑. 펑.

기하진이 장을 내미는 곳마다 포탄이 떨어진 듯 허연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기하진의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악어들이 허옇게 배를 까 뒤집었다. 그러나 뜻밖에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기하진이 허공으로 솟구치기 무섭게 악어들이 물속 깊숙이 몸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방법은 모르겠으나 누군가 악어 떼를 조종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악어 새끼들이 이렇게 영특할 줄이야.”

기하진이 다시 물속으로 떨어지며 내뱉었다.

“기 소협, 저기를 보십시오. 배들이 몰려옵니다.”

일봉이 악어 떼 뒤편을 가리켰다. 기하진 일행이 있는 곳에서 약 30여 장 밖에 조각배치고는 제법 큰 배 10여 척이 등불도 없이 네 사람을 에워싸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 대장선으로 보이는 배의 갑판에 어떤 노인이 서서 악어 떼를 바라보며 짧은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 피리로 악어 떼를 조종하는 듯한데 이상하게도 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악어에게만 들리는 소리인가 싶었다.

“배가 다가오니 저 배를 뺏으면 되겠군. 예린아, 괜찮으냐?”

석추명이 한 손으로 얼굴에 묻은 물을 닦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저야 한겨울에도 가끔 수영을 하는 편이라 물에 빠졌다고 두렵지는 않아요. 다만 악어 떼가 문제지요.”

“그거 다행이군.”

기하진이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덧붙였다.

“배가 멈추었습니다.”

“이거 기분이 영 좋지 않군요. 그런데 악어 새끼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기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악어가 모두 물밑으로 사라졌어.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석추명이 제자리에서 손발을 놀리며 말했다.

“제가 가서 저놈들 배를 뺏어오겠습니다.”

일봉이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일봉 형님, 같이 가시죠.”

석추명이 일봉의 뒤를 곧 따라나섰다.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배까지는 경공을 극상승으로 펼친다 해도 한 번에 날아갈 수 없는 거리였다.

“악어를 좀 타볼까 했더니 코빼기도 안 보이는군. 어? 이렇게 고마울 때가.”

갑자기 석추명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배를 뺏으러 가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배가 석추명과 일봉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배가 제법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악어 떼가 다시 나타나 흉포한 기세로 석추명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하진이 접근하는 악어들을 향해 두 손을 떨쳐냈다.

펑. 펑. 펑.

순식간에 물보라가 일더니 악어 서너 마리가 다시 배를 까뒤집고 죽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악어들이 순식간에 죽은 악어를 잡아먹으러 달라붙기 시작했다.

“악어는 내버려 두고 배부터 뺏어요.”

기하진이 임예린을 보호하며 석추명과 일봉에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일봉이 먼저 몸을 날렸다. 일봉은 죽은 악어를 잡아먹으려고 몰려든 악어 떼의 등을 밟으며 물찬 제비처럼 곧장 대장선을 향해 날아갔다. 쾌속하기 그지없는 신법이었다.

“좋구나.”

석추명이 소리쳤다. 그때 휘리릭 소리가 나더니 대장선에서 일봉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달빛에 번쩍이는 것을 보니 예사 그물은 아닌성싶었다.

일봉은 자신의 앞에서 그물이 덮쳐오자 등에서 검을 빼 휘둘렀다.

중수법으로 검을 휘둘렀건만 그물은 전혀 베이지 않고 일봉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일봉이 그물 속으로 제 몸을 대어주는 형국이었다.

“일봉!”

그 모습에 놀란 임예린이 소리쳤다. 석추명과 기하진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고개를 빼서 바라보았다. 일봉의 무위는 당금 무림에서 당해낼 자가 별로 없을 정도인데, 그런 일봉이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순식간에 잡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 그물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물이 덮치자 일봉은 맥을 못 추었다.

“내가 가 볼게.”

이번에는 석추명이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발로 수면을 찼다. 석추명이 물 위에서 신룡보를 펼쳤다. 석추명의 신형이 허공에서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며 대장선을 향해 날아갔다. 중간에 몸이 아래로 떨어지자 다시 한번 발바닥으로 수면을 차올렸다.

“또 그물이에요.”

석추명을 유심히 지켜보던 임예린이 소리쳤다. 기하진은 다가오는 악어 떼를 처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휘리릭 소리를 내며 그물이 넓게 펼쳐 석추명을 향해 날아왔다. 석추명은 아까 일봉이 보문검으로도 그물을 잘라내지 못했기에 섣불리 그물을 자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절정의 경공을 발휘하여 허공에서 몸을 선회하여 그물을 피했다.

그 순간, 석추명의 양옆에서 다시 휘리릭 소리가 나더니 또 그물이 두 개가 자신을 덮쳐오는 게 아닌가. 앞에서 덮쳐오는 것까지 총 세 개의 그물이 덮쳐왔다.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기에 석추명은 팔에 공력을 주입하고 비천검을 휘둘렀다. 그물이 제아무리 특수재질이라 한들 쇠도 두부처럼 자르는 비천검에는 베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석추명의 예상과는 달리 검날과 부딪힌 부분에서 푸른 불꽃만 튈 뿐, 그물이 베이지는 않았다. 몇 번 더 휘두르면 그물이 찢어질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물에 갇혀 꼼짝 못 하는 사이,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석추명을 향해 수십 개의 침을 내쏘았다. 석추명이 제아무리 화산신검이요 검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그물에 갇힌 상태에서 그 침을 모두 피할 방도는 없었다.

후두둑.

모기에게 물리는 듯 따끔한 느낌과 함께 석추명의 몸에 서너 개의 침이 꽂혔다. 침에 맞는 순간, 석추명은 왜 아까 일봉이 그물 속에서 그토록 맥을 못 추었는지 알 수 있었다. 침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추명 오라버니.”

멀리서 임예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석추명은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

똑. 똑. 똑.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석추명은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석추명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가 워낙 캄캄해서 어두움에 눈이 익을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자신의 앞에 무식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두꺼운 철장이 보였다. 철장 주변의 벽면이 습하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석추명이 몸을 움직이려고 하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쿵.

바닥에 부딪힌 얼굴이 쓰라렸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공력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마취라도 된 양 온몸이 나른했다. 게다가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는 커다란 무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젠장 할.”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예린이와 하진이, 일봉 형님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석추명은 포기하고 돌바닥에 드러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잡아 온 사람이 있으니 자신을 만나러 올 사람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 누워있는데 돌연 입구 쪽에서 덜커덩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가벼운 걸 보면 무공이 꽤 높은 듯했다.

발걸음 소리가 자신의 철장 밖에서 멈추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석 소협?”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왠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석추명은 고개를 들어 철장 쪽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횃불 옆에 두건을 쓴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은...!”

석추명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철장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무림맹 부맹주였던 천계심의 아들, 천옥랑이었다.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쉿! 조용히 하십시오.”

천옥랑이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석추명은 왠지 천옥랑이 자신을 도와주는 듯하여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옥랑이 허리춤에서 열쇠를 찾아 철장 문을 열더니 석추명의 손목과 발목을 감금한 족쇄마저 풀어주었다.

“여기는 어디요? 왜 나를 풀어주는 거요?”

석추명이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천옥랑이 비천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옆방에 임 소저가 갇혀 있습니다.”

“예린이가?”

천옥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 소저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십시오.”

“여기가 도대체 어디요?”

“여기는 곤명호 바닥에 있는 무림맹의 지하뇌옥입니다.”

천옥랑의 말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곤명호 바닥에 무림맹의 지하뇌옥이 있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맹주에게 반기를 든 자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는 장소입니다.”

그 말에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체하면 모두 위험해지니 어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천옥랑이 철장 밖으로 나가며 길을 안내했다. 족쇄를 풀기는 했으나 약 기운 때문인지 석추명이 비틀거렸다. 그러자 천옥랑이 석추명을 붙잡았다.

“소협이 맞은 침에는 열 시진 동안 온몸의 기운을 빼는 산공독이 발려 있었습니다. 소협께서 잡혀 오신지 거의 열 시진이 다 되어 가니, 잠시 후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옥랑의 뒤를 쫓아 모퉁이를 도니 또 다른 철장이 나왔다. 그 안에는 임예린이 갇혀 있었다.

“예린아.”

석추명이 놀라서 황급히 임예린에게 다가갔다. 임예린도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석추명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색했다.

“오라버니, 무사하셨군요.”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석추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임예린의 얼굴을 살폈다. 임예린이 석추명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천옥랑이 두건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임예린의 철장을 열었다. 임예린은 무공을 몰라서 그런지 다행히도 수갑과 족쇄는 하고 있지 않았다.

천옥랑의 시선이 석추명의 손을 맞잡은 임예린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여전히 두건을 쓴 고개는 옆으로 돌린 채였다.

임예린은 그제야 천옥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 누구세요?”

“천 공자를 모르느냐? 일전에 뵌 적이 있지 않으냐?”

천 공자라는 말에 임예린이 숨을 들이마셨다.

“임 소저....”

정체가 탄로 난 천옥랑이 그제야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천옥랑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천옥랑은 임예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석추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곧 간수들이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임예린과 천옥랑 간의 관계를 모르는 석추명은 임예린을 애타게 바라보는 천옥랑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럽시다.”

석추명이 임예린을 부축하며 천옥랑의 뒤를 바짝 쫓았다.

세 번째 철장에는 일봉이 갇혀 있었다. 천옥랑은 일봉을 철장에서 꺼내주고 무기를 돌려주었다.

“어서 가세요. 이 뒤로 곧장 나가면 작은 문이 하나 나옵니다. 그 문 뒤로 호수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니 지체하지 말고 가십시오. 그럼 전 이만.”

“잠깐만.”

석추명이 천옥랑의 팔을 붙잡았다.

“기하진은, 기하진은 어디에 감금되어 있습니까?”

석추명의 물음에 천옥랑이 시선을 회피했다.

“기하진은 풀어줄 수 없습니다.”

“왜 풀어줄 수 없다는 거죠?”

이번에는 임예린이 천옥랑의 팔을 붙잡았다. 천옥랑이 임예린의 시선을 회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식은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요. 아버지에게 손을 쓰지 않겠다고 해놓고 비겁하게 암수를 썼소. 기하진만은.... 절대 풀어줄 수 없소.”

“그럴 리가 없어요. 하진 오라버니의 성격에 본인 입으로 손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쓰지 않았을 겁니다. 천 공자님은 하진 오라버니와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면서 아직도 그 성격을 모르시나요?”

천옥랑이 제 팔을 붙잡은 임예린의 손을 떼 냈다.

“임 소저께서 그 자식과 친한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하진 오라버니는 맹주의 명을 받고 부맹주님을 잡으러 간 거였어요. 그런데 맹주 측은 하진 오라버니가 맹주령패를 훔쳤다고 오히려 뒤집어 씌웠죠. 어쩌면 부맹주님도 맹주가 미리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어요. 그날 부맹주님이 하진 오라버니에게 붙잡히기 전에 혹시 누구를 만나지는 않았었나요?”

임예린의 물음에 천옥랑은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임 장주의 동생인 임호 도방을 만났습니다. 임호 도방에게 자금을... 융통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부친의 잘못을 아는 터라 천옥랑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숙부님을요? 제 숙부님은 절대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 분이에요. 아마 부맹주님을 돕는다고 하면서도 맹주의 끄나풀 역할을 했을 겁니다.”

임예린은 보지 않고도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어쩌면 부맹주님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음식에 독 같은 것을 탔을지도 모르죠. 얼른 알 수 없는 종류의....”

임예린의 말에 천옥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 뇌옥 모퉁이 안쪽에서 기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린이의 말이 맞다. 원래 임호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임호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하기로 했었지. 그것도 맹주의 명으로 진행된 것이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임호가 부맹주의 술잔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어.”

천옥랑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역시 그렇게 되었던 것인가.”

천옥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뇌옥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며 누군가 뇌옥 정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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