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5화 (165/201)

#   165 - 광세일소_한추영 - 165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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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생사지로(生死之路) (7)

“귀면쌍살을 넘겨 주시오.”

기하진의 요청에 맹주의 오른편에 있던 석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석문이 자신을 넘기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흠”

하지만 맹주가 즉각 거절하지 않자 석문의 안색이 변했다. 조소가 가득하던 눈빛이 어느새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대 자신을 넘겨줄 리 없다고 생각하던 석문은 맹주가 계속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초조한 듯 눈을 껌벅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온갖 더러운 일은 자신이 다 도맡아 처리했거늘 설마하니 자신을 적의 수중에 넘긴단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마음속으로 도리질 치면서도 어쩌면 다른 사람이 아닌 맹주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하진이나 천계심처럼 자신도 쓰다 버릴 장기판의 말밖에 더 되겠는가.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맹주에게 가족이지만 자신은 결국 남이 아닌가.

맹주가 석문의 불안함을 눈치챈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지금 노부에게 내 부하를 배신하라는 건가? 말 한마디로 불안과 갈등을 조장하다니 좋은 수법이군. 정말 좋은 수법이야. 기 련주 머릿속에서 나온 것은 아닐 테고 아마 아리따운 그대의 군사 머릿속에서 나왔을 테지?”

맹주가 임예린을 슬쩍 쳐다보았다.

“과찬이십니다. 맹주님.”

임예린이 싱긋 웃었다. 무공도 못하는 여인이 무림 맹주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실로 놀라웠다. 지혜롭기 그지없어 여자 제갈량이라 한다더니 지금 보니 담력 또한 남다르지 않은가.

“그 얘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 내 아우들은 내가 재주껏 알아서 데려올 테니.”

“하하하,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내 손에 있는 한 그들의 생사여탈권도 내 손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라오.”

기하진이 차갑게 웃었다.

남궁진악이 눈빛을 번뜩이며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만약 내 아우들에게 손을 댄다면 소림사가 차라리 부러워지도록 해 주마.”

남궁진악이 서슬 퍼렇게 기하진을 협박했다.

“과연 이번 소림사의 멸문지화 뒤에도 당신이 있었군. 예상했던 바이지만 정말 대단하오, 맹주.”

기하진이 남궁진악을 비꼬았다.

“듣자 하니 소림 신승도 강시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던데 신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강시를 상대나 할 수 있겠는가?”

남궁진악이 느긋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시 열 구가 소림사 전체를 박살 냈으니 네까짓 놈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저희가 맹주님께 물어보고 싶군요. 강시는 남 교주의 말만 따를 텐데 남 교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맹주님이 더 잘 아실 테고. 남 교주가 맹주님의 등을 치면 어떡하시려고요? 맹주님이야말로 어떤 방도가 있나요?”

임예린이 눈을 반짝이며 맹주에게 물었다.

“아니, 그 질문은 사마 군사님께 드려야 하나요? 귀령자와 동문수학한 사이니 강시에 대한 대비책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강시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임예린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사마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강시는 도검불침인 데다 생전의 무공에 더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을 지니게 되니 싸워서 이기겠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외다. 강시를 없앨 방법이 있다면 딱 한 가지. 강시가 움직이지 못하는 낮에 육신을 불에 태우는 것이오. 시신 전체가 잿더미가 될 때까지 태우면 되오. 하지만 강시의 육신을 찾으려면 마교의 총단으로 가야 할 터인데 그게 어디 쉽겠소?”

사마경이 임예린과 기하진을 보며 슬쩍 묘한 웃음을 지었다.

“호호호, 상세한 설명 정말 감사드려요. 일전에도 많은 얘기를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 얘기를 맹주님 허락도 없이 막 해주셔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임예린이 맹주를 슬쩍 보며 사마경에게 활짝 미소를 지었다.

지척에서 임예린의 말을 듣던 남궁진악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자신의 허락 없이 무슨 얘기를 했다는 말인가? 임예린의 말투로 보아 아마 지난번 사마경이 정도련 측에 납치되었던 때를 말하는 듯한데....

맹주의 인상이 굳어지자 사마경은 속으로 당황했다. 맹주가 의심이 많은 것을 알고 이 앙큼한 계집이 지금 격장지계를 쓰는구나.

이럴 때 정색하면 더 이상해지는 법이라 사마경은 헛기침을 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지도 않은 말이 도움이 되었다니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려, 하하하.”

임예린이 측은한 듯이 사마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임예린의 눈길을 받은 사마경의 표정이 자꾸만 어색해졌다. 임예린과 사마경의 수 싸움은 아무래도 임예린의 승리인 듯했다.

남궁진악과 기하진은 수장대결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양측이 각각 공증인 5명씩을 세워 공정한 비무가 되도록 할 것. 둘째, 비무의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고 비무에 진 자는 무조건 강호를 떠날 것. 셋째, 쌍방의 군사는 10여 리 밖에 둘 것 등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추가할 게 있군요.”

임예린이 입을 열었다.

“이번 비무는 반드시 무림맹의 수장과 정도련의 수장 간에 치르는 비무로 제3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면 좋겠군요.”

“그게 바로 수장대결 아니오? 임 소저가 뻔한 얘기를 어렵게 하는구먼.”

남궁진악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임예린의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그런가요?”

임예린이 남궁진악을 바라보면서 역시 미소를 띠었다. 사마경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수상하게 생각했을 터이나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럼 할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것 같으니 이것으로 오늘 이야기는 끝내기로 합시다.”

기하진이 차분하게 말을 끝냈다. 이제 약관에 불과한 기하진이 제 나이의 세 배가 넘는 노회한 무림 맹주를 앞에 두고 이토록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맹주는 이전에 기하진이 모시던 상관이 아니던가?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도 가시방석일 터이나 기하진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하진의 담력에 모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무림 맹주 앞에서도 한치의 동요도 없는 기하진을 바라보면 석추명은 속으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성격이 좀 차가운 것만 빼면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에 저 녀석이 제 아우라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우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시기하는 마음이 들 만도 하건만 애초에 큰 욕심이 없는 석추명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좋다. 그럼 다가오는 단오절에 동정호 악양루에서 보기로 하지.”

남궁진악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멀리서들 왔는데 이야기만 하느라 목 한 번 축이지도 못했군. 가기 전에 앞에 놓인 술잔이라도 비우고들 가게나. 기 련주를 위해 애주가인 왕 선생이 가장 아끼는 분주(汾酒)를 준비했네.”

남궁진악이 석탁 위에 놓인 잔을 가리켰다. 분주는 산서성의 명주로 색과 향, 맛이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컫는 술이었다.

순백의 백자 술잔에서 그윽한 술향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술에 무엇을 탄 줄 알고 적이 주는 술을 마시겠는가? 기하진이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남궁진악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왜, 마실 배짱이 없는가? 지난번에 임 소저가 술잔을 가지고 장난질을 좀 치긴 했으나 우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마셔도 좋네.”

남궁진악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려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남궁진악의 도발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하진이 술잔에 손을 뻗었다.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석추명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석탁을 내리쳤다. 기하진이 술잔을 미처 잡기도 전이었다.

쿵, 소리와 함께 석탁 위에 놓여 있던 술잔 네 개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공력이 높은 내가고수라면 나무 탁자를 쳐서 술잔을 떠오르게 할 수는 있으나 육중한 석탁은 진동이 없기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석추명의 공력은 상당히 기이한 면이 있었다.

맹주의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귀면쌍살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놈의 공력이 언제 저렇게 늘었단 말인가? 지난번 자신의 손에 내상을 입기 전보다 더욱 놀라운 공력이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놈! 무슨 짓이냐?”

귀면쌍살이 떠오른 술잔을 향해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술잔이 다시 얌전하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맹주께서 심심하신 것 같아 구경거리를 좀 만들어 드리려고 그러오.”

석추명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으로 석탁을 짚자 이번에는 술잔은 가만히 있고 그 안에 담긴 술만 공중으로 치솟는 것이 아닌가. 술 세 줄기가 마치 칼국수 면처럼 수직으로 곧장 치솟았다.

이쯤 되자 옆에서 눈 구경만 하고 있던 왕취선도 가만있지 못하고 나섰다.

“이 아까운 술을 흘려서야 쓰나.”

왕취선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 술을 향해 후루룩 소리를 내며 공기를 들이마시자 술 한 줄기가 그대로 왕취선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왕 선생께서 애주가시라니 나머지 술도 다 드리겠습니다.”

석추명이 미소를 지으며 나머지 술 두 줄기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두 줄기의 술도 그대로 왕취선의 입을 향해 쏘아갔다. 하지만 그 기세가 워낙 사나워 왕취선이 받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노부가 준 술을 이렇게 낭비해서야 되겠는가?”

남궁진악이 석추명이 쏘아 보낸 술 줄기를 향해 빈 술잔 두 개를 던졌다. 그러자 마치 원래 그러기로 했던 것처럼 술이 다시 술잔에 얌전히 들어갔다.

“이번에는 사양치 마시게.”

남궁진악이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하자 빙글빙글 돌던 술잔 하나가 다시 기하진에게 날아갔다.

“술잔이 어지러이 움직여서 누구 잔인지 모르겠군요. 남의 잔을 받을 수 없으니 역시 차라리 안 드시는 게 낫겠어요.”

“술잔이 움직이니 고정하는 것이 좋겠군.”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날아오는 술잔을 붙잡고 석탁 위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술잔이 석탁 아래로 한 치 정도 파묻히는 게 아닌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봉은 깜짝 놀랐다. 석탁이 진흙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움푹 팬단 말인가. 아까 석추명이 보여준 것도 그렇고, 지금 기하진이 보여준 것도 그렇고, 아직 자신의 공력으로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찬 수준이었다.

“흐흐흐, 기 련주의 공력이 또 일취월장했군. 과연 노부와 자웅을 겨룰 만해. 자, 장난질은 그만하고 다음에 보기로 하지.”

남궁진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맹주께서 먼저 가시지요.”

기하진이 가만히 있자 임예린이 얼른 나서며 맹주에게 인사를 했다. 성격이 대쪽 같은 기하진은 자신이 하기 싫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기에 결례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닐세. 우리보다 더 멀리서 왔으니 기 련주께서 먼저 가셔야지”

예의상 하는 말인지는 모르나 조금 전만 하더라도 치열하게 기 싸움을 하던 남궁진악이 웬일로 겸양했다. 기하진은 가뜩이나 맹주의 얼굴이 보기 싫던 터라 그 말을 넙죽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가겠소이다. 단오절 날 봅시다.”

기하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임예린, 석추명, 일봉이 쫓아갔다.

****

호수에 배를 띄웠다. 가는 길은 석추명이 노를 저었다. 이렇게 달밤에 배를 타고 가니 제법 운치가 있었으나 네 사람 모두 마음이 복잡하여 딴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용한 호수 위에 삐거덕삐거덕 노 젓는 소리만 들렸다.

배가 호수의 중간쯤 왔을까,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물이 차면서 배가 빠른 속도록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자 네 사람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런! 아까 맹주 측에서 배에 무슨 농간을 부린 게 틀림없어요.”

임예린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호수가 그리 깊지는 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석추명은 임예린을 안심시키며 붙잡을 나무토막이라도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토막 몇 개만 있어도 사실 석추명, 기하진, 일봉 세 사람은 수상표(水上漂) 경공을 펼쳐 호수를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방금 가라앉은 배는 물속으로 아예 사라지고, 주위에는 붙잡을 나뭇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네 사람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물 위에 둥둥 떠 있었으나 호수가 너무 넓어 끝까지 헤엄을 쳐서 나갈 자신은 없었다.

그때 기하진이 갑자기 소리쳤다.

“조용. 무엇인가 다가온다.”

과연 물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면서 물이 찰랑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임예린은 두려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수면 위로 다가오는 물체를 발견했다. 달빛이 밝았으나 밤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볼 수는 없었다.

“저게 뭐죠?”

물 위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석추명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악어 떼다.”

“헉!”

곤명호에 악어가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십, 수백 마리의 악어 떼가 자신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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