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4화 (164/201)

#   164 - 광세일소_한추영 - 1650457

#

제163화 생사지로(生死之路) (6)

무림맹 총단의 심처(深處)에 자리 잡은 맹주전 밖으로 불빛이 은은히 새어 나왔다. 맹주전 후원에는 때마침 홍매화가 피어 나뭇가지에 쌓인 잔설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맹주전에서 무림맹 소속이 아닌 인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속드린 대로 소림 땡중들은 모조리 극락세계로 보내었습니다.”

“흠, 대단하군. 단 열 구의 강시로 그게 가능하다니.”

맹주 남궁진악이 감탄하자 백련신교 좌사 철혈서생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저희 신교의 저력입니다. 천하제일 문파라는 소림사도 저희 신교에는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나 다름없지요. 하하하하.”

맹주의 앞이었지만 철혈서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뒷짐을 지고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맹주전 밖으로 새어나가자 맹주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던 귀면쌍살과 왕취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건방진 녀석.

“뭐, 땡중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극락세계를 조금 일찍 맛보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저희에게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철혈서생의 말에 맹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신승은 어떻게 되었나?”

“신승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어차피 강시의 상대가 안 되니까요. 신승도 팔다리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만 막판에 어디로 도망쳤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더군요.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팔다리를 잃은 신승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철혈서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는 말에 맹주가 차갑게 응수했다.

“신승은 존재 자체가 위협인 인물일세. 이번 결과가 약조한 바와 다르군. 신승을 반드시 처치하기로 약조했는데 말이야.”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신승이 정 그렇게 신경 쓰이신다면 저희가 소림사를 한 번 더 가는 것으로 하지요.”

철혈서생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귀면쌍살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네놈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귀면쌍살이 철혈서생을 향해 온몸으로 살기를 폭사했다. 귀면쌍살보다 공력이 낮은 철혈서생의 낯빛이 대번에 변했다.

“아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나? 철혈서생은 어차피 우리 맹의 사람이 아니니 깍듯하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네.”

맹주가 철혈서생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말을 하자 철혈서생이 여봐란듯이 귀면쌍살을 바라보며 조소를 띠었다.

“하지만 약조한 것은 빈틈없이 지켜야겠지.”

맹주 남궁진악의 눈에서 눈빛이 번쩍 일었다. 그 눈빛에 철혈서생이 움찔하고 놀랐다.

“신승을 처단하고 그 증거를 보여주게.”

“알겠습니다. 맹주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혈서생이 맹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사람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귀면쌍살이 다시 한번 분기를 드러냈다.

“더러운 마교 놈 같으니라고. 명만 내리시면 가서 바로 저놈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석문, 사소한 일에 흥분하지 마라. 마교 놈들은 아직 쓸모가 많으니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어. 저놈 목은 단물을 다 빼먹은 다음 따도 늦지 않아. 그때는 반드시 저놈에게 본좌에게 무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알겠습니다. 맹주님.”

귀면쌍살이 허리를 굽혔다.

“강시라.... 클클클. 남무궁이 난 놈은 난 놈이야. 그런 괴물을 만들 생각을 다하고.”

남궁진악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귀면쌍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사마경을 데려와.”

“존명.”

귀면쌍살이 포권을 취하고 맹주전을 나가자마자 남천단주 원무개가 수중에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왔다.

“맹주님, 정도련 측에서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원무개가 깍듯이 허리를 굽히더니 손에 든 서찰을 두 손으로 바쳤다.

원무개가 바친 서찰을 읽어내려가던 남궁진악이 갑자기 껄껄껄 거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원무개와 왕취선은 영문을 몰라 조심스레 남궁진악을 쳐다보았다.

“흐흐흐, 정도련주 기하진이라.... 이거 정말 재밌겠구먼. 사제지간끼리 한번 붙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기하진이 정말 많이 컸어.”

한참을 웃던 맹주가 서찰을 다시 원무개에게 넘겼다.

“기하진이 7일 뒤 곤명호 남호도로 오겠다고 하니 일전에 말한 대로 준비하도록 해.”

“존명.”

잠시 후, 밖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소인 사마경입니다.”

“들어와.”

맹주의 말에 사마경이 발걸음을 죽이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사마경은 감히 얼굴을 들어 맹주를 보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 부복했다. 황제 폐하를 뵙는 것보다 더욱 조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의심 많은 맹주에게 찍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의 석 달만이로군.”

사마경을 내려다보던 맹주가 툭 내뱉었다.

“그렇습니다.”

맹주가 자신을 부른 것은 지난번 임예린에게 납치되었던 일 때문에 의심을 사서 가택 연금된 이후 처음이었다. 사마경은 맹주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맹주 남궁진악이 사마경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교 놈들이 강시를 만들어 냈다.”

강시라는 말에 사마경의 안색이 굳었다.

“남무궁이 그동안 우리가 준 시신으로 무얼 하나 했더니 강시 만드는 연구를 한 모양이야. 그 연구를 주도한 자가 귀령자라던가.”

귀령자의 이름을 듣자 사마경이 다시 흠칫 놀랐다. 바닥에 엎드린 손마디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남궁진악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놈들이 아주 쓸만한 것을 만들어 냈어. 하지만 우리도 대비책은 있어야지.”

“강시를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나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맹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마경이 답을 했다. 여전히 시선은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그리고 기하진이 수장대결에 동의했다. 정도련 놈들을 일망타진할 묘안이 있느냐?”

맹주의 물음에 사마경이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맹주의 신임을 다시 받을 절호의 기회였다.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동정호 악양루 옆에 천검총(千劍塚)이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검의 무덤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것은 제 스승이 만든 천하제일의 기관 진식입니다. 천검총 안으로 정도련 놈들을 유인하면 저희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그놈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천검총이라... 그런 곳에 기관 진식이 설치된 것이 의외로군.”

“사실 천검총은 제 스승이었던 천문선생의 묘이기도 합니다. 스승께서는 사후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영면을 방해할까 봐 걱정된 나머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기관 진식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천검총은 이름 그대로 일천 개의 검이 봉인된 무덤입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일천 개의 검을 뉘라서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경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맹주 남궁진악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문 늙은이도 재밌는 양반이었군. 좋아, 이번에는 차질없이 한번 해 보게나, 군사.”

맹주가 다시 이전처럼 사마경에게 ‘군사’라는 칭호를 붙였다. 감금을 끝내고 용서해준다는 말이었다. 사마경이 땅바닥에 입을 맞추듯이 얼른 이마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소인, 신명(身命)을 바쳐 맹주님의 뜻을 봉행하겠습니다.”

****

달밤에 물살을 헤치며 조각배 한 척이 곤명호 위를 미끄러지듯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천 개의 달을 품은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가운데 배가 지나간 자리마다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이윽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인공섬에 닿았다. 황제께서 운남지역의 곤명을 좋아하시나 너무 멀어 가지 못하는 탓에 자신이 있는 응천부에 거대한 호수를 파고 기암괴석으로 비슷하게 꾸미도록 했으니 그게 바로 곤명호와 남호도(南湖島)였다. 그런 탓에 곤명호 주위에는 황제의 금위군이 깔려 있어 무림 인사들은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다.

배가 해안에 당도하자 기하진과 석추명이 먼저 뛰어내려 임예린이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노를 저었던 일봉은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를 해안으로 끌어올려 잘 묶어 두었다.

남호도를 둘러보던 임예린은 이곳에서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부맹주 천계심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따라 약속장소로 가니 맹주 남궁진악이 사마경, 석문, 왕취선과 함께 벌써 나와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사마경이 먼저 아는체했다. 임예린에게 진법이 깨지고 납치까지 당했으니 안색이 좋을 리가 없는데 과연 늙은 여우라 그런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빨리들 오셨군요.”

임예린도 아무렇지 않은 듯 눈웃음을 싱긋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맹주님. 정도련 군사를 맡고 있는 임예린이라고 합니다. 련주님은 이미 잘 아실 테고, 이 분은 정도련의 호법을 맡고 있는 화산신검 석 대협이시고, 제 옆에 계시는 분은 현 아미파 장문인 대행이자 차기 장문인이 되실 일봉 대협입니다.”

임예린이 깍듯한 말투로 석추명과 일봉을 소개했다. 맹주 옆에 서 있는 귀면쌍살 석문을 노려보며 시선을 떼지 않던 일봉이 그제야 맹주를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

“일봉이라 하오.”

맹주는 아미파 차기 장문인이라는 소리에 일봉에게 힐끗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금방 거두었다.

임예린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에는 사마경이 자신들 쪽을 소개했다. 기하진을 제외한 세 사사람이 실제로 맹주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석추명은 잡아 죽여야 할 흉수를 앞에 두고 점잖게 인사를 주고받아야 하는 이 상황에 그저 쓴웃음만 났다.

사마경의 소개가 끝나자 석문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일봉에게 물었다.

“흐흐흐, 반갑소이다. 그래, 요혜신니의 흉수는 잡으셨소이까?”

이미 요혜신니의 흉수로 귀면쌍살을 점찍고 있던 일봉의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아직 잡지 못했소.”

“크하하하, 그것참 안타깝구려. 어서 잡아야 할 터인데.”

석문의 목소리에 조롱기가 다분했다.

석문이 요혜신니를 때려죽인 것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빈정대는 모습을 보자 일봉은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일전에 남이와 같이 금영과 미영 소사매에게 확인해 보니 흉수는 음양사자보다 키와 체격이 좀 더 컸던 것이다.

“고맙소. 귀하께서 지금이라도 붉은 옷과 백발로 변장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맞받아치는 일봉의 목소리는 무뚝뚝하나 눈빛에는 노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자 귀면쌍살이 ‘크크크’하고 목구멍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냈다.

“오랜만이로군. 잘 지냈느냐?”

남궁진악이 기하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맹주는 예의를 갖추시오. 이분은 구파일방과 4대세가의 지지를 받는 정도련의 련주님이시오.”

석추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남궁진악이 가소롭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석탁을 치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마교 수라대주를 휘하에 둔 자가 정도련주라니, 이거 정말 우습지 아니한가?”

남궁진악이 웃자 사마경, 귀면쌍살, 왕취선도 맹주의 말에 동조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뭐가 대단하겠소이까? 여기 귀면쌍살을 수하에 두신 분도 있는데.”

기하진이 웃음기 없는 눈빛으로 남궁진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건방진 놈. 사부를 보고도 예도 갖추지 않을 생각이냐.”

남궁진악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에 기하진의 좌우에 서 있던 석추명과 일봉이 동시에 발검을 하려는 듯이 검을 붙잡았다. 그러자 귀면쌍살과 왕취선도 병기를 붙잡고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석추명과 일봉을 노려보았다.

순간 양측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기하진이 시선은 맹주를 향한 채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석추명과 일봉을 저지했다.

“본인은 이 자리에 정도련 련주 자격으로 나온 것이지, 귀하의 제자 자격으로 나온 것이 아니외다.”

기하진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귀하께서 본인을 한 번도 제자로 대한 적이 없거늘 어찌 사부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시오?”

맹주 남궁진악은 한때 기하진이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화입마를 치료해주고 제자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가. 그때만 하더라도 맹주의 말 한마디면 끓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길도 마다치 않았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던가? 자신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장기판의 말보다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가.

한때 사제지간의 연을 맺은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단칼에 뒤집는 기하진의 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녀석, 어릴 때부터 이렇게 당찬 구석이 있었지.

석추명은 기하진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교주 남무궁 앞에서 이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지도자는 냉정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기하진은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크흐흐흐”

남궁진악이 기하진을 노려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좋소이다, 기 련주.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그래, 어떡해야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풀어주겠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