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3화 (163/201)

#   163 - 광세일소_한추영 - 164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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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생사지로(生死之路) (5)

“기 단주, 다시 한번 말해보시게. 누가 죽었다고?”

운진자의 눈빛이 차가웠다. 아무리 기하진이 정도련의 핵심인사이지만 초의공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것은 사실이니 숨길 수도 없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진 도장님.”

석추명은 그 자리에서 초의공이 어떻게 뢰정과 함께 화련산 신교 총단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황보를 구출하려다가 어째서 교주에게 발각되었는지, 그리고 나찰녀와 백골마군이 어떻게 초의공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담담하게 설명했다.

스승 뢰정을 구하려다가 복부에는 나찰녀의 유성추를, 등에는 백골마군의 백골검을 맞아 쓰러지는 초의공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벌써 시간이 상당히 지났지만 그 광경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때 초의공 선배님께서 목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소림사에 초의공 선배께서 나타나셨다니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운진자가 노해서 부르짖었다. 금방 발검이라도 할 듯 오른손을 검 손잡이에 대고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의공 사제가 죽었을 리 없다. 의공 사제는 장문인께서도 인정한 곤륜파 제일의 검객이다. 성정이 침착하고 지혜로워 아무리 큰 어려움이 처해도 헤쳐나가지 못한 적이 없었어. 원래 의공 사제는 신룡이 구름에 가린 듯 그 자취가 묘연하여 사람들이 찾고자 하여도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석추명 네놈이 지금 누구를 모함하는 것이냐!”

운진자가 비분강개한 듯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석추명의 눈에는 운진자의 수염 자락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초의공이 소림사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보다 초의공이 죽었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으로 와 닿은 게 분명했다.

“저도 부인하고 싶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 한마디에 안간힘을 다해 참으려고 애쓰던 운진자의 마지막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

“이노옴!”

운진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석추명을 향해 검을 내쏘았다. 쾌검의 극치를 보여주던 초의공의 사형답게 운진자의 검도 순식간에 빛살처럼 쏘아져 왔다. 석추명은 운진자가 검을 빼 들자 흠칫 놀랐으나 지금 자신에게는 그 검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석추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검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챙!

하지만 운진자의 검은 석추명의 가슴에 닿지 못했다. 운진자의 어깨가 들썩이는 순간 일봉이 즉시 보문검을 들어 운진자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운진자는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사나운 눈길로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자네가 한 말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운진자가 옷자락을 떨치며 몸을 돌리더니 곤륜칠검과 함께 숙소로 되돌아갔다.

임예린이 가만히 석추명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몸도 안 좋으신데 그만 방으로 가서 쉬세요.”

석추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석추명의 뒷모습을 기하진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

석추명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돌아가신 초의공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으며, 왜 설랑과 함께 소림사를 공격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실마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지친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앉은 석추명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그렇게 된 것이로구먼. 그렇게 된 것이야.

문득 석추명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울렸다. 석추명이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암자에 딸린 이 좁은 선방에는 지금 자신과 전신 부상을 입은 신승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소리는 어디서 들린 소리인가? 가만, 설마 신승께서...?

석추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신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승은 미동도 없이 잠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상처가 워낙 심했던 신승은 지장전 아래 비밀지하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에 자신 말고는 신승밖에 없지 않은가? 의문이 든 석추명은 신승 곁으로 다가가 다시 신승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 신승께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석추명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구먼. 그래서 그렇게 강했던 게야.

그 순간 다시 말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신승이 확실했다.

내력이 상당한 수준에 달하면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을 건네는 전음(傳音)이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도 보통 입술은 움직였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전음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 젊은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괴로워하지 말게.

신승의 말이 묘하게 석추명의 마음을 울렸다. 언뜻 초의공이 죽었다는 말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출신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괴로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석추명이 멍하니 신승을 바라보았다.

-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문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야. 그것 또한 업이로고.

- 내가 이 모양이 되도록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했거늘, 지금 보니 이생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랬나 보이.

석추명은 머릿속에 울리는 신승의 말을 들으며 이제는 신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젊은이, 자네 손바닥으로 내 단전을 한번 짚어주겠는가?

“단전은 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돌려 눕혀 드릴까요?”

석추명은 신승의 몸이 불편한가 싶어서 되물었다.

- 불편하지 않네. 이 육신은 내가 아니거늘, 육신이 좀 망가졌다 하여 뭐가 그리 불편하겠는가? 그저 모든 것이 여여(如如)한 것을. 다만 내가 이제 열반에 들어야 할 터인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러니 내 단전에 자네의 손바닥을 좀 대어주시게.

석추명은 신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어서 조심스레 오른손바닥을 신승의 단전에 대었다. 신승은 사지가 다 잘려나간 부상자였으나 단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신승의 단전에 머물던 온기가 갑자기 물결처럼 출렁인다 싶더니 쑥 하고 석추명의 장심(掌心)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온기가 점점 강해지며 물줄기처럼 석추명의 전신을 한 바퀴 휘감아 돌고는 단전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갔다. 귀면쌍살의 장력을 맞은 이후, 공력이 소실되어 텅 비어 있던 단전이 신승의 기운으로 점점 차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얼마나 가볍고 온화한지 마치 따뜻한 눈이 사르락 사르락 단전에 내리는 듯했다.

석추명은 신승의 의도를 알고 깜짝 놀랐다. 신승께서 지금 자신에게 공력을 전해 주시는 게 아닌가. 신승께서 이처럼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심오한 공력 덕분이었다. 만약 공력을 잃게 되면 신승의 생명도 다 타오른 재처럼 꺼지게 될 게 자명했다.

석추명은 다급히 신승의 단전에서 손바닥을 떼려 했으나 쇠붙이가 흡철석에 달라붙은 듯 손바닥은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그만하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지만 온몸에는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각쯤 지났을까.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신승이 눈을 떴다.

“스님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 이 공력이 있어도 나는 어차피 살지 못하네. 부디 죽은 자를 다시 명부로 돌려보내고 무림에 창궐한 사마를 제압하시게.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니 만 가지 법도가 하나와 다르지 않네. 무공도 이와 다르지 않다네.

석추명은 신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분마저 이제 떠나시려는가.

의지가 되었던 사람들이 자꾸 자신의 곁을 떠났다. 스승 뢰정이 그랬고, 초의공 선배가 그랬으며, 화산파 태상장로 독고양이 그랬다. 소림 신승과는 많은 말을 해보지는 않았으나 신승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 험난한 강호에서 위안이 되는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분마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문득 허탈함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 번뇌가 끝이 없는 것 같지만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라네. 자네에게 무거운 짐을 준 것 같아 미안하구먼. 하지만 젊은이, 이 세상에 우연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이것도 자네와 나의 업보요 인연인 것을. 힘들더라도 가던 대로 묵묵히 계속 가시게. 그러다 보면 반드시 길이 다시 보일 것이네.

어느새 신승의 입가에 염화시중(拈花示衆) 같은 은은한 미소가 서리더니 신승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님! 정신 차리십시오. 스님!”

신승을 깨우려고 신승의 몸에 손을 올리는 순간 석추명은 신승이 이미 떠나갔음을 깨달았다. 영혼이 떠난 육신의 빈 껍데기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

“공각대사님, 설랑과 함께 왔던 자들의 특징이 어떠했습니까?”

기하진과 함께 요혜신니의 방으로 돌아온 임예린이 방에 아직 남아있던 공각대사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오?”

“일반 무림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는지요?”

임예린의 질문에 공각대사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글쎄올시다. 설랑이라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을 열지 않았소. 그거야 그 사람들이 과묵한 탓일 테니 그걸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러고 보니 모두 얼굴에 생기와 표정이 없었소이다. 그리고 그자들의 몸에서 기이한 냉기와 사기(邪氣)가 느껴졌소이다. 마치 죽은 시신처럼 말이오.”

공각대사의 말에 임예린이 눈을 반짝이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미간을 찡그리고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죽은 자들이 살아올 수 있습니까?”

임예린의 말에 공각대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웃었다.

“임 소저께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나 보오이다.”

“대사님, 설랑과 초의공 외에 또 누가 있었나요?”

임예린이 다시 가만히 물었다.

“흠, 마교의 장로들이 있었소. 마황신뢰 4대 장로 중 탈명검 마립만 보이지 않더군. 다른 사람들도 마교의 고수인 듯한데 워낙 창졸지간에 일을 당하여 10명 모두의 얼굴을 다 파악하지는 못했소.”

“그렇다면 황보, 신갈, 뢰정 장로도 보셨단 이야기인가요?”

임예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움켜쥔 가녀린 주먹도 떨리는 것 같았다.

“그렇소.”

공각대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공각대사님”

임예린이 가만히 부르자 공각대사가 의아한 눈길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황보, 신갈, 뢰정 장로 모두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

공각대사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온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오다니...?”

“누군가 억지로 죽은 자들의 몸을 깨운 것이겠지요.”

공각대사는 그제야 임예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설마 강시를 말하는 것이오?”

공각대사의 눈이 찻잔 받침만큼이나 커졌다.

“강시라는 것이 실제로 있습니까?”

“흠, 강시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없소이다. 하지만 강시를 연구하는 사람은 있었지.”

강시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에 기하진이 공각대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사람이 누군가요?”

임예린이 물었다.

“귀령자라는 도인이요. 천문선생의 제자였지.”

“천문선생이라면 무림맹 총군사 사마경의 스승이라는 사람 아닙니까?”

이번에는 임예린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소. 천문선생은 말 그대로 무림에 다시 없을 기인이었소. 천문과 지리, 의술과 독에 두루 능통했고, 기관과 진식뿐만 아니라 부적을 쓰고 영혼과 교감하는 좌도방문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

“좌도방문이라. 그렇다면 강시소생술도 가능했겠군요?”

“그것은 모르겠소. 하지만 당시 시신이 없어지고 무덤이 파헤쳐져 백골이 사라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는데 그 범인이 귀령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령자는 사문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리고 무림 공적으로 지목되어 전 무림의 추격을 받게 되었지. 그 이후 어디서 숨어 지냈는지 소식을 들은 이가 아무도 없소이다.”

“귀령자가 드디어 강시소생술을 완성했나 보군요.”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잠시 몸을 멈칫했다.

“초의공이 죽은 게 확실하오, 임 소저?”

공각대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예린에게 되물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석추명이 들어왔다.

“신승께서.... 입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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