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2화 (162/201)

#   162 - 광세일소_한추영 - 1647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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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생사지로(生死之路) (4)

소림사 탑림 뒤쪽 길로 쭉 올라가면 임예린과 사소혜 등이 머무는 보리암이 나왔다. 일봉은 마음이 다급하여 남이와 계법사태보다 한발 앞서 보리암에 도착했다.

“아가씨! 아가씨!”

암자는 인적이 없이 썰렁했다. 암자 앞마당에 청소를 담당하는 소지(掃地) 스님 한 분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을 뿐 정도련 인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최근 많은 일이 있었고 계법사태는 자신이 아미파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으나 자신의 최우선 순위는 역시 임예린이었다.

임예린의 호위무사. 남들은 그까짓 호위무사 따위라고 하찮게 여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봉 자신에게는 사실 가장 중요한 일 아니던가. 애당초 요혜신니에게 무공을 배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도 임예린을 지키기에는 자신의 무공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우는 과정에서 요혜신니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고 스승의 깊은 정을 느꼈다. 그래서 스승이 흉수의 손에 돌아가시자 그 죽음이 원통하여 임예린에게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봉의 진심이 아니었다.

일봉은 임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망이 들었다.

아가씨, 제발 무사 하십시오. 제발 살아만 있어 주십시오.

보리암을 뒤지면서 일봉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제 자신이 신공을 이루었지만 지켜야 할 대상이 없어진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임 소저와 사 소저는 여기 없는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아미파 제자들과 같이 있을지도 모르니 불영암(佛影庵)으로 빨리 가봐요.”

남이의 말에 일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영암으로 경공을 전개하는 세 사람의 발걸음에서 바람 소리가 일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산짐승이 휙 하고 스쳐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봉의 발걸음이 제일 가벼웠다. 일봉은 마치 공중을 떠서 가듯 발바닥이 지면에 채 닿지도 않았다. 계법사태는 자신보다 저만치 앞서가는 일봉의 신법을 바라보면서 볼수록 놀라울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금영아, 미영아.”

불영암에 도착하자 남이가 어린 소사매들의 이름을 불렀다.

불영암으로 오는 길에 젊은 소림사 승려 하나가 처참한 몰골로 풀숲에 쓰러져 있었지만 다행히 암자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다급하게 아미파 제자들의 이름을 외쳤다.

“연길 사매. 청진 사매!”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영암 어디에도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한번 사매의 이름을 불렀다.

“연길아, 청진―”

“쉿.”

남이가 다시 소리치려 하자 일봉이 고개를 돌리며 남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남이는 왜 그러냐는 눈빛을 지었으나 일봉은 대답하지 않고 즉시 요혜신니가 쓰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방 안쪽 지하에 자신이 쓰던 수련실이 있었다. 수련실이 워낙 은밀하고 방음이 잘되어 외부에서는 알기 어려웠는데 그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만 같았다.

일봉이 경계하며 천천히 수련실 문을 열었다. 그때 안쪽에서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이 사저예요?”

“금영아!”

남이가 부르자 금영이 수련실 안에서 달려 나왔다.

“남이 사저!”

금영이 울먹이며 남이에게 안겼다. 금영이 나오자 미영과 다른 아미파 제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너희들 모두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계법사태가 아미파 제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지었다.

아미파 소사매들 뒤를 이어 아리따운 두 여인이 서로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일봉”

“아가씨!”

두 여인은 임예린과 사소혜였다. 임예린은 다소 초췌하긴 했으나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무사하셨군요.”

임예린의 모습을 본 일봉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훅 스치고 지나갔다.

“일봉도 무사히 다녀왔구나. 다행이야.”

임예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수련실에서 나온 사람은 무당파 허각 도장과 화산파 막내 금린이었다. 두 사람은 나가서 싸우려고 했으나 공애 방장이 아미파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부득이 지하 수련실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예린이 무사한 보니 일봉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흉수의 손이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은 것이다. 이것조차 왠지 돌아가신 스승이 보살펴준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밤이 이미 깊었지만 불영암에서는 환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요혜신니가 머물던 방에 지금 기하진과 임예린을 비롯한 정도련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침통한 기색이었다.

“무림의 겁난이로다. 화산과 무당에 이어 소림까지.... 아미타불.”

공각대사가 불호를 외며 눈을 감았다.

“게다가 그전에 있었던 사천대전으로 청성과 아미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에는 오대세가의 하나인 팽가장이 또 공격을 받았었고. 어허, 이대로 가다가는 강호 전체가 몰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소. 벽력탄 같은 화탄을 쓴 것도 아닌데 단 열 명에게 소림사 전체가 당하다니 이게 말이 되오이까?”

현암자가 탄식하며 내뱉자 청풍 도장이 탁자를 치며 말을 이었다. 공력을 회복해서인지 청풍 도장도 예전의 과격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소림사를 공격한 열 명이 누군지에 대해서 잠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를 해봐도 그들이 누군지, 어떤 무공을 썼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조용히 사람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임예린이 현암자에게 물었다.

“현암 도장님, 설랑의 경우처럼 단시일 내에 무공을 급진전시키는 방법이 있습니까?”

적괴의 수장이 설랑이었다는 것은 임예린도 이제 알고 있었다. 임예린은 설랑이 신승을 그처럼 무참히 격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나 무림이란 워낙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니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소. 사실 여기 일봉 소협의 무공도 단기간에 빠르게 늘기는 했으나 그것도 사실 최상승 심법과 영약이 있어야만 가능하오. 일봉 소협도 지금 수준에 이르기까지 최소 일 년이 시간이 걸리지 않았소이까? 일봉 소협의 경우도 무림에 전례가 없는 일이기는 하나 설랑과 같은 예는 풍문으로라도 들은 적이 없소. 다른 분은 있으시오?”

현암자가 허각 도장과 공각대사를 바라보며 물었으나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강호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내저은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 열 명 가운데 설랑 외에 또 알만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임예린의 물음에 공각 대사가 무엇인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운진자를 보고는 침을 삼키며 입을 닫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어딘지 이상했다.

“공각 대사님, 또 알 만한 사람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대비책을 강구할 것이 아닙니까?”

임예린의 말에 너도나도 빨리 얘기하라고 공각대사를 다그쳤다.

“그것이 저.... 흠....”

공각대사가 말하기 불편한 듯 다시 뜸을 들이더니 또 운진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임예린은 그 모습에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열 명 중에 곤륜파가 있었군요?”

임예린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운진자와 곤륜칠검은 낯빛이 창백해져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 소저, 그 무슨 소리요? 우리 곤륜파 제자가 왜 소림사를 공격한단 말이오? 그리고 우리가 본문의 무공에 자부심을 지니고는 있으나 이렇게 패도적인 무공은 없소이다.”

운진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임예린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임예린은 운진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계속 공각대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열 명 중에 곤륜파 제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공각대사께서 알고 계시겠죠.”

임예린이 계속 다그치자 공각대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소승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소이다.”

운진자가 답답한 듯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대사, 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하시오. 그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공각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승이 초의공을 본 듯하외다.”

공각대사의 말에 운진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벌벌 떠는 손길로 공각대사를 가리켰다.

“의공 사제가 지금 종적을 감추었다고 당, 당신이 감히 의공 사제를 모함하는 것이오?”

평소 점잖고 차분하던 운진자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공각대사에게 손가락질했다.

“무림맹에서 우리 의공 사제에게 터무니없는 죄목을 덮어씌우며 무림 공적으로 선포했소이다. 그리고 맹주 남궁진악은 우리 곤륜파에 그 죄를 물어 10년간 봉문을 명했소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 남궁진악의 간악한 잔꾀임은 대사께서도 잘 알지 않으시오? 그런데 어찌 이 자리에서 우리 초의공을 그렇게 험담하신단 말이오?”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운진자와 공각대사를 바라보던 기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의공은 화련산 백련신교 총단에서 분명히 죽었다고 석추명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소림사에 나타나 소림승들을 몰살한단 말인가? 설마 석추명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기하진이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예린도 초의공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초의공이 소림사에 왔었다는 말에 얼굴이 눈에 띌 만큼 창백해졌다.

석추명 이 자식이 거짓말을 한 게 분명해. 누가 마교 아니랄까 봐 아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게로군.

기하진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자신은 그래도 석추명을 믿었는데 믿었던 석추명이 자신과 임예린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기하진의 표정을 보았는지 임예린이 기하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멍하고 당황한 눈빛이었다.

기하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마침 석추명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석추명은 아직 요혜신니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수뇌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력이 돌아오지 않아 의욕마저 상실한 석추명은 임예린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별다른 인사도 없이 조용히 물러나며 신승 간호를 자청했다.

일봉과 남이는 그 모습이 안타까웠으나 수뇌부의 분위기가 그런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승을 간호하는 것은 남자가 편할 터였다.

기하진이 신승이 있는 방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와.”

기하진이 다짜고짜 석추명에게 쏘아붙였다. 석추명이 영문을 모르고 멀뚱히 일어서자 기하진이 석추명의 멱살을 잡아 끌어냈다. 신승이 누워서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왜 거짓말했어?”

존댓말도 없었다. 친형제처럼 생각한다던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한 새끼에게는 존댓말을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라니, 그게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

석추명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초의공 선배가 죽었다면서? 왜 거짓말했냐고!”

기하진은 석추명을 그대로 암자 뒤편으로 끌고 가서 내동댕이쳤다. 공력을 잃은 석추명은 기하진의 힘을 받아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리며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니까.”

석추명이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기하진에게 물었다.

그때 임예린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임예린은 기하진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기하진이 나가자마자 따라 나온 것이었다.

“하진 오라버니, 잠시만 진정해요. 일단 추명 오라버니께 상황을 좀 설명하고 얘기를 들어와요.”

임예린이 기하진의 팔을 붙잡자 기하진이 임예린의 팔을 떨쳐냈다.

“왜 그래야 하는데?”

기하진이 임예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임예린이 당황했다.

“너는 왜 항상 추명 형님의 편만 드는 거지? 왜? 그때 너도 분명히 저 자식에게 들었잖아. 초의공이 죽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소림사를 공격할 수 있겠어, 어떻게!”

기하진의 말에 이번에는 석추명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때 초의공은 분명히 화련산 총단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거늘. 초의공과 스승이 돌아가신 게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초의공이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공 사제가 죽었다니.”

기하진과 석추명의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들의 뒤에는 언제 나왔는지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버티고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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