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 광세일소_한추영 - 164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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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생사지로(生死之路) (3)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는 격렬한 싸움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수십 구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땅에 스며들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핏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나한승들이 분명했다.
“어허, 지옥도가 따로 없군.”
청풍 도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숱한 싸움을 치우며 시신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봤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딘지 모르게 기묘했다. 나한승들은 거대한 힘으로 일격에 끝장이 난 듯했다. 적이 나한승들을 베어버린 방식이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
보통 무림의 고수들은 적과 싸울 때 움직임은 최소화하되 효과는 높은 부위를 공략했다. 심장이라든가 관절, 주요 사혈을 노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기하진 일행의 눈앞에 펼친 참상은 그런 상식과는 정반대였다. 검에 오른쪽 어깨 부분의 쇄골에서 왼쪽 아래 갈비뼈가 있는 부위까지 사선으로 두 동강이 난 시신, 머리 위에서 아래 꼬리뼈에 이르기까지 척추를 따라 반으로 갈라진 시신, 허리가 정확히 양분된 시신도 있었다. 상처의 표면이 칼로 무 자르듯 매끄러운 것으로 보아 모두 단 일격에 당한 듯싶었다.
“저기를 보시오.”
청풍 도장이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황색 승복을 입은 달마당 승려 서너 명이 계단에 고개를 처박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 엄청난 힘에 목이 송두리째 뽑히거나 허리가 찢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야수의 공격에 희생당한 것만 같았다.
남이가 고개를 돌리며 구역질을 했다. 용봉단 조장으로 숱한 전투를 치르며 이골이 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을 많이 보아왔던 남이도 이렇게 참혹한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
“이게 인력(人力)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오?”
청풍 도장이 넋이 나간 채 말했다. 그러자 무릎을 굽히고 시신의 상처 부위를 살피던 운진자가 대답했다.
“요혜신니를 살해했던 흉수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더 고강한 적들이오. 이 상처는 적이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단박에 부러뜨린 것이오. 마치 포도알을 따듯이 말이오. 세상에 이런 신력이 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소이다.”
“죽은 지 얼마나 된 것 같습니까?”
“글쎄,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으니 얼른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을 보면 최소 며칠은 지난 듯하오.”
기하진의 물음에 운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도처에 널린 시신을 둘러 보았다. 대웅보전 문턱에도, 요사채와 회랑에도, 향로와 공양함 옆에도 잔인하게 죽은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현암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설마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것인가?”
그 말에 석추명이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다.
“암자에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아미파 제자들과 임예린, 사소혜 등은 여자라 소림사 경내에 머무는 것이 불편해서 소림사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암자에 따로 묵고 있었다.
석추명의 말에 계법사태와 남이도 암자에 남아있던 다른 제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바로 암자로 달려가려 했다.
“잠깐만. 아직 적이 경내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단독 행동은 안 됩니다.”
기하진이 소리치며 계법사태와 남이 앞을 막아섰다. 적의 무공으로 보아 여기 있는 누구도 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마당에 혼자서 덜컥 적을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시신의 수만 더 늘 것이 자명했다.
“모두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먼저 대웅보전, 달마당, 나한당, 요사채, 조사전과 탑림까지 적이 숨어 있지 않은지, 그리고 생존자가 있는지 살펴본 다음, 탑림 뒷길로 해서 임 군사가 머무는 보리암과 아미파 제자들의 머무는 암자를 수색하기로 합시다.”
기하진이 냉정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모두 군말 않고 기하진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현암자와 청풍 도장 같은 선배 고수들도 우왕좌왕하는 판국에 기하진이 차분하게 해야 할 것을 정리해주니 모두 자연스레 기하진을 정도련의 수장으로 여기는 듯했다.
법당 안을 살피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불자가 아니라도 ‘부처님’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법당 안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웅보전에서 백팔 배를 드리던 승려, 달마당에서 독경하던 학승, 요사채에서 청소하고 밥 짓던 공양주 등 누구 하나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가뜩이나 겨울철이라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데 죽어 나자빠진 시신에서 품어 나오는 냉기와 귀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몸서리쳤다.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3,000 명에 달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거대한 사찰에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신을 살펴볼 때마다 석추명은 혹시 임예린의 얼굴이 나올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공력을 잃어서 입고 있는 얇은 옷만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했지만 석추명은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빨갛게 언 손끝으로 시신을 살펴보며 그저 눈앞에 이 사람이 임예린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소림 방장의 시신이 보이지 않소.”
운진자가 기하진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때 지장전(地藏展)을 살피던 계법사태가 크게 소리 질렀다.
“여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 소리에 모두 지장전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석추명은 경공을 쓸 수 없기에 일봉이 부축하여 데려갔다.
지장전 안에는 계법사태가 지장보살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불상이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청풍 도장이 눈썹을 추켜 올리며 한 발 앞으로 나와 등신대의 지장보살상을 살펴보았다. 청풍 도장의 눈에는 그냥 금칠한 불상일 뿐, 특이한 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장보살은 보통 왼손에는 석장,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면 다른 곳은 먼지가 제법 쌓여 있는데 보주 부분만은 막 닦은 것처럼 번쩍이지 않습니까?”
계법사태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유심히 보니 과연 오른손 위에 놓인 보주에만 먼지가 없었다.
“보주 부분에 먼지가 없다는 것은 최근에 누군가 그 부분을 만졌다는 이야기지요.”
계법사태가 말을 이었다. 계법사태는 법당 안을 하나씩 살피다가 지장전에 이르자 숨진 승려들의 명복이라도 빌어주고 싶었다. 지장보살상 앞에 합장하여 명복을 빌고 허리를 숙여 참배한 다음 몸을 일으키니 문득 지장보살 오른손의 보주가 유난히 반짝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혹이 든 계법사태는 보주를 세세히 살펴보았고 과연 일반적인 보주와는 달리 수상한 점이 있어 지체하지 않고 소리쳐 사람들을 불렀던 것이다.
기하진이 성큼 다가가 지장보살 오른손 위의 보주를 살펴보았다. 과연 보주 아랫부분에 세심히 보지 않으면 놓쳤을 미세한 금이 둥글게 나 있었다. 그 금을 보자 기하진은 순간 무슨 생각이 든 듯 보주를 잡고 손으로 돌렸다.
갑자기 철커덩 소리가 나더니 지장보살상이 그대로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기하진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닥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고, 계단 밑은 컴컴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기하진이 잠시 아래를 바라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안에 누가 계십니까?”
바닥 밑에 제법 큰 공간이 있는 듯 기하진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잠시 후.
“기 단주인가?”
힘없는 목소리가 바닥에서 울려 나왔다. 그 소리에 기하진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횃불을 들고 계단 아래를 비추었다.
“공각 대사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림맹 천림원주로 있었던 공각대사였다.
기하진이 내려가 보니 지하실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상처를 입은 승려들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공각 대사 역시 입고 있던 승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에 절여 있었으나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공각 대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각 대사가 힘없이 고개를 젓더니 옆에 있던 노승을 안아 들었다. 노승은 다리 두 개와 팔 하나가 부러져 혼자서는 운신도 못 하는 상태였다.
“신승을 모시고 나가시게.”
공각 대사의 말에 기하진이 깜짝 놀라 횃불로 노승을 비추었다. 정말 일전에 소나무 위에서 놀라운 신공으로 마교의 고수들을 쫓아냈던 신승이었다. 강호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무림쌍절 소림신승이 팔다리를 잃고 전신 불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교에서 쳐들어왔었네.”
공각 대사가 신승을 안고 계단을 오르며 힘겹게 내뱉었다.
“마교에서 말입니까? 도대체 몇 명이나 쳐들어왔기에...?”
마교라는 말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기하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교 놈들, 부모님을 죽이고, 지학의 목숨을 뺏어가더니, 화산과 무당에 이어 기어이 소림사까지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단 열 명이네.”
“예엣?”
기하진은 자신이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공각대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격이 급한 청풍 도장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열 명이라니, 단 열 명에게 소림사 전체가 이렇게 몰살했단 말이오?”
공각대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도 믿기지 않지만 단 열 명뿐이었소.”
“아니, 마교에서 어떤 고수를 보냈기에 소림사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승을 이 지경으로 만들 만한 사람이 마교에 있습니까?”
기하진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되물었다.
공각대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의 수장은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거구였소. 온몸이 새하얀 특이한 모습이었소. 심지어 머리털이나 눈썹까지도 새하얗더군.”
공각대사가 힘겹게 내뱉는 말을 듣던 일봉이 기하진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설랑입니다. 설랑이 분명합니다.”
일봉의 말을 듣던 석추명이 놀라서 되물었다.
“설랑이라면 일전에 예린이를 납치했다는 그 비적단 두목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설랑의 무공은 이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제가 잠깐 겨루어보았지만 제 십초지적(十招之敵)도 되지 못할 실력이었습니다. 그런 자가 신승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하진의 말에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탄식 소리만 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각대사가 지장전 바깥에 널브러진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눈을 질끔 감았다.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혹시, 방장 선사는 못 보셨소?”
공각대사가 눈을 뜨며 물었다. 공각대사의 턱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애 방장 선사의 시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살아계신 게 아닐는지요?”
운진자의 대답에 공각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좋으련만....”
공각대사의 머릿속에 자신과 신승을 지장전 아래 비밀지하실에 밀어 넣던 공애 방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공애 방장은 등에 커다란 검상을 입어 움직일 때마다 벌어진 상처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 승포자락을 적셨다.
- 사제, 사숙을 모시고 이 아래에 숨어 있게나. 여기에 숨어 있으면 저 흉수 놈들도 절대 알지 못할 게야.
- 사형, 어찌 저더러만 숨어 있으라고 하십니까? 저는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사미승들도 저렇게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공각대사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공애 방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공각대사의 팔을 붙잡았다.
- 이렇게 소림의 천 년 전통이 사라지게 할 셈인가? 자네의 두 어깨에 문파를 이어가야 할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왜 몰라? 지금 당장은 숨어 있는 것이 괴롭고 비참하겠으나 부디 살아남으시게. 살아남아서 반드시 소림의 명맥을 이어주시게나, 사제.
공각대사를 바라보는 공애 방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평생 번뇌와 집착을 끊어내는 수행을 한 선사조차 소림의 천 년 역사가 허무하게 사라진다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각 대사님, 소림사 경내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각 대사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석추명은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정도련 인사들의 시신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희망을 품을 만했다.
공각 대사가 고개를 들고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만 방장 스님께서 발 빠른 제자를 한 명 보내시며 피하라고 언질을 주셨던 것으로 아네.”
그 말에 석추명과 일봉 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리 언질을 받았으면 피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떨지요? 적은 없는 것 같으니 제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남이가 조심스럽게 제안하자 일봉이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네.”
계법사태마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석추명도 따라가고 싶었으나 공력을 잃은 마당에 사람들의 짐만 될까 봐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급한 심정으로 멀어지는 아미파 제자들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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