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60화 (160/201)

#   160 - 광세일소_한추영 - 1644228

#

제159화 생사지로(生死之路) (2)

석추명은 3일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탓에 온몸에 기운이 없어 일봉의 부축을 받으며 길을 걸었다. 일봉의 검에 맞았던 어깨의 상처는 출혈이 심하기는 했으나 이제 많이 아물었지만 귀면쌍살의 장력으로 소실되었던 공력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몸에 기력이 없는 탓으로 여기고 며칠 있으면 괜찮겠거니 하고 생각했으나 하루 이틀 지나도 별 차도가 없으니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기 단주가 아무래도 정도련주로 추대될 모양입니다.”

옆에서 걷던 남이가 석추명에게 말을 걸었다.

“하진이는 무공도 뛰어난 데다 결단력이 있고 통솔력도 있으니 그보다 뛰어난 후보를 찾기는 어렵지.”

석추명의 말에 남이가 석추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남이 동생은 하진이가 정도련주가 되는 게 싫어?”

석추명의 짓궂은 말에 남이가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무공으로 따진다면 추명 오라버니도 기 단주에 못지않잖아요. 명색이 화산신검인데.... 사람들이 오라버니의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 저는 조금 서운했답니다.”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정파 출신이 아니니 사람들이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석추명은 그것이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옆에서 기하진을 도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의 말에 옆에서 일봉도 거들었다.

“그건 저도 그랬습니다.”

“용봉단원이 직속상관인 단주보다 마교 대주를 더 좋아해 주다니 영광인걸?”

석추명이 껄껄 웃었다. 그러자 남이는 얼굴을 붉히며 혹시 누가 들을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가 언제 단주보다 오라버니를 더 좋아했다고 그러세요?”

남이가 부끄러운 듯 딴 곳을 바라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이 사저는 꾸밈을 모르니 석 소협께서는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그러게 말입니다.”

일봉과 석추명이 얼굴이 붉어진 남이를 보며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런데 일봉 형님, 음양사자를 흉수로 지목하다가 어떤 계기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까?”

석추명의 물음에 일봉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음양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스승님의 흉수가 당신이 아니냐고요. 음양사자가 나를 비웃으며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러자 남이가 말했다.

“하지만 흉수가 자신이 흉수라고 인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음양사자가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저. 음양사자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지독히 강하여 아무도 겁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일봉이 음양사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의 머리에 난 상처는 음양사자의 귀조수가 아니라면 날 수 없는 상처라면서요?”

“저도 그게 이상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음양사자가 공력이 지극히 강하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예로 귀면쌍살과 기 단주를 들더군요.”

일봉의 말에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정도의 공력이라면 아마 가능하리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스승님의 머리 상처를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귀면쌍살이 그걸 이미 알고 있더군요.”

일봉의 말에 남이와 석추명이 동시에 일봉을 쳐다보았다.

“귀면쌍살이 계속 흉수가 음양사자라고 부추기듯 말하는 것도 그렇고, 스승님의 머리 상처를 미리 아는 것도 그렇고.... 해서 저는 흉수가 혹시 귀면쌍살과 관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추명이 신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귀면쌍살은 음양사자가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자신보다 무공도 고강하고 맹주의 신임도 더 얻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귀면쌍살이 음양사자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음양사자로 변장하고 일을 저질렀던 것은 아닐까요? 그뿐만 아니라 추명 오라버니와 음양사자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스승님의 죽음으로 자연히 정도련에 내분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겠죠.”

“사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흉수가 귀면쌍살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당시 기 단주가 음양사자로 추정되는 이를 보았을 때 그자가 펼친 경공이 귀연신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스승님의 시신을 살펴봤던 현암 도장께서 스승님이 가슴에 강력한 장력을 맞아 내장을 다 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강력한 장력이라면 귀면쌍살의 철산장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일봉 사제의 말이 맞아요. 지금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귀면쌍살이 노렸던 것은 어쩌면 추명 오라버니가 아닐까요? 정도련에서 귀면쌍살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바로 오라버니가 아닙니까? 오라버니만 쳐내면 정도련의 힘이 많이 약해지겠지요. 게다가 우리가 스승님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음양사자 뒤만 쫓아다니게 되면 귀면쌍살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일 테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닙니까?”

남이의 분석이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음양사자와 귀면쌍살은 체격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 설령 귀면쌍살이 음양사자로 변장했더라도 음양사자를 본 적이 있던 사람은 아마 금방 알아차렸을 거야.”

석추명이 고개를 가로젓자 남이가 생각이 났다는 듯 덧붙였다.

“기 단주가 보기는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소림사로 돌아가는 대로 금영과 미영 소사매에게 물어봐야겠어요. 두 사람은 흉수를 가까이에서 봤으니 흉수의 체격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보통 사람보다 키와 체격이 크다고 한다면 귀면쌍살이 틀림없어요.”

남이의 말에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계법사태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남매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정겹게 하고 있느냐?”

계법사태는 대사저인 데다 평소 성격이 차가워 남이와 일봉 둘 다 크게 어려워했다.

“스승님의 흉수가 누군지 얘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일봉이 지금까지 남이와 나눴던 얘기를 간략히 요약해서 말해주자 계법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봉 사제의 말대로 귀면쌍살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그건 돌아가서 차차 알아봐야겠지. 그건 그렇고 어젯밤에는 두 사람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 수백 명의 개방 제자들과 맞서서도 기죽지 않고 용감히 싸워 우리 아미파의 기상을 드높였으니 스승님께서 보셨다면 아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게야.”

“일봉 사제가 고생했지요.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남이가 부끄러워하며 말하자 계법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일봉 사제가 개방 장로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나도 보았다. 정말 대단하더구나.”

계법사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평상시 스승님께서 일봉 사제를 너무 감싸고 도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일봉 사제에게 연화구품결을 전수하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어.”

그 말을 듣던 남이가 깜짝 놀라며 계법사태를 바라보았다.

“연화구품결이라면 장문인에게만 전수한다는 구결 아닙니까?”

남이의 말에 이번에는 일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순히 무공 증진을 촉진하는 구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라니.

계법사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봉을 바라보았다.

“남이 사매의 말이 옳아. 연화구품결은 현 장문인이 차기 장문인에게만 전수하는 구결이라 나도 아직 익히지 못했지. 그런데 그때 일봉 사제가 그것을 익힌다고 하니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일봉은 계법사태의 심정이 이해되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는 그 구결이 그런 것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계법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알았다면 자네 성격에 덥석 배우려고 들지 않았겠지. 자네, 스승님께서 임종 직전에 주신 검의 의미는 알고 있는가?”

그러자 일봉이 보문검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검에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검이야말로 아미파 장문인의 신물이네. 즉 그 검의 주인이 바로 현 아미파의 장문인이라는 뜻이야.”

계법사태의 말에 일봉은 낯빛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이 검이 장문인의 신물이라니!

일봉이 얼른 보문검을 끌러 계법사태에게 주었다.

“이 검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검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대사저께서 받아주십시오.”

하지만 계법사태는 고개를 내저으며 검을 받지 않았다.

“아미파의 장문인이 될 사람은 보문검을 받기 전에 반드시 연화구품결을 먼저 익혀야 하네. 그리고 그 구결은 반드시 전임 장문인에게서 전수받아야 하지. 구결과 검을 물려받은 사람이 후임 장문인이 되는 것이야.”

연화구품결과 보문검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던 일봉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나는 대사저인 내가 있는데도 장문인의 자리를 문파의 막내에게 물려주신 스승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어. 그래서 그날 스승님과 자네가 수련의 중요한 고비를 맞이하는 줄 알면서도 암자에 있지 않았던 거야. 그날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스승님께서 끔찍한 변고를 겪지 않으셨을지도 모르지.”

계법사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하지만 지난밤, 사제가 개방 원로들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스승님께서 왜 자네를 차기 장문인으로 선택하셨는지 알게 되었어. 자네야말로 우리 아미파의 중흥에 꼭 필요한 인재네.”

계법사태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일봉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대사저. 스승님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천운이 따랐기 때문이지 제가 무슨 인재겠습니까?”

계법사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세를 뒤엎을 만한 무공을 지니는 것도 훌륭하나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야말로 스승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덕목이었어. 스승님은 자네의 무재(武才) 뿐만 아니라 자네의 인성과 용기를 보신 것이지. 나를 포함한 아미파 제자들 가운데 그 세 가지 면에서 자네를 능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 스승님도 그 점을 보신 게야.”

일봉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 자신을 그토록 인정해준 요혜신니가 무척 그리울 따름이었다.

“강호의 일이 마무리되어 아미산으로 돌아가는 즉시 장문인 취임식을 거행토록 하세나. 하지만 그 전에라도 자네는 장문인 대행의 신분이네. 문파의 대소사는 내가 도와줄 테니 당분간 자네는 문파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정도련의 막중대사에만 집중하도록 하게.”

일봉은 그저 얼떨떨했다. 상단의 일개 호위무사에 불과하던 자신이, 구대 문파의 말단 제자들을 그리도 부러워했던 자신이, 대 아미파의 장문인이 되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축드려요, 사제. 아니, 이제는 장문인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는 일봉에게 남이가 미소를 머금으며 축하했다.

“사저, 놀리지 마십시오. 아직 대사저의 말씀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계법사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차 익숙해질 게야. 호칭은 당분간 그대로 하고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바꾸는 게 낫겠구나.”

일봉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 두 눈만 껌벅거렸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앞으로는 예린이도 형님 앞에서 고개를 못 들겠군요.”

석추명이 그런 일봉을 놀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기하진과 석추명 일행은 어느새 소실산 아래에 도착했다. 석추명은 의식을 회복한 지 닷새째였으나 아직도 공력이 회복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일봉과 남이는 소림사에는 좋은 약재와 의술에 정통한 고승들이 계시니 금방 회복될 것이라며 석추명을 위로했다.

기하진도 석추명의 상태를 눈치채고 있었으나 아는 척하면 석추명이 더 상심할까 봐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리고 사실 석추명보다 무림맹주 남궁진악이 보내온 도전장이 더욱 신경 쓰이기도 했다.

산 중턱에 있는 산문을 지나는 데 응당 있어야 할 번승(番僧)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백련신교에서 소림사를 쳐들어온 이후, 산문에는 늘 무장한 승려들이 번을 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이 이상했다.

산문을 넘어 소림사 정문까지 가는 동안 산 전체가 커다란 무덤처럼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산문을 넘어 소림사 정문까지 가는 동안 밭을 매는 승려나 물동이나 나뭇짐을 지고 가는 승려 서너 사람은 곧잘 보곤 했다. 게다가 정문이 가까워지면 법당 앞에 피워놓은 향냄새가 은은히 퍼지며 담장을 넘어 승려들의 낭랑한 독경 소리도 들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런 기척이 전혀 없었다. 소림사 담장을 넘어 기하진 일행의 코끝에 맴도는 냄새는 향냄새가 아니라 비릿한 피 냄새였다. 그 냄새는 공력을 잃은 석추명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라 기하진을 비롯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움켜쥐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무래도 소림사에 무슨 변고가 생긴 듯하네.”

운진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기하진에게 말했다. 기하진은 정문을 열기 전에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절 안에서 기분 나쁜 사기(邪氣)가 뭉게뭉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하진이 심호흡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 정문을 밀었다. 그러자 소림사 정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아까보다 훨씬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찌르듯 풍겨왔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과 사람들은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광경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