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59화 (159/201)

#   159 - 광세일소_한추영 - 164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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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생사지로(生死之路) (1)

“개방이 그래도 명문정파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순 비렁뱅이에 도적 떼 집단이었군.”

기하진이 대놓고 비꼬았다.

“네놈이 누구기에 감히 개방을 모욕하느냐?”

공 방주가 기하진을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기하진이 코웃음을 치며 공 방주를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모욕? 지금 협박과 협잡질을 누가 하고 있는데 모욕이라니. 도대체 개방에는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이오?”

기하진의 목소리가 낡은 사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미친 듯이 일봉과 남이를 공격하던 개방 제자들도 그 말에 움찔하여 손을 멈추었다.

“윗물이 썩으니 아랫물도 썩을 수밖에. 저런 자를 방주라고 모시고 있었으니.”

기하진의 모습이 하도 당당하여 공 방주는 선뜻 손을 쓰지 않고 잠시 지켜보았다.

“공 방주, 저분은 무림맹의 용봉단주를 지낸 기 단주입니다. 지금은 정도련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지요. 기 단주, 귀면쌍살은 잡으신 게요?”

기하진이 나타나자 현암자와 청풍 도장이 반색하며 아는 체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자리에 있다가 기하진이 나타나자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두 분도 정도련과 뜻을 같이하시는 게 맞습니까? 아미파 제자들이 폭도 같은 개방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공격당하고 있는데 그래, 두 분은 그 위에 뭣을 하고 계셨습니까?”

연배가 한참 어린 기하진의 따끔한 꾸중에 현암자와 청풍 도장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그것이... 우리는 개방도 정도련에 가입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여....”

“정도련은 절대 어중이떠중이들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협의도 모르는 놈들을 받아들여 어쩌자는 것입니까?”

기하진이 현암자와 청풍 도장을 날카롭게 주시하자 두 사람은 왠지 의기소침하여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운진 도장과 곤륜칠검, 계법사태께서는 일봉 소협과 남이, 석 소협을 보호하십시오. 여기 마무리는 제가 짓겠습니다.”

기하진의 말 한마디에 기라성같은 구대 문파의 중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소이다.”

공륭은 자신을 쏘아보는 기하진의 눈빛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약관을 조금 넘은 듯한데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는 구대 문파 장문인을 능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방주랍시고 앉아 있으니 개방이 스스로 자정(自淨)하지 못할밖에. 스스로 못한다면 외부에서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자, 덤비시오.”

“건방진 애송이 놈. 네놈이 무림 맹주라도 된단 말이냐? 어찌하여 남의 문파 일에 네놈이 감 놔라 배 놔라 한단 말이냐?”

가뜩이나 성격이 급한 공륭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 꽂혀 있던 황죽봉을 꺼내더니 기하진을 공격해왔다. 그래도 방주직을 그냥 얻은 것은 아닌 듯, 굴러갈 것만 같은 비대한 덩치가 새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기하진의 검이 불꽃을 머금으며 허공을 지났다. 검로(劍路)마다 화염이 화르르 일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화기를 이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기하진의 검에 불꽃이 일자 얼굴 살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공륭의 작은 눈이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공륭이 ‘설마’하는 심정으로 방주의 신물인 황죽봉을 내찔렀다. 황죽봉은 황금이 섞여 있어 누런빛을 띤 철죽봉이었다. 탄력은 대나무 못지않고 강도는 무쇠보다 더 튼튼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대여섯 초를 교환했다. 공륭은 개방의 2대 무공 외에도 무쇠 같은 다리로 휘두르는 각법(脚法)이 신묘한 경지에 다다라 철비각(鐵飛脚)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황죽봉이 기하진의 검에 가로막히자 공륭이 발바닥으로 기하진의 무릎을 후려쳤다. 발바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까지 공륭의 철비각을 정통으로 맞고 다리뼈가 성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기하진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발을 들어 무릎을 공격하는 공륭의 비각퇴를 맞받아쳐다. 공륭과 똑같은 수법을 쓴 것이다.

“으읔”

공륭이 별안간 신음을 내뱉으며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개방 제자들이 모두 놀라 공륭을 쳐다보았다.

“방주님!”

진국충이 놀라서 달려가려 하다가 운진자의 검에 저지당했다.

공륭이 황죽봉으로 바닥을 짚고는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얼굴빛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기하진의 발과 부딪힌 오른쪽 발목이 축 처진 것으로 보아 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이 검으로 땅을 짚은 채 우뚝 버티고 서서 공 방주를 내려다보았다.

기하진의 냉랭한 눈빛에 공륭은 식은땀을 흘렸다. 돌도 깨는 자신의 무쇠 다리와 부딪혔다가 성한 사람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늘, 기하진은 오히려 그런 자신의 다리뼈를 부러뜨렸으니 아픔은 고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자랑하던 비각퇴는 이제 쓸 수 없소이다. 죽봉도 잡을 수 없도록 팔까지 부러뜨려 드릴까?”

“아니 되오이다. 기 단주, 그것은 아니 되오이다.”

기하진의 말에 누군가 급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조금 전 방주에게 직언했다가 붙잡혔던 송 장로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송 장로를 따르는 무리들이 송 장로를 구출하여 데리고 나온 것이다.

송 장로가 기하진에게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기 단주, 본 방의 일은 본 방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송 장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본 방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국난이 있을 때는 오랑캐에 맞서 싸우고, 무림에 사마(邪魔)가 준동할 때는 사마와 맞서 싸워왔소. 하지만 근간에 이르러 본 방이 본래의 취지를 잃고 협의를 행하지 못하였고 무도하였음을 인정하오. 공륭은 방주로서 방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방도들 부추겨 악행을 일삼게 했으니 그 죄가 실로 크오. 그러니 마땅히 방규로써 그 죄를 묻고 역대 조사들의 신위 앞에서 정죄토록 하겠소.”

여기까지 말하던 송 장로가 다시 일봉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개방 제자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자들은 오늘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 것이오. 개방의 수석 장로로 방도들을 대신하여 소협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리오.”

일이 뜻밖에 이렇게 매듭되자 일봉도 송 장로를 향해 포권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귀 파의 장문인께서 귀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소. 진심으로 애도를 드리오. 예전에 본 방의 장로 하나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악행을 저지르다가 귀 파의 장문인께 혼찌검이 난 일이 있소. 그 일로 본 방과 귀 파 간의 관계가 다소 멀어지기는 했으나 원래 우리 두 문파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소. 부디 오늘 일로 두 문파 간에 의가 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원래 일봉은 개방에 화가 많이 나 있었으나 송 장로가 이렇게까지 정중히 나오니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손에 많은 개방 제자들이 다치지 않았던가. 그만하면 분풀이도 할 만큼 했으니 오늘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은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로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송 장로가 일봉에게 사과하면서 개방과 아미파 간의 갈등은 일단락된 듯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기하진이 송 장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개방에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군요. 앞으로 개방이 환골탈퇴 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기하진은 그러고 난 뒤 석추명에게 눈길을 돌렸다.

“추명 형님은 아직도 의식이 없습니까?”

남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찰나, 석추명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거짓말같이 눈을 떴다.

“추명 오라버니, 정신이 드시나요?”

남이의 소리에 일봉이 얼른 석추명에게 달려갔다. 석추명은 정신이 멍한 듯 한참 눈을 깜박이더니 이윽고 남이를 알아보았다.

“남이구나. 여기가 어디지?”

석추명이 깨어나자 일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영영 깨지 못하면 어떡하나 속으로 많이 염려했는데 석추명이 이렇게 깨어나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석추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기하진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네 상처는 다 나았느냐?”

기하진이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귀면쌍살의 손에 의식을 잃었다가 지금 3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저는 곤륜파 선배님들과 함께 귀면쌍살을 쫓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하진의 말에 청풍 도장이 놀라서 물었다.

“귀면쌍살 석문이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 인근까지 쫓아왔다가 사당에서 나는 칼부림 소리에 잠시 정신이 팔려 놓치고 말았습니다. 멀리 가지 않았다면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그때 남이가 놀란 눈으로 기하진의 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기를 보세요.”

남이의 손가락을 따라 사람들이 일제히 눈길을 돌리니 서찰 한 통이 반듯하게 기하진을 향해 날아왔다. 서찰이 날아오는 방향을 봤을 때 10여 장 뒤에 있는 전각의 지붕에서 날아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얇은 서찰이 천천히 날아오는 것은 보통 공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찰은 정확히 기하진의 앞까지 완만히 날아왔다. 기하진이 손을 뻗어 서찰을 붙잡고 펴보았다.

- 한 숲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고, 한 무림에 두 명의 맹주가 있을 수 없소. 더 이상 아까운 피를 흘릴 것도 없이 다가오는 단오절에 동정호 옆 악양루에서 양측 진영의 수장끼리 만나 무공으로 승부를 가리는 수장비무(首長比武)를 제안하는 바이오. 무림맹주 남궁진악.

남궁진악의 이름 옆에는 기하진도 잘 아는 맹주의 낙관이 찍혀 있었다.

“아니 이것은 남궁진악이 정도련주에게 보내는 도전장이 아닌가?”

기하진 옆에서 함께 서한을 보던 운진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장비무라니, 정도련의 련주셨던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고 이런 서찰을 보낸 것이 아니겠소?”

계법사태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지금 련주 자리는 비어 있으니 누가 련주가 된단 말이오? 게다가 수장비무라니. 어허.”

현암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청풍 도장이 금세 제 처지를 잊고 침을 튀기며 떠들었다.

“무당파의 현각 도장께서 마교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으셨고 화산파의 거양 도장께서도 선화 하신 지 오래되었으니 련주를 하실 분이 소림사의 공애 방장 선사 외에 누가 또 있겠소이까?”

“그렇게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오. 명망이나 인품으로만 보면 공애 방장께서 하시는 것이 맞으나 문제는 맹주 남궁진악과의 수장비무요. 내 생각에는 남궁진악과 일 대 일로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련주로 추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운진자의 말에 청풍 도장이 되물었다.

“아니 그럼 운진자께서는 누가 정도련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무공으로만 따지더라도 공애 방장만 한 분이 있겠소이까?”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개방의 송 장로가 입을 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모두 너무 멀리서 찾는 게 아닌지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공애 방장께서 본 방의 공 방주를 몇 수만에 물리칠 수 있겠는지요?”

그 말에 청풍 도장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길로 송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기 단주께서 련주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우리 개방도 본 방의 문제를 모두 매듭짓고 나면 정도련에서 힘을 보태겠소이다.”

송 장로의 말에 현암자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것참 묘안이구려. 기 단주의 내공은 당세에 당할 자가 없고, 또 맹주 남궁진악의 무공도 소상하게 알 터이니 맹주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않겠소?”

“제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운진자가 옆에서 현암자의 말에 동조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하진을 정도련주로 추대하며 분위기가 삽시간에 떠들썩해졌다.

일봉은 사람들이 떠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조용히 석추명 옆으로 다가갔다.

“석 대협, 좀 괜찮으십니까?”

석추명은 일봉이 예전과 달리 자신을 대협이라고 부르자 당황했다.

“대협이라니요, 형님.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직 공력이 모이지 않는 것 빼고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석추명이 빙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저를 지켜주셨으니 석 아우님은 진정한 대협이십니다. 석 아우님이 대협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대협의 호칭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일봉이 진지하게 얘기하며 석추명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진작 석 대협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짧고 마음이 좁아 석 대협을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호하시는 석 대협에게 오히려 제가 검을 휘둘렀으니 그 죄를 다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석추명은 더욱 당황하여 손을 뻗어 일봉을 일으키려 했다.

“일봉 형님, 민망하게 어찌 이러십니까? 피차 오해가 있었으니 그럴 수 있지요. 저도 제 스승님께서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셨다면 분명히 오해했을 것입니다.”

일봉이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이가 석추명을 거들었다.

“일봉 사제, 추명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만 일어나세요. 이러다가 추명 오라버니가 또 쓰러질까 걱정됩니다.”

“또 쓰러지시다니요. 이제 막 정신을 차리셨는데 그러면 안 되지요.”

남이의 말에 일봉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에 늘 진지하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일봉이 당황한 모습에 남이와 석추명이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석추명이 일봉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제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형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주셨다는 얘기를 남이에게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피차간의 빚은 갚은 것으로 하고 그냥 저를 편하게 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협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거북한 느낌입니다.”

석추명의 말에 남이가 다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그럴까요? 대협?”

“형님, 대협이라는 말 좀 그만하시라니까요.”

석추명이 웃으며 얘기하자 일봉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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