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 광세일소_한추영 - 16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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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일봉 (9)
그때 개방 장로 중 허연 눈썹을 뺨 위까지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장은 웬만한 사람은 다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컸다.
“방주님, 장로 송길 삼가 아룁니다. 우리 개방이 비록 빌어먹으나 협의에 있어서만큼은 그동안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타 문파의 젊은 제자 하나를 두고 차륜전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서 본 방의 장로 두 사람이 나서게 된다면, 이는 협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천하의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명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수석 장로 송길이 우렁찬 목소리로 방주의 잘못을 직간했다. 송길의 입바른 소리에 심기가 불편해서인지 공 방주의 눈꼬리가 대번에 샐쭉해졌다. 그러자 방주의 눈치를 보던 또 다른 장로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송 장로에게 대들었다.
“송 장로께서는 감히 불충하게도 방주님의 명을 거역할 셈이오?”
송 장로에게 대든 사람은 덩치가 큰 대머리 장로였다.
“철 장로, 우리 장로의 직분이 무엇이오? 방주님을 잘 보필하는 것이 아니오이까? 방주님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셨으면 충언을 고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외다.”
송 장로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지지 않고 철 장로에게 대거리했다.
“송 장로, 아무리 수석 장로라도 그렇지, 어찌 불충하게 방주님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오? 나는 집법장로로서 이 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소이다. 송 장로는 방주님에 대한 충성을 규정한 방규 제12조를 어겼으니 그에 합당한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오. 법개(法丐)들은 무엇하느냐? 당장 죄인을 포박하라.”
개방의 수석 장로가 방도들 앞에서 포박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개방 제자들은 모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상 위를 주시했다. 송 장로의 발언이 방주에게 다소 무례할 수는 있으나 상당수 개방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기에 방주가 명을 거두어 주기를 다들 내심 바라던 차였다.
하지만 공 방주의 입에서는 뜻밖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송 장로는 수석 장로라는 지위를 맡고 있으면서도 방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방도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니 앞으로 일 년간 장로의 지위를 박탈하고 뇌옥에 구금한다. 당장 잡아들여라.”
송 장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방주가 제정신인가?
하지만 철 장로는 이때가 기회라는 식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송 장로를 포박하여 무릎을 꿇렸다. 만약 이 과정에서 송 장로가 반항하면 죄가 가중되어 목숨을 뺏을 수도 있었다.
“방주님! 천하 무림의 웃음거리가 되고자 하십니까?”
송 장로는 법을 집행하는 법개(法丐)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 방주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면 근육을 씰룩거렸다.
“우리가 비렁뱅이라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가당하냐? 말해 보라.”
방주가 방도들을 둘러 보며 외치자 방도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불가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은혜와 원수를 반드시 갚되 특히 원수는 두 배, 세 배, 열 배로 갚아 누구도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 말이 틀렸느냐?”
“방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방도들이 모두 우렁찬 목소리로 방주의 말에 화답했다.
“여기 눈앞의 아미파 친구가 우리 개방을 업신여겼으니 응당 열 배로 갚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마땅합니다!”
방도들이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고 있었다. 방주는 교묘한 언변으로 어느새 일봉을 개방의 불구대천의 적으로 몰아갔다.
“노, 각 두 장로는 방도들의 뜻을 새겨 저 녀석의 양쪽 팔을 끊어 본 방의 위엄을 보여라.”
방주의 명이 떨어지자 개방 제자 수백 명이 “와”하고 함성을 터뜨렸다.
일봉은 보문검을 힘주어 잡으며 눈앞에서 선 두 장로를 바라보았다. 봉과 검을 잡고 서 있는 자세며 기세가 절대로 진국충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사실 방주 공륭은 자신의 제자 진국충이 일봉을 충분히 제압할 것으로 생각했다. 진국충은 장로보다 한 등급 낮은 7결 제자였으나 전 중원에 흩어져 있는 거지들의 무공사범으로 사실 무공수위만 놓고 보면 4대 장로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래서 무기도 장로들만 사용하는 철죽봉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개방의 총 무공교두가 아미파 애송이에게 보기 좋게 패하자 방주의 분노는 폭발하는 화산마냥 끓어 올랐다.
일봉을 공격하는 노마(盧磨)와 각상(角象)은 각각 평생 봉법과 검법 한 가지만 수련하여 이것만으로는 개방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오죽하면 이들의 별칭이 봉장로와 검장로였을까.
노마와 각상이 자신들의 병기인 철죽봉과 철검을 들고 일봉의 좌우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일봉은 아미신공을 익힌 뒤로 실전을 경험하지 못하다가 오늘 아주 날을 제대로 잡은 셈이었다. 게다가 싸우는 사람마다 예전에는 감히 넘보지도 못했던 구대 문파의 절정고수들이었으니 싸울 때마다 무공이 빠른 속도로 진보했다.
일봉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착실하게 복마검의 검결을 운용했다. 지금 자신에게는 아미파의 명예뿐만 아니라 석추명의 목숨도 걸려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석추명에게 잘못했다고 사죄할 기회마저 영영 잃게 될 것이다.
일봉의 움직임이 둔중해지기 시작했다. 보문검이 밀도가 높은 기름 속에서 움직이는 듯 유장하고도 완만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한 수 한 수마다 상대방을 압사할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일봉의 검세가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일봉의 양측에서 봉과 검이 동시에 쳐들어 왔다. 개방의 2대 무공, 타구봉법과 사망검법(蛇蟒劍法)이었다.
일봉의 검세가 위력적이기는 하지만 저렇게 완만해서야 어떻게 쾌속한 공격을 막아낸단 말인가?
세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남이와 진국충은 똑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남이의 눈빛에 수심이 가득한 것에 비해 진국충의 입꼬리는 슬며시 추켜 올라갔다. 이 대 일의 싸움이라 공평하지는 않으나 이번에는 일봉을 확실히 제압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장하던 일봉의 검세가 돌연 번개 벼락 치듯 급변하더니 노, 각 두 장로의 무기와 맞부딪쳤다.
따당!
강한 금속성이 울리더니 노, 각 두 장로는 안색이 변해 급히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무기를 잡은 두 사람의 손이 풍이라도 맞은 듯 쉬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공 방주의 눈초리가 다시 좁아졌다. 아미복마검이 중검(重劍)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나 위력적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니 이토록 중검을 제대로 펼치는 자가 있을지 몰랐을 것이다.
세상 만물에 상생상극이 있듯이 각파의 무공에도 상생과 상극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미파의 무공은 개방의 무공과 상극이었다. 일전에 요혜신니가 당두걸의 팔을 자른 것은 요혜신니의 무공이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미파 무공이 개방의 무공을 제압하는 데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 방주는 장로 두 사람이 나서서도 아미파 제자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하자 성난 두꺼비처럼 두 볼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오냐, 두 명이 안 된다면 세 명, 세 명이 안 된다면 네 명, 어디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꾸나.
공 방주가 이를 으드득 갈며 소리쳤다.
“철 장로, 가세하라.”
철 장로까지 뛰어들면서 개방의 장로 세 사람이 한 사람과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곧 개방이 아미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봉은 문득 가슴에서 호기가 치솟아 껄껄껄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더러운 놈들, 얼마든지 오너라. 다 받아주마.”
개방 최고의 고수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일봉은 전혀 두려움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울수록 아미신공이 전신에 퍼지면서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무공의 정수를 하나하나 깨우쳐갔다.
개방 장로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구대 문파의 장문인이라도 벅찬 일이었다. 그런데 아미파에 가장 늦게 입문한 일봉이 개방의 절정 고수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일봉의 무공을 바라보던 남이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승께서 비록 불시에 유명을 달리하셨으나 아미파의 장래를 밝힐 씨를 뿌리고 가셨다.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강호에서 아미파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질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스승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일봉을 바라보고 있던 남이가 스승 요혜신니의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일봉의 검이 하늘 높이 떠오르나 싶더니 우렁찬 용울음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무기를 시간 차를 두고 하나씩 튕겨냈다. 그와 동시에 세 장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읔.”
세 장로는 가슴과 등, 복부에 각각 검상을 입고 말았다. 세 장로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일봉의 검이 반 치만 더 깊었더라도 세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일봉이 그 순간에도 자비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거두지 않았으나 공 방주는 오히려 일봉이 개방을 희롱한다고 생각했다. 공 방주의 얼굴빛이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 방주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나 방도들에게 소리쳤다.
“방도들은 모두 나서 저 요망한 아미파 놈들을 주살하라.”
방주의 명이 떨어지자 흥분한 개방 제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있어 섰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무공교두와 장로들이 줄줄이 패하고 부상을 입자 가뜩이나 일봉을 향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평소 사리판단을 제법 할 줄 아는 개방 제자들조차도 분위기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사당 안에 있던 이삼백여 명의 개방 제자들이 일제히 죽봉을 빼 들고 일봉과 남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폭도가 난 것 같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에 단상 위에 있던 현암자와 청풍 도장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두 사람은 같은 말만 되뇌며, 아직 무공을 쓸 수 없는 판국에 행여라도 흥분한 개방 제자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까 봐 마음을 바싹 졸였다.
남이는 개방 제자들이 흥분하여 떼로 덤비자 검을 빼 들고 석추명을 엄밀히 호위했다. 지금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석추명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일봉이 남이와 석추명의 앞을 막아서며 보문검을 높이 쳐들었다.
꽈릉. 시퍼런 검기가 보문검을 감싸자 일봉의 주위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일봉의 검이 찌르고, 베고, 긋고, 쳐올리며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봉의 손을 휘두를 때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양 떼 속을 누비는 성난 호랑이 같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자유자재로 검을 휘두른다는 아미파 호랑이 관자재검(觀自在劍)의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순식간에 개방 제자 칠팔십 명이 나가떨어졌다. 일봉도 사람이라 힘이 달리고 숨이 찼으나 막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막아내야 했다. 일봉이 거친 숨을 내쉬며 결연히 검을 떨쳤다.
다시 자신의 주위로 대여섯 명의 개방 제자가 죽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미복마검 제육 초 보살항마(菩薩降魔). 관세음보살이 버드나무 가지로 성수를 뿌려 마귀를 물리치듯 검 끝이 저절로 구부러졌다가 파르르 튕기더니 번개같이 개방 제자들의 팔을 찔러 들어갔다.
“으아악.”
또다시 대여섯 명의 개방 제자들이 죽봉을 쥔 팔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때 어수선한 틈을 타서 선우호가 몰래 비천검을 훔쳐가려는 모습이 일봉의 눈에 들어왔다.
“사저, 조심해요.”
일봉이 몰려드는 개방 제자들을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남이의 주의를 환기했다. 남이는 그제야 선우호를 발견하고 서둘러 검을 휘둘렀지만 화산십수에 속하는 선우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이가 대번에 수세에 몰리면서 석추명과 떨어졌다. 석추명은 이 혼란한 와중에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때 흥분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던 개방 제자 몇이 석추명에게 죽봉을 휘둘렀다.
“물러서라!”
남이가 소리치며 개방 제자들을 막아서는 순간, 선우호가 번개같이 석추명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승냥이 떼처럼 계속해서 달려드는 개방 제자들을 막아내면서도 석추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일봉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안돼!”
하지만 일봉은 당장 몸을 뺄 수가 없어서 선우호가 검을 찔러넣는 것을 보면서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침착하던 일봉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릴 무렵, 담벼락 옆 높은 나무 위에서 무엇인가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선우호의 검에 부딪혔다. 선우호는 별안간 불에 덴 듯 검을 쥔 손바닥이 화끈거려 검을 놓치고 말았다. 선우호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 잡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자신을 방해했는지 찾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선우호가 땅바닥에서 작은 구슬 같은 것을 주워들었다.
누군가 우리를 돕는구나.
일봉도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우호가 집어 든 구슬을 유심히 보았다. 뜻밖에도 그것은 커다란 염주 알이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염주 알은 가벼워 이렇게 먼 거리를 쏘아 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염주 알을 던져 선우호의 검을 튕겨냈으니 염주 알을 튕긴 자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혹시 소림 방장이 오셨는가.
일봉이 재빨리 염주 알이 날아온 담벼락 옆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언뜻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도 같았다.
다시 석추명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선우호는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계속 단상 위에서 일봉을 노려보고 있던 개방 방주 공륭이 단상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답답한 놈들. 모두 비켜서라.”
일파 장문인의 지위로 직접 손을 쓰고 싶지는 않았건만 하도 답답하니 자신이 직접 나서려는 것이었다.
공륭은 비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나는 듯이 가볍게 일봉에게 다가왔다.
그때 일봉의 왼쪽에서 청아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내가 상대해 드리지.”
공륭과 일봉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사당의 마당 한가운데 어느새 기하진이 운진자와 곤륜칠검을 이끌고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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