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 광세일소_한추영 - 1638590
#
제156화 일봉 (8)
진국충과 개방 제자들은 일봉과 남이 일행을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에 있는 낡은 사당으로 데려갔다. 사당 앞마당에는 적게 잡아도 이삼백 명은 될 듯한 개방 제자들이 열을 맞춰 앉아 있었다. 제자들의 정면에 마련된 단상의 정중앙에는 반백의 팔(八)자 눈썹에 몸집이 뚱뚱한 늙은이가 고풍스러운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살이 쪄서 두 겹으로 접힌 턱을 보니 무공은커녕 데굴데굴 굴러다닐 것만 같았다.
공 방주는 옆에 있는 검객과 얘기 중이었는데 검객은 말쑥한 차림새로 보아 개방 제자는 아닌 듯했다.
“방주님, 아미파 제자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진국충의 말에 공 방주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국충이 현암자와 청풍 도장을 소개하자 그제야 공 방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공동파의 현암 도장과 종남파의 청풍 도장이시구려. 두 분의 존성대명은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 어서 단상 위로 오르세요. 그래, 장문인께서는 모두 평안하십니까?”
공 방주는 현암자와 청풍 도장의 손을 잡아 단상 위로 안내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부른 아미파의 두 제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진국충이 일봉과 남이를 단상 아래 한쪽 구석에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일봉은 기분이 나빴으나 남이를 생각해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현암자와 청풍 도장은 구대 문파의 장로 신분이라 자신들과는 격이 다르니 대우가 남달라도 참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 개방 제자 네 명이 들것에 실린 석추명을 데리고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일봉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객잔에서 분명히 진국충에서 나머지 일행은 몸이 불편하여 같이 갈 수 없다고 얘기했거늘 어째서 석 소협까지 데리고 왔단 말인가? 자신 몰래 의식을 잃은 환자까지 데리고 오다니 초청이 아니라 납치나 마찬가지였다.
화가 치민 일봉이 벌떡 일어서서 진국충에게 따졌다.
“의식을 잃은 환자까지 데려오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닙니까? 이딴 것이 무슨 초청이란 말이오? 개방은 사람을 이딴 식으로 초청한단 말입니까?”
사당 안에 개방 제자 수백 명이 있었지만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든 방주가 있는 자리라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따라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단상 위에서 방주가 다른 사람들과 간간히 담소를 나누는 소리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분노에 찬 일봉의 목소리는 자연히 사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수백 명 앞에서도 일봉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남이에게 말했다.
“사저, 이렇게 무도한 자들 속에 우리 아미파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만 가시지요.”
입문순서로 보면 일봉이 남이의 사제이기는 하나 나이로 보면 일봉은 남이의 큰 오라버니뻘이었고 이제는 무공 실력도 일봉이 훨씬 뛰어났다. 게다가 남이는 마음이 여린 편이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싫은 소리를 대놓고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큰일을 앞두고는 자연히 남이가 일봉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봉이 석추명이 누워있는 들것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개방 제자 네 명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 앞을 막아섰다.
“무엄하구나.”
일봉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네 명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공 방주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 외쳤다.
“환자를 몰래 납치한 주제에 명문정파라는 소리를 듣고 싶소이까?”
그 말에 화가 난 개방 제자들이 허리춤에 찔러놓은 죽봉을 꺼내 일제히 일봉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일봉이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검을 떨치자 개방 제자 네 명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일봉의 앞을 막아선 제자는 모두 오결 제자로 무공수위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네 명이 한 명을 공격하다가 나가떨어져 버렸으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게다가 방주와 방도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했으니 개방 제자들은 부끄럽고 화가나 목덜미가 금세 달아올랐다. 나가떨어진 오결 제자 네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 일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공 방주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일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귀하도 아미파요? 내 아미파에 남자 제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거늘....”
그러자 옆에 있던 현암자가 얼른 설명해주었다.
“요혜신니께서 죽기 직전에 문규까지 바꿔가며 거둬들인 제자지요. 원래는 천린상단 임 장주의 여식을 호위하던 무사였습니다.”
그러자 공 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데 귀하는 어찌하여 남의 방회에 와서 이렇듯 소란을 부리는 것이오?”
공 방주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마치 일봉이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와서 남의 행사를 훼방한다는 식의 말투였다.
일봉이 어금니를 깨물며 공 방주를 노려보았다.
“남의 방회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잘 되었군요.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일봉이 다시 석추명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단상 위에 있던 검객이 석추명을 보더니 눈빛을 빛내며 공 방주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공 방주가 석추명을 바라보며 수상한 미소를 띠었다.
“잠깐만. 거기 정신을 잃은 사람이 마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이 맞소?”
공 방주의 말에 일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분은 한때 그런 직책도 있었으나 지금은 화산신검으로서 정도련에서 중대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때 공 방주의 옆에 있던 청년 검객이 일어나서 말했다.
“화산신검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화산신검은 대대로 화산파의 제자들만 되었는데 마교의 대주가 어떻게 화산신검이 된단 말입니까?”
청년 검객은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했으나 가끔 번뜩이는 눈빛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귀하는 뉘신 데 그런 말씀을 하시오?”
일봉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공 방주가 껄껄 웃으며 소개했다.
“이분은 화산파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화산십수 중의 한 분인 선우호 소협이오. 이제는 모두 돌아가시고 두 사람만 남았으니 화산이수라고 해야겠군. 화산파가 비록 마교의 공격에 멸문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선우 소협을 비롯한 화산십수의 활약으로 다행히 명맥이 사라지지는 않았소. 우리 개방은 화산파가 재기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선우호는 공 방주에게 포권을 취한 뒤, 다시 석추명을 지목하며 말했다.
“저자가 화산파의 비밀 수련장소인 검동으로 잠입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교묘한 말로 태상장로님을 속여 심결을 얻은 뒤 비천검을 탈취해 나갔지요. 그러니 방주님께서 저희 화산파가 본파의 신물인 비천검을 회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화산파라면 응당 석추명을 반길 줄 알았는데 저자는 자칭 화산십수 가운데 한 명이라면서 석추명을 도둑놈 취급하고 있었다. 자연히 선우호를 바라보는 일봉의 눈길이 고울 리가 없었다.
일봉은 선우호와 석추명의 관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석추명은 성격상 검동 안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봉은 석추명이 화산신검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간 석추명이 보여주었던 무공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일봉은 자신이 오해하여 석추명에게 검상을 입힌 사실을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석추명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겪어왔으면서도 내가 왜 그랬을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진심을 믿는 것일 텐데 사람의 진심보다 왜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나 증거를 더 믿으려고 했을까?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아무리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그 사람의 진심을 믿어야 했다.
설령 생각지도 못한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믿는다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 사람임을 안다면, 겉으로 드러난 반대 정황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야 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귀하께서 진정 화산십수 중의 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석 소협이 화산신검인 것은 정도련에 몸담고 계신 모든 분이 증언해 주실 것이오. 안 그렇습니까, 현암 도장님, 청풍 도장님?”
일봉의 질문을 받은 현암자와 청풍 도장이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글쎄 그것이.... 석 소협은 사실 요혜신니를 죽인 흉수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고.... 해서 과연 석 소협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지....”
두 도장의 뜨뜻미지근한 말에 일봉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것은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저희 사부님을 죽인 흉수는 음양사자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흉수는 귀면쌍살과 관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청풍 도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자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자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네. 흉수가 음양사자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지 않으냐 말이야.”
“그래. 석 소협이 흑련교 부교주로 밝혀진 이상, 석 소협과 관련된 것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보아야 하네. 이래서 나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거늘....”
현암자마저 석추명에 등을 올리자 분노로 끓어오르던 일봉의 눈빛이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좋습니다. 저희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뜻이 서로 다르니 가는 길도 서로 달라야지요.”
일봉이 두 도장을 쏘아본 뒤 성큼성큼 걸어 석추명을 둘러멨다.
그리고 석추명의 무기인 비천검을 집어 들려는 찰나, 단상 위에 있던 선우호가 질풍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화산십수 중의 한 명이라고 하더니 과연 허공을 걷는 경공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 검은 화산파의 보물이니 두고 가시오.”
선우호가 검을 빼 들고 일봉의 퇴로를 차단했다. 공 방주는 화산십수의 솜씨를 볼 기회가 생겨서인지 오히려 미소를 띠며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럴 수 없소. 이 검은 화산신검의 증표. 당연히 석 소협과 함께 가야만 하오.”
“아미파 제자라고 하더니 왜 그렇게 마교 대주를 싸고도는 게요?”
“석 소협이 마교 대주가 아니라 화산신검인 것은 귀하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오. 그러니 말조심하시오.”
일봉이 서늘한 목소리로 선우호를 쳐다보았다. 눈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스쳐 갔다.
직접 보기라도 한 듯 확신에 찬 일봉의 말에 선우호는 자신도 모르게 뜨끔했다. 하지만 아미파 애송이에게 이대로 비천검을 내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아미파의 고명하신 검법 솜씨를 한 수 배워야겠소이다.”
선우호의 말에 공 방주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것 좋은 생각이오. 마침 이 자리는 우리 개방 제자들이 서로 무공 기량을 겨루는 자리이오. 그런 만큼 두 분이 먼저 기량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 심판은 내가 공정히 봐 주겠소이다. 껄껄껄.”
일봉이 웃고 있는 공 방주를 힐끗 쳐다고는 들쳐 멘 석추명을 남이에게 넘겼다.
“좋소. 덤비시오.”
일봉이 단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보문검을 쳐들었다. 바로 아미복마검의 기수식이었다.
선우호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현란한 솜씨로 허공에 순식간에 대여섯 송이의 매화를 그려냈다. 개방의 방주와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솜씨를 한껏 뽐내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선우호가 일봉의 주위에 수십 개의 매화 꽃송이를 그려내는 동안 일봉은 꼼짝하지 않고 선우호의 두 눈만 응시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현란했으나 선우호의 검법은 일봉이 날마다 대련했던 석추명의 검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검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선우호는 일봉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자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화려한 검술에 일봉이 놀라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빙글빙글 돌며 허공에 검화를 그리던 선우호의 검이 돌연 일봉에게 쭉 뻗어왔다. 화려한 꽃송이에 숨은 비수와 같은 공격이라 꽃송이에만 정신을 빼앗겼다면 절대 막아낼 수 없는 수였다.
하지만 선우호의 검이 일봉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일봉의 검이 먼저 선우호의 복부를 찔러 들어왔다. 분명히 선우호 자신이 먼저 공격했거늘 어째서 자신보다 늦게 출수한 일봉의 검이 먼저 도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봉의 검이 자신의 복부를 관통하려는 순간, 선우호는 다급하게 자신의 검을 돌려 복부를 막았다.
"윽!"
하지만 검이 부딪히는 순간, 선우호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손목이 부러진 듯 시큰거리며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미 중검(重劍)의 위력이었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선우호의 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검을 놓친 선우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화산십수라고 기고만장해하다가 아미파의 막내 제자에게 졌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화산십수도 별 볼 일 없구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 선우 소협,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 개방이 자네의 비천검을 찾아주겠네.”
공 방주가 염려하지 말라는 듯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진국충, 저 검을 네가 되찾아 오너라.”
“예, 방주님.”
진국충이 방주에게 포권을 취했다.
“개방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방주가 웃으며 말했지만 말의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일봉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철죽봉을 들고 다가오는 진국충을 바라보았다. 아까 객잔에서 한 수 교환했지만 절대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는 적의 소굴. 어디를 둘러 봐도 개방 제자들이 우글거렸다. 개방 제자들이 소리 내어 응원하는 통에 진국충은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일봉의 처지는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조각배나 마찬가지였다. 수백 명의 개방 제자들이 자신을 잡겠다고 모조리 덤벼들어도 도와줄 사람은 어린 남이 사저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기죽을 수는 없다. 스승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더욱 큰소리로 상대방을 호통치셨으리라.
아미파의 명예가 자신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일봉이 검에 공력을 불어넣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듯 검 전체에서 푸른 검기가 콰르릉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진국충을 환호하며 지켜보던 개방제자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진국충의 철죽봉이 스르르 휘는가 싶더니 교묘한 각도로 일봉의 다리를 휩쓸어 왔다. 개방의 2대 무공 중 하나인 타구봉법(打狗棒法)이었다. 실수로라도 한 대 맞는다면 다리뼈가 당장 부러져 나갈 것만 같았다.
번개같이 철죽봉을 피한 일봉의 손에서 드디어 아미복마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스승 요혜신니의 목숨과도 바꾼 검법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휙휙 하고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웅웅, 검명이 울렸다.
남이는 일봉 사제의 손에서 펼쳐지는 아미복마검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검법의 엄정함과 위력만 놓고 보면 스승이 다시 나타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 방주의 적전제자인 진국충의 무공도 그에 못지않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수십 초식을 겨루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일봉의 보검과 부딪힐 때마다 진국충의 무쇠 죽봉 표면에 무수한 홈이 패였다. 개방방주 공륭의 얼굴에는 어느새 아까와 같은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수 겨루지 않아 당연히 비천검을 가져오리라 생각했던 진국충은 싸울수록 점점 더 패색이 짙어졌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방주 공륭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륭은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제자들이 잘했건 잘못했건 다른 문파에게 당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약 누가 모르고 개방 제자들을 혼내면 반드시 고수를 파견하여 당한 것보다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열 배까지 반드시 갚도록 했다. 개방 제자가 팔 하나를 잃으면 상대방은 팔 두 쪽을 다 베어내고, 개방 제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 저쪽은 열 명이 죽어 나갔다.
공륭이 제자들을 시켜 아미파 제자들을 잡아 오게 한 것은 사실 20여 년 전에 축출된 장로 당두걸과 관련이 있었다. 당두걸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당연히 방규에 따라 징계해야 할 일이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미파가 본 방파의 장로 팔을 자른 것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방주가 되기 전, 당두걸과 각별한 사이였던 공륭은 방주가 된 이후 아미파에 복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개방 제자들의 승급을 결정하는 비무 대회가 열리는 이곳에 아미파 제자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잡아 오라고 이른 것이었다.
일봉이 아비복마검의 마지막 절초, 상우도하(上牛渡河)를 펼쳐내자 진국충은 눈앞이 어지러워 그만 가슴에 커다란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일봉은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베고 싶었으나 상대방의 목숨을 뺏을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가슴 부위의 옷자락만 길게 갈랐다.
진국충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 방주의 입에서 노성이 튀어나왔다.
“노 장로와 각 장로는 당장 저놈에게 본 방의 무서움을 보여주도록 하라!”
다른 문파에서 온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주가 이 대 일의 싸움을 명하자 개방 제자들마저 아연실색했다. 아미파의 애송이 검객을 상대로 개방의 장로 두 사람이 나서다니, 이 싸움은 이겨도 두고두고 강호인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