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 광세일소_한추영 - 1636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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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일봉 (7)
일봉은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왔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남이가 10여 명의 개방 제자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싸움이 지나간 듯 객잔 안은 탁자가 뒤집히고 그릇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객잔 밖에도 수십 명의 개방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객잔 주인은 제발 밖으로 나가서 싸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객잔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름다운 처자와 냄새나는 거지 10여 명이 싸우는 광경이 흥미로운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구경 중이었다.
“개방이 언제부터 이렇게 다수로 소수를 괴롭혔소이까? 게다가 우리는 아미파, 공동파, 종남파로 개방과는 형제 문파들인데 왜 우리를 이렇게 핍박한단 말이오?”
현암자가 소리 높여 개방 제자들을 꾸짖고 있었다.
“아 글쎄 공동파는 빠지라니까 그러시네.”
남이와 현암자를 둘러싼 거지 중에서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빈정거렸다. 마흔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허리를 묶은 매듭의 수가 다섯 개였다. 매듭 수가 여섯 개인 육결 제자가 분타주급이니 오결 제자라면 개방에서 지위가 낮은 편은 아니었다.
“뭐라고? 송 장로를 당장 불러오시오. 내 한번 따져봐야겠소이다. 그래 언제부터 개방이 이렇게 막 나갔는지 말이오.”
송 장로는 개방의 수석 장로였다. 현암자는 자신이 송 장로와 친한 사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과시하면 이들이 순순히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송 장로는 아까부터 왜 자꾸 찾으시오? 우리는 아미파에만 볼일이 있을 뿐, 공동파나 저기 종남파 분께는 아무런 볼일이 없다고 하지 않소. 말귀를 이렇게 몰라 처먹어서야, 원.”
그 말에 현암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개방의 오결 제자쯤이야 눈 감고도 혼쭐을 내줄 수 있지만, 아직 내상이 다 회복되지 않아 입으로밖에 싸울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공동파 장로 현암 도장이 맞는지 우리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보아하니 무공 실력도 별로인 듯한데....”
오결 제자가 한쪽 눈으로 현암자를 흘겨보며 다시 빈정거렸다.
“뭣이라!”
평소 침착하기로 유명한 현암자가 불같이 화를 내다가 순간 비틀거렸다. 내상이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흥분하여 현기증을 느낀 것이다.
일봉이 얼른 가서 현암자를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현암 도장님, 고정하십시오.”
일봉이 남이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개방 제자들 앞에 가서 섰다.
“개방의 형제분들께서 아미파에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오결 제자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나섰다.
“우리는 아미파에만 볼일이 있다니까 네놈은 또 뭐냐? 이 처자의 기둥서방이라도 되느냐?”
개방 제자라고는 하나 원래 빌어먹던 사람들이라 입담이 저속하고 천박했다. 5결 제자의 말에 주위에 서 있던 개방 제자들이 재밌다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남이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는가 싶더니 휙 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검이 한 차례 원을 그렸다. 그러자 남이를 둘러싼 10여 명의 개방 제자들이 들고 있는 대나무 지팡이가 모조리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더러운 거지 놈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늘 온순한 모습만 보이던 평소와 달리 남이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개방 제자들은 자신들의 타구봉이 반 토막이 나자 일제히 남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면서 다들 입으로 싸우는지 열 명이 제각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네년이 감히 개방을 업신여기느냐? 아미파야말로 냄새나는 비구니 소굴이지.”
“이참에 기둥서방을 바꿔보는 것은 어떠하냐?”
“출가하기 전에 사내 맛은 꼭 보고 출가하여라.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게야. 흐흐흐.”
개방 제자들의 입에서 온갖 추잡한 소리가 다 나오자 남이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봉은 도와줄까 하다가 오히려 남이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일부러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런 놈들은 남이 사저가 직접 혼쭐을 내주고 싶으리라.
과연 남이를 공격하던 10명 중 일곱 명은 발길질과 손찌검에 맞아 바닥으로 나뒹굴고 세 명은 팔을 베여 피가 철철 흘렀다. 그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남이를 응원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물러들 나라! 아미파 분들을 고이 모셔오라 했거늘 어찌 이렇게 소란을 부리는 게야.”
돌연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객잔 앞에 모여 있던 개방 제자들을 헤치고 누군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개방 제자치고는 옷차림이 말쑥한 편이었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러자 양옆에 서 있던 개방 제자들이 일제히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였다.
일봉이 보니 사내의 허리춤을 묶은 매듭이 총 일곱 개였다. 칠결이면 장로 바로 아래 직급이 아닌가. 개방에서도 위치가 상당히 높을 것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거한이 들고 있는 타구봉은 일반 제자들처럼 대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검은빛이 도는 쇠로 만든 죽봉이었다.
철죽봉은 장로들의 신물로 알고 있는데 저 사람이 어째서 철죽봉을 들고 있는 것일까?
“본인은 개방의 무공교두를 맡고 있는 진국충이라 하오. 본 방의 방주님께서 여기 계신 아미파 분들을 모셔오라는 명을 내렸소이다.”
진국충이라는 소개에 현암자가 깜짝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귀하가 개세걸개(蓋世傑丐)라는 칭호를 가진 개방의 소방주라는 말씀이시오?”
“과분한 칭호이외다. 그러시는 도장께서는 누구신지?”
“빈도는 공동의 현암이라 하오.”
“아, 공동파 팔대 장로 중의 한 분이신 현암 도장이셨군요.”
진국충과 현암이 서로 점잖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일봉의 눈에는 그 모습이 아니꼽기만 했다.
“개방의 방주가 언제부터 아미파 제자에게 함부로 오라 가라 한단 말입니까? 개방 방주가 아미파 장문인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현암자와 인사를 나누는 진국충을 쏘아보며 일봉이 한마디 했다. 이 정도로 말한 것도 나름 많이 참은 편이었다. 남이는 아까 개방 제자들에게 들은 말 때문에 아직도 안색이 창백했다.
일봉의 말에 진국충이 일봉을 잠시 바라보았다. 일봉도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쏘아 보았다.
진국충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현암자가 일봉을 나무랐다.
“어허, 이 사람. 아무리 호위무사 출신이라도 그렇지, 어찌 이렇게 강호 시세(時勢)에 어두울 수가 있는가? 이분은 개방 공 방주의 하나뿐인 제자이자 개방의 소방주이시네. 결례하지 말게나.”
조금 전까지 개방 제자들을 꾸짖던 현암자가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개방의 소방주라는 직책이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소 방주시라니 더욱 잘됐군요. 마침 귀 방의 제자들이 본파의 제자를 저속하고 더러운 말로 모욕했으니 먼저 그에 합당한 징계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봉이 진국충의 두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우리 아미파는 방주의 부름에 응할 생각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일봉이 진국충에게 등을 보이며 남이에게 말했다.
“사저, 그만 안으로 드시지요.”
그때 일봉의 등 뒤로 진국충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 방의 방주께서 명을 내리신 이상, 누구도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소.”
일봉이 몸을 돌려 다시 진국충을 바라보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진국충은 예를 차리는 척하면서 사실 싸움을 걸고 있었다.
진국충이 일봉을 바라보며 입가에 조소를 떠올렸다. 진국충의 눈빛은 마치 ‘네까짓 놈이 어쩔 테냐?’하고 말하는 듯했다. 개방의 무공교두라고 하더니 추운 겨울인데도 근육을 자랑할 셈인지 소매 없는 상의를 입어 두 팔을 훤히 내놓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면 어디 한 번 데려가 보시지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일봉의 입에서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진국충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철죽봉을 들어 곧장 일봉의 가슴을 찔러왔다. 철로 만든 죽봉이지만 대나무로 만든 것처럼 탄성이 있어서 진국충이 손을 떨친다 싶은 순간 벌써 일봉의 가슴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봉도 이제 예전의 일봉이 아니었다. 진국충의 어깨가 움찔한다 싶은 순간 일봉이 보문검을 검집째 들어 올렸다.
쨍!
진국충의 철죽봉이 일봉의 가슴 한가운데 있는 거궐혈을 정확히 겨냥했고, 일봉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죽봉을 막아냈다.
두 사람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어허, 이거 왜들 이러시나. 일봉 소협, 공 방주는 소림사의 방장 어른 같은 강호의 대선배시네. 공 방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정도련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그러니 진 소방주를 따라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
현암자가 일봉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일봉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는 철죽봉을 떨쳐내며 말했다.
“현암 도장께서 그렇게 그분을 뵙고 싶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아미파는 관심이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일봉의 차가운 말에 현암자가 난처한 기색으로 진국충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남이에게 말했다.
“남 소저, 자네가 그래도 사문의 선배이니 일봉 소협을 한 번 설득해 보게. 원, 사람이 저렇게 고집불통이어서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현암자가 일봉을 흘깃 쳐다보며 혀를 찼다.
남이는 일봉이 개방의 소방주라는 자에게 전혀 기죽지 않아서 속으로 무척 뿌듯했다. 하지만 현암자의 말마따나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스승인 요혜신니의 복수 때문이었다.
이런 마당에 자신이 개방 제자들에게 몇 마디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구대 문파 장로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문파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 같았다. 게다가 이제는 자신들을 보호해 주실 스승님도 계시지 않았다. 문득 요혜신니의 꼬장꼬장한 목소리와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일봉 사제, 현암 도장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니 한번 가보기로 해요.”
남이의 말에 일봉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남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었다.
“사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진국충이 가소롭다는 듯 일봉을 쳐다보더니 현암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아미파 분들만 가실 게 아니라 다섯 분 모두 같이 가시지요.”
진국충의 말이 기쁜 듯 현암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그거 좋겠네. 나도 진즉부터 귀 방의 공 방주를 한번 뵙고 싶었다네. 어서 가세나. 청풍 도장은 내가 깨움세.”
그러나 일봉은 진국충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객잔에 앉아서 식사를 한 사람은 네 사람뿐이었는데 진국충은 다섯 명을 초청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의식을 잃고 앓아누운 석추명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자신들을 언제부터 지켜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개방의 방주라는 사람은 왜 자신들을 부른 것일까?
일봉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남이가 걱정할까 봐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일도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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