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 광세일소_한추영 - 163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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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일봉 (5)
대불각사 여래전 앞마당에 음양사자가 뒷짐을 진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폐허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절 앞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음양사자가 여래전 지붕 끝에는 걸린 보름달의 위치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음양사자가 서 있는 곳에서 백여 척 떨어진 어두운 수풀 속과 전각 뒤, 담벼락 아래에는 기하진과 일봉, 현암자, 운진자, 청풍도장이 숨을 잔뜩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척을 지우고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행여나 음양사자에게 발각될까 봐 100여 척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음양사자가 지루한 듯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부터 숨어있던 일봉은 음양사자가 나타나자 음양사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스승을 죽인 원수를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일은 고역이었다. 얼마나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던지 양쪽 눈알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기하진에게 붙잡혔다. 기하진은 일봉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직 안 된다’는 엄한 눈빛을 거듭 보냈다. 일봉은 이를 악다물며 당장 달려나가 음양사자를 베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문득 바람이 펄럭인다 싶더니 여래전 지붕 위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뒤편의 커다란 만월을 배경으로 지붕 위에 서 있는 검은 인영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무슨 볼일이 남았다고 여기까지 온 게냐?”
음양사자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내공이 깃든 소리는 백여 척이 떨어진 기하진 일행의 귓전까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으하하하, 아무리 독자노선을 걷기로 했다고 하나 한때 동료에게 너무 차가우신 것 아니오?”
검은 인영이 껄껄 웃으며 음양사자 쪽으로 뛰어내렸다. 커다란 장포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한 마리의 거대한 박쥐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귀면쌍살, 네놈이 여기는 왜...?’
기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래전 지붕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귀면쌍살 석문이었다.
“기다리던 자가 아니라서 실망하신 게요?”
귀면쌍살이 능글맞게 웃었다.
“네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감히 내 앞에서 잡소리를 지껄이다니.”
음양사자가 냉기가 풀풀 날리며 성큼 다가서자 귀면쌍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이쿠, 고정하시지요. 차라리 잠자는 범의 코털을 뽑지 내가 미천한 재주로 감히 사자(使者)의 화를 돋울 이유가 있겠소이까? 오늘 온 것은 다름 아닌 맹주님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사람들은 천하의 귀면쌍살도 음양사자는 두려워하는구나 싶어서 간담이 서늘했다.
“무슨 일이냐?”
“맹주님께서, 글쎄.... 사자가 조금만 더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셨소이다.”
“나는 할 만큼 했다.”
“아 글쎄, 맹주님께서―”
“맹주에게 전해라.”
음양사자가 귀면쌍살의 말을 잘랐다. 뒷짐을 진 음양사자의 눈길에는 보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오만함이 응고되어 있었다.
“그동안 남무궁의 눈길에서 숨겨준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아무런 조건 없이 맹주를 섬기면서 그 은혜는 다 갚은 것 같다고 말이다.”
숨어서 음양사자의 말을 듣던 기하진은 맹주와 음양사자의 관계를 이제야 대충 알 수 있었다.
‘흑련교의 교주였던 음양사자가 남무궁과의 싸움에서 져서 맹주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제는 다시 세를 회복해서 남무궁과 한바탕 싸워 보려는 것이겠지.’
“이거 섭섭하외다. 20여 년 쌓아온 정을 이렇게 단칼에 자르려 하시다니요.”
“시끄럽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가봐.”
하지만 귀면쌍살은 자리를 뜨기는커녕 섬뜩한 목소리로 냉소를 지었다.
“흐흐흐,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이렇게 쥐새끼들을 키우신 게요?”
귀면쌍살이 기하진과 일봉이 숨어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뿔싸! 발각된 것인가? 음양사자 한 사람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귀면쌍살까지 같이 있으니 오늘은 날을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듯했다.
기하진은 귀면쌍살과 음양사자가 움직이기 전에 철수하자는 신호를 전각 뒤와 담벼락 아래 숨은 현암자, 운진자, 청풍 도장에게 보냈다. 일단 전속력으로 후퇴했다가 다음에 다시 기회를 노리는 게 나았다. 기회가 다시 올 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일봉이 음양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음양사자, 이 살인마야!”
일봉의 신형이 쐐액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사자를 귀찮게 하는 쥐새끼 한 마리쯤은 내가 잡아드리리다.”
일봉이 음양사자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음양사자보다 몇 걸음 더 가까이 있던 귀면쌍살이 일봉을 잡으려 두 손을 뻗었다.
“안돼!”
기하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기왕 발각된 바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전면전이었다.
기하진이 일봉의 뒤를 쫓아갔다. 그와 동시에 숨어있던 현암자와 청풍도장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운진자는 곤륜칠검과 함께 어두운 담벼락 아래에서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나타났다.
귀면쌍살의 손이 일봉을 붙잡으려는 순간, 서너 걸음 뒤에 있던 음양사자가 어느새 불쑥 나타나 일봉을 낚아챘다.
하지만 일봉도 옛날의 일봉이 아니었다. 음양사자의 갈고리 손이 다가온다 싶자 일봉은 스승의 유물인 보문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검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치는 듯 강맹한 검기가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네놈은 누구냐?”
일봉의 무공이 생각보다 놀랍자 음양사자가 눈을 부라리며 일봉에게 물었다. 그러자 일봉이 더욱 사납게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네놈 손에 돌아가신 요혜신니의 복수를 하러 온 사람이다.”
음양사자는 일봉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의아한 듯 되물었다.
“요혜신니가 내 손에 죽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일봉은 음양사자가 발뺌한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한 짓을 네가 모르느냐!”
파지직. 보문검에서 검기가 뻗어 나가더니 음양사자가 방금 서 있던 땅을 때렸다.
콰쾅! 순식간에 땅이 패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하하, 사자. 요혜신니는 또 언제 손을 보셨소이까? 맹주님께서 정말 좋아하시겠소.”
귀면쌍살이 능글맞게 웃으며 일봉의 분기를 돋웠다.
“아이고, 쥐새끼들이 많이도 숨어있었구려. 제가 좀 더 도와드리리다.”
귀면쌍살이 손바닥을 훌러덩 뒤집으며 현암자와 청풍 도장을 향해 번개같이 두 손을 뻗어냈다. 그 순간, 집채같은 파도가 넘실대듯 엄청난 기류가 두 사람을 덮쳐왔다.
현암자와 청풍 도장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쌍장을 뻗어 귀면쌍살의 장력을 받아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귀면쌍살의 장풍에 태풍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뒤로 2-30여 척이나 날아가더니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입가에서는 뜨끈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일봉을 도와 음양사자를 공격하던 기하진은 그 광경에 놀라 즉시 몸을 돌려 귀면쌍살을 향해 천룡파천장을 펼쳐냈다.
“네놈 상대는 여기 있다. 귀면쌍살!”
쿠르릉 쾅.
우렛소리와 함께 폭풍우 같은 기세가 귀면쌍살을 덮쳐갔다. 그러자 귀면쌍살도 지지 않고 휘파람을 불며 철산장을 펼쳤다.
펑! 거대한 산과 같은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히자 수십 개의 화약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났다. 귀면쌍살과 기하진은 동시에 두어 발자국씩 물러났다. 두 사람의 공력은 서로 막상막하. 다만, 기하진의 내력은 귀면쌍살보다 좀 더 정순하고 깊이가 있었고, 귀면쌍살은 수많은 실전을 거쳤기에 임기응변과 변칙에 능했다.
기하진이 귀면쌍살을 상대하는 사이,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검광을 뿌리며 일봉을 도와 음양사자를 공격했다.
“흥! 버러지 같은 것들.”
음양사자가 발을 번쩍 들어 여래전 앞마당의 청석판을 내리쳤다.
쿵!
커다란 청석판들이 음양사자의 발길질 한 번에 ‘쩌억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청석판 파편이 공중으로 떠올라 운진자와 곤륜칠검을 향해 날아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운진자와 곤륜칠검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황급히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청석판 파편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네놈은 조금 뒤에 다시 손봐 주마.”
음양사자가 일봉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음양사자의 독문무공 귀연신공이 펼쳐진 것이다.
사람의 몸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자 일봉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음양사자를 찾는데, 음양사자는 어느새 곤륜칠검의 등 뒤에 홀연히 나타나더니 손을 뻗어 한 명씩 붙잡고 뒤로 던지기 시작했다.
다급한 곤륜칠검이 검을 휘둘러 음양사자의 귀조수를 피하려 했으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음양사자의 눈부신 보법을 피할 길이 없었다.
휙. 휙. 휙.
차 한 모금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운진자와 곤륜칠검은 음양사자의 손에 맥문이 눌린 채 담벼락으로 패대기쳐졌다.
그렇게 방해꾼을 제거한 음양사자가 일봉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러자 옆에서 기하진과 장력을 겨루던 귀면쌍살이 참견하며 또다시 일봉의 화를 돋웠다.
“사자께서 그 요망한 늙은이를 결딴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오. 나도 그 늙은이 꼬장꼬장 모습이 예전부터 보기 싫었소이다. 그나저나 언제 그 먼 거리를 달려가 냄새나는 아미파 장문인을 처치했단 말이오. 정말 대단하시오. 하하하.”
귀면쌍살의 말을 듣던 일봉은 분기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네놈이 저질러 놓고도 계속 발뺌할 셈이냐? 오냐, 내 오늘 죽더라도 네놈 몸에 반드시 칼침을 넣고야 말겠다.”
보문검의 검날이 일봉의 분노를 대변하는 듯 파르르 떨렸다. 거친 움직임에 일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독기 오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시퍼런 불꽃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음양사자는 헛소리를 하는 귀면쌍살을 한번 흘겨본 다음 일봉에게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에게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까?”
음양사자가 허공을 격하고 허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누가 잡아당기듯 보문검이 일봉의 손에 튕겨 올랐다.
“헉!”
경악에 찬 신음소리가 일봉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음양사자의 허연 귀조수가 일봉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잘 가거라. 애송아.”
“안돼!”
귀면쌍살을 상대하던 기하진이 다급한 나머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격공탄지(隔空彈指)를 연거푸 서너 번이나 발출했다. 기하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기의 구체가 탄환처럼 발사되어 음양사자를 공격했다.
격공탄지는 공력의 소모가 크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수법이라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잘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귀면쌍살 같은 대적을 코앞에 두고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수법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귀면쌍살이 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기하진이 격공탄지를 발출하는 순간, 귀면쌍살의 손바닥이 번개같이 기하진의 등을 강타했다. 기하진은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어 한 모금 진기를 머금고 그냥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퍽! 소리와 함께 기하진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으나 귀면쌍살의 장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이 호로 잡놈의 새끼를 오늘에야 끝장내겠구나.”
귀면쌍살이 육두문자를 지껄이며 기하진을 끝장내려고 다시 한번 쌍장을 치켜들었다.
“석문, 썩 물러서지 못할까.”
음양사자가 귀면쌍살에게 호통을 치며 소맷자락을 떨쳤다. 그러자 쓰러질 듯 휘청거리던 기하진의 몸이 대번에 바람에 말려 올라가더니 음양사자 앞으로 얌전히 떨어졌다.
귀면쌍살은 기하진을 없앨 절호의 기회를 날리자 아쉬운 나머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네놈 명 한번 길구나. 사자께서 네놈을 싸고돌 줄이야.”
“사자께서 물러나라고 하시니 물러나야지요.”
귀면쌍살은 여전히 아쉬운 듯 눈빛을 번뜩이며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일봉은 보문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린 채 계속 음양사자를 노려보았다. 음양사자를 잡겠다고 왔던 정도련 고수들이 어느새 모두 크게 다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
머리칼이 이마에서 흩날리며 그 사이로 태연자약하게 서 있는 음양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오늘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저 스승님의 원수를 갚고 싶었을 뿐. 하지만 도와줄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자기 혼자 음양사자를 대적하기는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아미신공을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력의 운용이 부자연스러웠고 충분한 수련을 거치지 못한 탓에 검법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상대방은 강호 최고의 고수. 다시 한번 맞부딪친다면 어떤 결과가 날지는 동쪽에서 해가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좋다. 그럼 네놈 소원대로 해주마.”
음양사자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일봉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드르륵. 관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음양사자의 팔이 한 자나 쑥 늘어나며 불시에 일봉의 가슴을 할퀴려 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일봉은 이대로 음양사자의 손에 죽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 선 검 한 자루가 거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왔다.
쐐액.
검은 정확히 음양사자와 일봉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부채를 펴듯 한 바퀴 촤르르 돌았다. 어검술이었다.
음양사자와 일봉 두 사람 모두 갑자기 나타난 검에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당금 무림에서 어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 두 사람이 알기로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석추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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