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53화 (153/201)

#   153 - 광세일소_한추영 - 1631318

#

제152화 일봉 (4)

삐걱. 둔중한 소리와 함께 뇌옥의 문이 열렸다.

불빛이라고는 벽에 있는 횃불이 전부인 어두운 철창 속에 우두커니 정좌하고 있던 석추명이 감았던 눈을 떴다. 등 뒤로 묶인 손이 저려왔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누군가 다가왔다.

“추명 오라버니....”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석추명을 불렀다. 석추명이 불빛을 등져 어슴푸레 보이는 여인의 윤곽선을 바라보았다. 기력이 없어서인지 여인의 모습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여인의 얼굴이 철장 밖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예린아....”

임예린은 초췌한 석추명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기하진의 말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붙잡힌 석추명은 어젯밤부터 소림사 계율원 내에 있는 뇌옥에 갇혀 있었다.

임예린은 석추명이 걱정된 나머지 공애 방장 대사에게 석추명을 보게 해달라고 특별히 면담요청을 했다. 공애 방장은 정도련 군사인 임 소저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 면담을 허락해 주었다. 딴에는 자신도 소림의 은인인 석추명을 저렇게 뇌옥에 가두어 두는 것이 불편했다.

임예린은 철창 속으로 손을 넣어 석추명의 손을 붙잡고 싶었으나 석추명의 손이 쇠사슬에 묶여있어 잡을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조금만 더 버티세요. 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신니의 흉수는 음양사자일 리가 없어요.”

“고맙구나.”

임예린이 철창 속으로 손을 넣어 석추명의 얼굴을 만졌다. 어린 시절부터 울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던 임예린의 두 눈에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라버니, 일봉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평생 처음 마음으로 승복한 스승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봐서 그래요. 요혜신니의 죽음이 계속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오라버니께 모질게 굴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잘못했다고 뉘우칠 거에요. 바른 사람이니까요.”

“안다. 내가 일봉 형님의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 일봉 형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석추명이 임예린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진이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

기하진의 손에 붙잡혔지만 석추명에게 기하진은 늘 가족 같은 동생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녀석의 쌀쌀맞은 눈빛이 오히려 그리웠다.

“하진 오라버니는 일봉과 세 분 도장과 함께 대불각사로 오늘 새벽 바로 떠났어요.”

세 분 도장이란 현암자, 운진자, 청풍도장를 가리켰다.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의 안색이 변했다.

“뭣이라고? 결국 음양사자를 잡으러 갔단 말이냐?”

“네.”

임예린이 체념하듯 말했다. 석추명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왜 말리지 않았느냐? 그들로서는 음양사자를 상대할 수 없어. 큰 낭패를 볼 거야. 음양사자가 지난번 팽가장에서 우리를 도와준 것은 사실 신교의 무리들이 음양사자와 흑련교도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어. 음양사자는 정파의 수뇌부에게 특별한 악의도 없지만 아무런 호의도 가지고 있지 않아.”

“저도 사실 지금 당장 음양사자를 공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요. 어쨌거나 정도련의 련주가 살해당했으니까요.”

“하진이의 무공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음양사자를 상대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그것은 예린이 너도 지난번에 봐서 잘 알지 않느냐? 음양사자는 이번에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큰일이다. 큰일이야.”

석추명은 마음이 조급하여 뇌옥 안을 서성이더니 갑자기 임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되겠다. 내가 나갔다 와야겠어.”

“예?”

“예린이 네가 좀 도와줄 수 없겠어?”

임예린은 잠시 당황했으나 금방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임예린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뇌옥 열쇠는 계율원 주지의 방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한번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래. 고맙구나. 가급적 오늘 밤에 풀어다오. 더 늦기 전에 가야 해.”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다른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내 검을 갖다 다오.”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련 군사의 면회라 계율원 승려가 뇌옥 안으로 따라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임예린은 자신의 직책을 오늘 밤 한 번 더 남용할 생각이었다.

**

“방장께서 저를 찾으신다고요? 오후에 뵈었는데 왜 또....”

계율원 주지 공혜대사가 이상하다는 듯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이 야심한 밤에 방장께서 자신을 다시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소림사 승려들을 놓아두고 굳이 임 소저에게 부탁했는지도 이상한 눈치였다.

“호호호, 방장 대사께서 조금 전 저와 함께 정도련의 막중대사를 얘기하다가 방장실로 돌아가면서 부탁하셨습니다. 석 소협의 일로 급한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 좀 오시랍니다.”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으나 가슴 속은 풍랑이 치는 듯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이 귀에 붙은 듯 말을 하면서도 심장 뛰는 소리에 자신의 말이 묻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혜대사는 석추명의 일이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큼 석추명의 일은 지금 소림사에서 가장 긴박한 사안 중의 하나였다.

공혜대사가 떠난 뒤 임예린은 마치 두고 간 물건이 있는 것처럼 공혜대사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공혜대사를 모시는 시자 스님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방문을 열어주었다.

아까 공혜대사와 얘기할 때 이미 방 구조를 눈여겨봐 두었던 임예린이 뇌옥의 열쇠를 서둘러 챙겨 옷소매 속에 숨겼다.

계율원 주지의 방을 나서자마자 임예린은 즉시 수풀 속에 숨겨 두었던 석추명의 비천검을 꺼내 들었다. 검은 알아볼 수 없게 천으로 칭칭 동여맨 뒤 두루마리 종이에 끼워 두었다. 임예린은 주위를 살피고는 얼른 다시 뇌옥으로 갔다.

“멈추시오. 임 소저, 어찌하여 다시 오셨소?”

뇌옥의 감독 스님이 우락부락한 눈빛으로 임예린을 막아섰다.

임예린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아까 계율원 주지의 방에서 열쇠와 함께 꺼내 온 패를 꺼내 보였다.

“석 소협에게 알아볼 것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공혜 스님의 허락을 받았고요.”

하지만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한 감독 스님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였다.

“그러면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는 무엇이오? 의심스러운 물건은 뇌옥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소.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소.”

사찰의 문을 지키는 사대천왕같이 덩치가 큰 감독 스님이 우악스러운 손을 내밀며 임예린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뺏으려 들었다.

그러자 임예린이 한쪽으로 피하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십니다! 저는 정도련의 군사를 맡은 몸입니다. 공애 방장대사와 정도련의 막중대사를 의논하고 석 소협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는데 감히 스님께서 정도련의 군사 기밀을 살펴볼 생각이십니까? 스님 때문에 정도련의 막중대사에 차질이 생기면 책임지시겠습니까?”

임예린의 호된 어조에 감독 스님은 그만 간담이 찔끔하여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자신은 얼굴도 한번 뵙기 힘든 방장대사와 정도련의 막중대사를 논한다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게다가 어쨌거나 계율원 주지의 패를 가지고 왔으니 들여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죄송하오이다, 소저. 흠흠, 저도 정도련의 막중대사를 방해할 생각은 없소이다. 어서 들어가시오.”

임예린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감독 스님에게 말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으나 또 이러시면 바로 방장대사께 한소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정도련의 기밀 업무를 수행 중이니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마세요.”

“그렇게 하리다. 방장 어르신께는 다른 말씀은 안 드렸으면 정말 감사하겠소이다.”

감독 스님은 임예린이 혹시나 방장 대사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임예린은 감독 스님을 한 번 쳐다보더니 쌩하니 뇌옥 안으로 들어갔다.

임예린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열쇠를 돌려 석추명은 감금한 뇌옥 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손목을 묶은 쇠사슬 열쇠는 찾지 못했어요. 어떡하죠?”

임예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다. 내 검을 이리 다오.”

석추명이 등 뒤로 묶인 손으로 비천검을 받더니 잠시 검에 공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저절로 검집에서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석추명의 두 팔 사이를 갈랐다.

임예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느라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쇠를 두부같이 자르는 비천검 덕분에 쇠사슬이 ‘철커덩’ 소리를 내며 갈라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석추명이 임예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달려나가는데 밖에서 종소리가 급박하게 울렸다.

댕댕댕댕.

“벌써 제 거짓이 탄로 난 것 같군요.”

임예린이 종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웃었다.

“계율원 앞에 무승들이 쫙 깔린 듯하구나.”

그럴 것이다. 공혜대사의 계율원 주지실에서 공애 방장의 방장실까지는 일각이면 도달할 거리. 지금쯤이면 공혜 대사가 계율원 번승(番僧)들을 동원하여 계율원 앞마당에 당도했을 것이다.

“오라버니 혼자서는 빠져나가실 수 있죠?”

석추명이 놀란 눈빛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떡하려고? 네가 나를 풀어준 사실을 알면 중벌을 면치 못하라 텐데.”

“호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뵈어도 제가 정도련 군사라 방장 대사님과 친하답니다. 게다가 무공도 할 줄 모르는 여인인데 소림사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떠나세요. 어서 가서 하진 오라버니와 일봉을 구해주세요.”

그 말에 석추명이 임예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따뜻한 임예린의 체온이 석추명의 손으로 전해졌다.

“그럼 다녀오마. 조심하거라.”

석추명이 비천검을 들고 무승 수십 명이 포진한 계율원 앞마당에 뛰어들었다.

석추명이 발을 딛기 무섭게 무승들의 제미곤이 거대한 풍차처럼 석추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리리릭.

하지만 석추명은 바람처럼 표홀한 신법으로 제미곤을 일일이 피한 다음, 자신의 앞에 있는 소림 승려의 어깨를 밟고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죄수가 도망친다. 잡아랏!”

경공에 자신 있는 승려들이 일제히 몸을 띄우며 석추명을 잡으러 들었지만 석추명은 그런 승려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무승들의 어깨를 몇 번 밟더니 금방 계율원 담장을 넘어갔다.

무공을 모르는 임예린의 눈에는 마치 바람이 석추명을 사뿐히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것만 같았다.

“아니, 저놈이. 뭣들 하느냐. 당장 쫓아가지 않고!”

계율원 주지 공혜대사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럴 필요 없다. 이 정도 했으면 부처님도 이해해 주실 게야.”

옆에 있던 공애 방장이 석추명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장문 사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혜대사가 두 눈을 껌벅이며 공애 방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게 있네. 이것도 모두 부처님의 뜻일세, 사제.”

공애 대사가 불호를 외우며 뇌옥 정문 앞에 서 있는 임예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