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 광세일소_한추영 - 1628862
#
제151화 일봉 (3)
높게 쌓아 올린 통나무 위에 요혜신니의 육신을 담은 나무관이 놓이고 그 위를 삼베 천이 덮었다. 일생을 무학의 대종사로 살아온 여장부였으나 죽고 나니 남은 것이라고는 거친 삼베 천 한 조각뿐이었다.
소림 방장 공애대사의 게송이 끝나자 소림사 승려와 아미파 비구니 몇 사람이 나서 통나무에 불을 붙였다.
미리 기름을 부어놓은 통나무는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일봉은 한 줌 재로 사라지는 스승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스승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소림사 방장실. 방장 공애대사의 좌우로 정도련의 수뇌부가 빙 둘러앉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원탁 위에 놓인 촛불은 바람이 없어서인지 곧게 타올랐다.
“흠....”
정도련의 임시 련주(聯主)를 맡은 공애대사가 나직한 탄식을 터뜨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요혜신니께서 이렇듯 불시에 원적(圓寂) 하셨으니 앞으로의 일이 참으로 난감하외다. 의견이 있으신 분은 기탄없이 말씀하시오.”
공애대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풍도장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지금 당장 음양사자를 찾아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신니의 복수를 해야지요.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소이다.”
청풍도장의 말에 묵묵히 듣고 있던 석추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임예린이 그런 석추명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오.”
“흉수가 음양사자임은 아미파 여제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소이다. 그런데 화산신검 석 소협이 음양사자의 오른팔이라는 주장이 나왔소. 우리 정도련 인사들 가운데 흉수와 내통하는 자가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석 소협이 혹시 요혜신니의 죽음과 관련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흉수와 내통한 죄를 물어 석 소협을 정도련에서 제명할 것을 건의 드리오.”
청풍도장의 말에 공애대사가 두 눈을 감고 묵묵히 불호를 외웠다. 석추명에게 큰 은혜를 입은 소림사의 입장으로서는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석추명 본인이 흑련신교의 부교주라고 자백한 이상, 이 일을 덮어두고 갈 수는 없었다.
잠시 이어진 정적을 깨고 임예린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오, 임 소저?”
“음양사자가 요혜신니를 살해한 동기가 불분명합니다. 만약 흉수가 정말 음양사자라면 왜 아미파 소사매들을 살려두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까요? 요혜신니를 일격에 격살할 만큼 강력한 공력의 소유자가 어린 두 소사매를 그냥 살려두었다는 것이 정말 이상합니다.”
임예린의 말에 청풍도장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마당에 쓰러졌던 소사매는 죽은 줄 알았을 것이고, 다른 한 명은 부엌문 뒤에 숨어 있으니 있는 줄 몰랐겠지요.”
그러자 임예린이 청풍도장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음양사자와 같은 절세고수가 죽이려고 작정한다면 미영 소사매가 기절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금영 소사매가 부엌 뒤에 숨어 있었지만 그 거리가 불과 십여 척밖에 되지 않습니다. 음양사자가 부엌문 뒤에 사람이 있는지 정말 몰랐을까요?”
“그것은... 흠.”
청풍도장이 다시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음양사자라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즉, 다시 생각해보면 흉수는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노출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음양사자가 여기 들러서 요혜신니를 살해하고 가니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거라,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임 소저의 말은 누군가가 일부러 음양사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는 말이오?”
공애대사가 다시 물었다.
“붉은 옷과 백발의 여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흉수가 음양사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닐까요? 붉은 옷과 백발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임 소저, 바로 그래서 우리는 흉수가 음양사자라고 확신하는 것이외다. 임 소저가 무공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러겠지만, 요혜신니의 머리에 나 있던 구멍은 음양사자의 귀조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공격이오.”
이번에는 공동파의 현암자가 임예린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 상처는 현암 도장께서도 본인 입으로 호조수나 응조수, 용조수와 같은 무공으로 난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즉, 공력이 지극히 높은 자가 그러한 무공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임예린은 목이 아픈지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음양사자의 가장 큰 특징은 노란색의 묘안과 독특한 보법인 귀연신공입니다. 하진 오라버니께서도 붉은 옷의 여인을 뒤쫓았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 여인의 얼굴을 보셨나요?”
“보지 못했소.”
여러 사람 앞이라 기하진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자가 하진 오라버니를 피해 달아날 때 귀연신공을 쓰던가요?”
임예린의 질문에 기하진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신법이 대단히 빠르기는 했으나 귀연신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뒷모습만 본 것으로 그 여인을 음양사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니겠어요?”
논리적인 임예린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음양사자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겠습니까?”
현장에 요혜신니와 함께 있던 당사자 자격으로 뒤편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일봉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임예린이 몸을 돌려 일봉을 바라보았다. 일봉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일에 반대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봉은 항상 자기편에 섰었다. 자기가 하는 말이라면 모래로 밥을 짓는다 하더라도 믿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일봉이 임예린의 말을 반박한 것이다.
“석 소협을 아끼는 아가씨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번 일은 명명백백히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석 소협이 음양사자를 불러들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음양사자가 요혜신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미리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일봉,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임예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봉을 바라보는 임예린의 눈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봉, 신니께서 운명하신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을 살인 공모자로 취급하는 게 말이 돼? 그동안 그 누구보다 석 소협을 잘 따르던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일봉과 임예린의 가시 돋친 설전을 듣던 석추명은 두 눈을 꼭 감고만 있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석 소협이 사흘 뒤 음양사자를 만나기로 되어 있으니 그때 음양사자를 잡아서 확실히 조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양사자를 잡자니, 어떻게 말이오?”
곤륜파의 운진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일봉에게 물었다.
“음양사자가 석 소협은 의심하지 않을 테니 석 소협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기회를 봐서 음양사자의 허를 찌르면 됩니다. 저희는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바로 달려나가면 제아무리 음양사자라 하더라도 우리 손에 잡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봉의 말에 석추명이 감았던 눈을 뜨고 일봉을 바라보았다. 분노에 가득찬 일봉의 눈빛이 보였다. 석추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봉 형님, 저에게 간자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석추명의 말에 일봉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왜 안됩니까? 아미파 장문인이자 정도련 련주이신 요혜신니께서 돌아가셨고 음양사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석 소협이 진정 정도련을 위한다면, 요혜신니의 죽음에 떳떳하시다면, 그쯤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이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과거에 저지른 일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저를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석 소협, 정녕 정도련을 버리고 흑련교를 따를 생각입니까? 정녕 정도(正道)를 버리고 마도(魔道)로 되돌아갈 생각입니까?”
일봉이 벌떡 일어나 석추명을 향해 소리쳤다.
“무엇이 정도고, 무엇이 마도입니까? 이렇게 상대방을 속여서 뒤통수를 치는 것은 정도입니까? 일봉 형님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석추명이 지지 않고 일봉의 말을 되받아쳤다.
일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처연한 표정을 짓던 일봉이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싸우기에는 음양사자의 무공이 너무 강합니다. 싸우다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스승님의 복수는 하지도 못하고 목숨만 헛되이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일봉의 말에 석추명은 큰 돌덩이에 가슴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문득 스승 뢰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스승의 복수를 위해 이렇게 처절하게 노력하는 것 아닌가. 남 교주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형제처럼 믿어주는 음양사자를 속이고 어떻게 뒤통수를 친단 말인가? 게다가 음양사자가 흉수라는 확증도 없지 않은가?
석추명은 잠시 묵묵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청풍 도장님의 말씀처럼 저를 정도련에서 축출하십시오. 그리고 음양사자를 잡을지 말지는 여기 계신 분들끼리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저는 관여치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안되오! 석 소협은 움직일 수 없소이다.”
청풍 도장이 바람같이 몸을 날려 석추명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석 소협은 흉수와 내통한 혐의가 있으므로 그냥 보내줄 수 없소. 오늘 일을 흉수에게 전달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이오?”
석추명이 어이가 없어 조소를 띠며 청풍도장에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렇다고 도장께서 저를 막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흥! 나 혼자 힘으로는 안 되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덤빈다면 그래도 뚫고 나갈 수 있겠소이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막아보시지요.”
석추명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청풍 도장이 대뜸 두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금나수(擒拿手)를 펼치며 석추명의 팔꿈치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석추명은 보지도 않은 채 몸을 한번 비트는 것만으로 청풍도장의 공격을 가볍게 빠져나갔다.
문 쪽으로 성큼 다가가는 석추명에게 이번에는 운진자와 현암자가 동시에 검을 찔러왔다. 곤륜파와 공동파의 검의 고수가 동시에 자신을 겨냥하자 석추명도 경시하지 못하고 대뜸 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띠딩.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두 사람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으나 여전히 석추명의 옷자락 한번 건드리지 못했다.
타닥.
석추명이 검집 끝부분으로 두 사람의 손목 부분을 슬쩍 찔렀다. 그러자 두 사람은 검을 쥔 손에 찌릿한 느낌이 들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운진자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것은 검봉점혈(劍鋒點穴)!”
“예. 바로 곤륜파의 검봉점혈법입니다. 초의공 선배님께서 쓰시는 것을 보고 좀 배웠습니다.”
석추명이 운진자의 말에 답을 하며 다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 뒤에서 미미하고 세찬 바람 소리가 동시에 나더니 좌우에서 검 두 자루가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미미한 소리를 내는 것은 무당파의 고수 허각 도장의 태극검이고, 세찬 바람 소리는 아미파의 대사저 계법사태가 휘두르는 아미복마검이었다.
계법사태는 일봉을 편애하는 스승이 원망스러운 나머지 그날 밤 스승이 있는 암자로 돌아가지 않고 산속에서 밤을 보냈다. 그다음 날도 온종일 스승을 원망하고 일봉을 질시하며 보내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음을 정리했다. 문파를 계승할 자로 스승이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따져 물을 셈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답을 해줘야 할 스승이 돌아가셨다. 게다가 장문인의 신물 보문검은 어느새 일봉의 손에 들려있었다. 계법사태는 괴로움과 참담함과 분노를 한데 모아 석추명에게 쏟아냈다. 스승을 죽인 흉수가 석추명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계법사태의 검은 한 수 한 수가 모두 살기를 띠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번쩍하고 검기를 발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허각 도장의 검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면면부단(綿綿不斷).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을 그리는 허 도장의 검은 계법사태의 위력적인 검법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석추명을 압박해왔다. 과연 무당과 아미를 곤륜과 공동보다 높이 쳐주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석추명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았다.
타당.
석추명이 자신의 장기인 혼원일기검을 검집으로 펼쳐냈다. 석추명의 검과 부딪힌 허 도장과 계법사태의 검이 동시에 부러질 듯 ‘웅’하고 진동했다. 그 진동이 어찌나 큰지 허 도장보다 공력이 낮은 계법사태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허 도장도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쳐서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고수를 물리친 석추명이 방장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공기가 일렁이더니 묵직한 기류가 세 갈래로 나뉘어서 등 뒤를 공격해왔다.
예사롭지 않은 공격에 석추명은 흠칫 놀라며 얼른 몸을 비틀며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는 사이, 석추명은 다시 문에서 멀어졌다.
타다다닥.
크게 숨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쉴 시간에 석추명은 상대방과 대여섯 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움직이며 일으키는 기류에 촛불이 크게 일렁거렸다.
이번에 석추명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기하진이었다.
“물러서라.”
석추명이 노해 기하진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가면 형님은 두 번 다시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 소리에 석추명은 검을 들어 올리다 잠시 멈칫했다. 두 번 다시 함께할 수 없다라....
기하진의 굳은 표정 뒤로 물기 어린 임예린의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인생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석추명이 나직한 한숨을 한 차례 내뱉으며 검을 던졌다.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청풍도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석추명의 혈도를 대여섯 군데나 짚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