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49화 (149/201)

#   149 - 광세일소_한추영 - 1622863

#

제148화 대리전(代理戰) (6)

음양사자가 갑자기 개입하자 팽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음양사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그때 요혜신니가 음양사자에게 두 눈을 부릅뜨며 선장을 쾅 내리쳤다.

“이 일은 우리 정도련에서 결정한 일이요. 당신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외다.”

“호호호, 정도련에서 결정했다니, 너희들이 무슨 역할을 했다고 결정을 한단 말이냐?”

음양사자가 눈빛을 번뜩이며 요혜신니에게 되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요혜신니를 비롯하여 현암자, 운진자, 곤륜칠검, 청풍도인 등이 음양사자를 향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음양사자는 못 본 척 소매를 떨치며 다시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을 풀어주라고 이미 얘기했다. 내 말을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지 말하라.”

음양사자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내 친히 알아듣게 해주마.”

순간 음양사자와 정도련 수뇌부 사이의 긴장감이 터질 듯이 고조되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입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기하진이 참다못해 결국 한마디 했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음양사자가 눈빛을 빛내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의 입에서 누구 이름이 나오든지 그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게 분명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한 사람만 말해드리지요. 여기 있는 추명 형님도 당신의 그런 억지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손을 쓰겠다면 우리 두 사람이 같이 대응하겠습니다.”

무림맹 음양각에서 임풍 부부를 구할 당시 기하진과 석추명은 힘을 합쳐 음양사자를 물리친 적이 있었다. 기하진의 말은 음양사자에게 그때 일을 상기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호호호, 석추명이 왜 너와 같이 대응한단 말이냐?”

음양사자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소리 내어 웃더니 석추명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듯이.

“그렇지 않으냐, 석추명?”

그 소리에 기하진은 부쩍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양사자와 석추명이 같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음양사자를 대하는 석추명의 태도가 뭔가 미심쩍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되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이 대답해 보세요. 같이 공격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기하진이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석추명에게 공개적으로 물었다.

“기 단주, 석 소협은 화산신검이외다. 지금까지 이미 기 단주와 힘을 합쳐 저 마녀를 상대해왔는데 굳이 다시 물어볼 필요가 뭐 있겠소?”

요혜신니가 당연한 질문을 뭐하러 또 하냐는 듯이 참견하고 나섰다.

석추명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기하진은 의문이 점점 더 커졌다.

‘뭔가 분명히 이상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가 직접 음양사자를 공격해 봐야겠다. 어차피 음양사자는 나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절대 고수. 내가 공격하면 당연히 추명 형님도 함께 손을 쓸 거야.’

“내가 먼저 공격할 테니 형님은 퇴로를 차단해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하진이 대번에 쌍장을 뒤집으면서 음양사자를 향해 천룡파천장을 전개했다. 그러자 석추명이 놀라며 음양사자를 대신해서 기하진의 공세를 받아냈다.

“잠깐만.”

기하진의 눈썹이 대번에 하늘로 추켜 올라갔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하진아, 중요한 것은 맹주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지, 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번만큼은 음양사자 선배님의 말씀을 따르자꾸나.”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석추명이 며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더니 그 새 음양사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나 싶었다.

“호호호, 들었느냐, 기하진?”

음양사자가 큰소리로 웃으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석추명의 어정쩡한 태도가 못마땅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하니 정말 음양사자와 손을 잡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하진 오라버니, 이 일은 감정적으로 처리할 것이 아닙니다. 추명 오라버니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임예린이 얼른 나섰다. 임예린은 석추명이 나타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 추측이 맞는다면 그날 밤, 석추명은 아마도 음양사자를 쫓아갔을 것이다. 음양사자가 흑련교주라니 필시 그것도 관련 있을 성싶었다. 석추명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뭔가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듯한데 그것은 나중에 넌지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목표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맹주입니다. 그러니 지금 남궁가주를 비롯하여 남궁가의 사람들을 처단한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패가 사라지는 셈이지요.”

임예린이 입을 열자 팽가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청하기 시작했다.

“지금 남궁가주를 없앤다면 맹주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남궁가주를 비롯하여 맹주의 형제들을 인질로 삼아 맹주와 담판을 짓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를 비롯한 정도련 수뇌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임 소저의 말 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임예린이 이번에는 음양사자를 바라보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양사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남궁가주와 남궁세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드리겠습니다만 지금 당장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한발 양보했으니 사자께서도 한발 양보하시지요. 그쯤이면 사자께서 주군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로 크게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음양사자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군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청풍도장이 의아한 눈초리로 임예린에게 물었다.

“음양사자 선배님은 맹주를 떠나 독자적인 활동을 할 계획을 품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음양사자가 임예린에게 되물었다.

“간단합니다. 아까 동남동녀들이 사자께서 흑련교주임을 강호에 공식 선포했으니 교주가 되어 더 이상 남의 밑에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흑련교의 독자적인 활동이란 백련교와의 교권 다툼 아니겠습니까? 보아하니 앞으로 백련교의 남 교주가 사자 때문에 많이 바빠질 듯한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예전만큼 맹주를 돕지 못하겠지요. 그만큼 맹주가 고립되는 셈이니 우리로서도 별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임예린의 말을 듣던 음양사자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무공도 못하는 여인이 어찌 저렇게 총명하단 말인가? 동남동녀들이 한 한마디 말을 듣고 자기와 남무궁의 관계를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맹주를 떠날 생각까지 꿰뚫어 보다니.

“제 생각이 틀렸나요?”

임예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흥! 어린 소저가 정말 총명하군. 하나를 듣고 열 가지를 간파하다니.”

음양사자가 몸을 날려 어느새 팽가장 담벼락 위에 우뚝 서더니 석추명을 내려다보았다.

“한 달 뒤 지난번에 봤던 곳으로 오너라.”

음양사자는 짧은 말만 남기고 곧 동남동녀들과 함께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석추명은 음양사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괴로운 듯 잠시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을 임예린과 기하진이 묵묵히 지켜보았다. 각자 다른 심정으로.

****

요혜신니 등 정도련 수뇌부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과 5대장로, 그리고 여섯 사람의 장남들을 인질로 삼아 정도련의 임시 총단격인 소림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소림사를 임시 총단으로 삼은 것은 맹주 남궁진악이 함부로 도발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북팽가를 떠날 때 가주 팽연은 정도련의 도움에 감사하며 거금을 활동자금으로 기탁했다. 아울러 말과 비상식량 등을 챙겨주며 팽가장의 일이 수습되는 대로 자신도 가문의 고수들을 이끌고 정도련에게 합류하겠노라고 밝혔다.

하북팽가를 떠난 지 삼 일째, 임예린은 말 머리를 돌려 뒤처져서 홀로 터벅터벅 오는 석추명에게 다가갔다. 석추명은 팽가장에서 만난 이후로 계속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오라버니, 근심거리라도 있으세요?”

임예린이 석추명과 나란히 말을 달리며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 이미 훨씬 앞서가고 있던 터라 주위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

석추명이 임예린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풍경이 아름답구나.”

간밤에 내린 눈으로 숲 전체가 새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쓴 듯했다.

“춥지 않으냐?”

석추명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들 같은 내공은 없지만 몸이 워낙 건강해서 이 정도 추위는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임예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건강한지는 몰랐구나.”

그러자 석추명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쌓인 눈이 무거웠는지 두 사람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눈이 갑자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로 눈 덮인 들판을 산토끼 한 마리가 깡충거리며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보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오라버니, 어릴 때 헤어진 이후로 늘 오라버니와 다시 만나기만을 바랐었는데 이렇게 오라버니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함께 가니 꼭 꿈만 같아요.”

“나도 그렇구나. 그 시절에는 그저 배만 곪지 않으면 행복했었는데....”

석추명이 말끝을 흐렸다.

“오라버니, 무슨 고민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어떤 일을 하시건, 저는 항상 오라버니 편이랍니다.”

석추명은 그 말에 마음이 뭉클하여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니 간혹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런 오라버니가 그 무시무시한 신교의 수라대주였다니 누가 믿을까요?”

임예린이 ‘푸훕’하고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석추명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 앞쪽에서 기하진이 말을 달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떨어져서 와?”

“추명 오라버니와 눈 구경하며 가고 있었어요.”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살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요 앞에 수상한 인마가 지나간 흔적이 있어. 눈에 찍힌 발자국으로 보건대 최소 수십 명이야. 녹림 패거리나 비적단일 가능성이 커.”

설랑에게 납치당한 경험 때문인지 비적단이라는 말만 나와도 질색하는 임예린이 깜짝 놀랐다.

“그래요? 얼른 가서 요혜신니와 얘기해봐야겠군요. 오라버니들, 저 먼저 갈게요.”

임예린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 앞쪽으로 말을 달려 사라졌다.

“백성들이 먹고살기 어려우니 비적단만 자꾸 더 늘어나는구나. 관(官)은 제 역할을 못 하고 맹주는 권력에 눈이 멀었으니....”

석추명이 말을 몰며 한탄했다.

“그나저나 형님, 음양사자와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예린이가 하도 눈치를 줘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내 생각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하진이 석추명과 나란히 말을 몰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상대방의 기분은 상관없이 반드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다웠다.

석추명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상했겠지. 너에게만은 얘기해 주마.”

석추명은 기하진에게 바위산 동굴에서 있었던 일과 흑련교의 임시 총단에서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흑련교의 부교주가 되었다. 아무리 그 자리를 맡지 않으려고 해도 다들 막무가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음양사자의 목적도 남무궁을 몰아내는 것이니 그때까지는 힘을 보탤 생각이다. 그리고 남무궁만 없애고 나면 나는 조용히 교를 떠날 생각이야.”

“결국 음양사자와 손을 잡은 것은 사실이었군요.”

기하진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한번 싫은 것은 죽어도 싫어하는 기하진의 성격을 아는 터라 석추명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기하진에게만이라도 사실을 얘기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흑련교의 부교주라는 사실을 정도련에서 알게 되면 모두 나를 꺼리겠지. 그렇게 되면 맹주를 몰아내는 일에 동참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이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백련교나 흑련교나 정파의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마교가 아니겠느냐?”

석추명이 다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련교는 탐관오리에게서 백성을 구제한다는 큰 뜻을 품었지만 남무궁이 교주가 되면서 사악한 패도집단으로 변절한 지 오래되었고, 흑련교는 음양사자라는 강직한 교주는 있으나 교도들이 교주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광신도 집단으로 보였다.

“예린이를 포함해서 당분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다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형님이 흑련교와 정도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오면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정도 무림의 안위를 위협한다면 내가 먼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이럇!”

기하진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얘기하더니 말을 재촉하여 혼자 앞으로 가버렸다.

석추명은 기하진의 얘기에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