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 광세일소_한추영 - 1620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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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대리전(代理戰) (4)
사내의 육환대도가 반원을 그리며 팽연을 휘몰아쳐 왔다. 도가 이르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도기(刀氣)가 섬전처럼 파지직 일었다. 팽연은 황급히 오호쌍도를 들어 올려 육환대도를 막았으나 도와 도가 맞닿는 순간 손목이 부러질 듯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힘이라면 어디 가서 져본 적이 없거늘 사내의 한 팔 힘을 두 팔로도 막기 어려웠다.
카캉.
육중한 육환대도와 맞닿은 쌍도의 칼날이 적의 무게감을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도신에 퍼지는 실낱같은 금을 보면서 팽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호쌍도와 강호를 종횡한 지 수십 년. 그동안 오호쌍도는 적의 병기를 깨부수면 부수었지 칼날 한번 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팽가의 운이 다해서인지 칼날도 버티지 못하고 제 목숨을 놓고 있었다.
팽연이 공중으로 몸을 띄우면서 그 기세로 그대로 육환대도를 발길질로 차올렸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상승 절기, 백호등약(白虎登躍)이었다. 말 그대로 백호가 사나운 기세로 튀어 올라 온산의 뭇짐승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초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 쌍도를 사선으로 그으며 사내를 공격해 들어갔다. 백호등약의 첫 번째 변초(變招)였다.
“흥!”
사내가 육환대도를 쳐올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대도를 슬쩍 튕겼다. 그러자 칼등에 달려있던 여섯 개의 강철 고리가 ‘징’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내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며 육환대도를 휘둘렀다.
챙강!
세 개의 칼이 서로 맞닿은 순간, 육환대도에서 생긴 진동이 오호쌍도로 퍼지더니 도신(刀身)에 난 금 따라 오호쌍도가 깨지고 말았다.
팽연이 잠깐 당황한 사이, 사방에 흩날리는 쇠붙이 조각을 뚫고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팽연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헉!”
사내가 반드시 장으로 공격해오리라고 생각하고 암암리에 호신강기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건만 사내의 장력은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자신의 호신강기를 무력화해버렸다.
팽연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피를 토했다. 그 모습에 팽연의 차남과 삼남, 팽숙과 팽길이 달려왔다.
“오지 마라.”
팽연이 불호령을 내리며 손을 들어 두 아들을 제지했다. 팽숙과 팽길은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고 울분에 찬 눈길로 팽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아비는, 헉헉, 괜찮다. 그러니 이쪽으로 오지 마라.”
팽연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수백 개의 비수가 몸속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팽연은 적 앞에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었다.
팽연 앞으로 남궁진환이 천천히 걸어왔다.
“이게 그대와 나의 차이다. 그대 입으로 말했듯이 오늘부로 팽가는 무림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의 모든 재산은 우리 남궁가의 재산이 될 것이고, 팽가의 식솔은 모두 남궁가의 종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목을 벨 것이다.”
팽연이 남궁진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남궁진환, 남궁가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해졌단 말이냐? 네놈이 직접 나와 겨루었어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남궁진환은 무심한 눈빛으로 팽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당신과 맞붙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겠지. 당신과 내 실력은 막상막하니까 말이야. 아니, 오히려 당신이 반 수정도 더 앞설지도 모르지.
“싸움에 가정은 없다. 오로지 결과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약조한 대로 그대의 목을 거두는 대신 그대 가족은 살려주마.”
남궁진환과 팽연이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부친에게 가려다가 자운검수들의 검에 가로막힌 팽연의 두 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은 약속인 법. 팽연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더니 남궁진환을 향해 앉았다.
“남궁척, 앞으로 나오너라.”
남궁진환이 부르는 소리에 남궁척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부친의 말을 못들은 양 꼼짝도 하지 않는 남궁척을 숙부들이 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서 나오라니까.”
남궁진환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남궁척이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앞으로 나왔다.
남궁진환이 들고 있던 검을 남궁척에게 쥐여 주었다.
“팽가의 사람들을 살리고 싶거든 네가 팽 장주의 목을 베거라.”
부친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남궁척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안됩니다. 안돼!”
팽연의 두 아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궁척.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너는 우리 형님과 동문수학한 사이가 아니더냐? 남궁척!”
팽연의 차남 팽숙이 남궁척에게 소리쳤다. 두 아들의 애끓는 소리를 듣던 팽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남궁척을 바라보았다.
남궁척이 계속 망설이자 남궁진환이 다시 한번 엄한 목소리로 일깨웠다.
“척아, 한 사람을 구하겠다고 일가족 모두를 죽일 셈이냐?”
남궁척이 떨리는 손길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남궁척의 얼굴은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정녕 이 방법밖에 없단 말인가. 정녕...!
남궁척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이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자신의 가문이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이 불의에 대해, 그리고 그 앞에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 대해 목이 터지도록 절규하고 있었다.
팽연은 측은한 눈빛으로 남궁척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장남과 동갑내기인 이 청년이 겪고 있을 고뇌와 갈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괴로워하지 말고 손을 쓰게나.”
팽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남궁척이 팽연을 쳐다보더니 검을 쳐들었다가 빠른 속도로 내리쳤다.
그러나 검 끝이 향한 사람은 팽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척아!”
남궁진환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남궁척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그때 어딘가에서 파공음을 내며 호두 한 알이 날아오더니 정확히 남궁척의 팔꿈치 바깥쪽 척택혈을 때렸다. 자신의 배로 검을 찔러 넣으려던 남궁척은 순간 팔꿈치가 시큰하며 힘이 빠져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남궁진환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남궁척의 검을 뺏었다.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강요하는 거야?”
담장 위에서 남궁척도 잘 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기하진이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하진의 모습에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곧 뒤이어 아미파의 요혜신니, 곤륜파의 운진자와 곤륜칠검, 공동파의 현암자, 종남파의 청풍도장이 담장을 뛰어넘어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 임예린이 남이와 사소혜의 도움을 받으며 담을 뛰어넘었다.
“흥! 석문, 귀면탈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여기서 남궁세가의 식객 노릇을 한단 말이더냐?”
요혜신니가 사내를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팽연은 이제 죽는 순간만 기다리다가 요혜신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놈이, 네놈이, 정녕 내 아들을 죽인 귀면쌍살이란 말인가?”
팽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만난 팽연의 눈빛이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안들 어쩔 테냐? 차라리 얼른 가서 네 아들놈이나 만나거라.”
“네 이놈!”
팽연이 석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일어나려고 몇 번이나 몸을 꿈틀거렸다.
뜻하지 않게 정체가 드러난 석문은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팽연에게 일장을 내리치려 했으나 어느새 기하진이 던진 호두 두 알이 벌써 자신의 등 뒤 사혈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하진의 가공할 내력이 실린 호두알은 이미 그 자체로 한 쌍의 유성추나 다름없었다.
“이런 제기랄.”
석문이 육두문자를 뱉어내며 황급히 몸을 돌려 호두알부터 막았다.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기하진이 쌍장을 들어 산도 무너뜨릴 기세로 석문의 가슴을 때렸다.
“귀면쌍살, 네놈은 내가 상대해주마.”
석문은 더 이상 팽연을 공격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서둘러 두 팔을 들어 올려 기하진의 쌍장을 받아냈다.
‘콰릉!’ 하고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더니 기하진과 석문이 각자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감히 어떤 자가 비무를 방해한단 말이냐? 자운검수는 훼방꾼을 막아라.”
운학 도장의 말에 자운검수 36명이 검날을 번뜩이며 요혜신니와 청풍도장 일행을 막아섰다. 그러자 임예린이 소리쳤다.
“무당파 운학 도장은 맹주의 사주를 받아 변절했으니 본 비무의 심판이 될 수 없습니다.”
“어린 계집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운학 도장이 임예린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그때 담벼락 밖에서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운학 도장을 꾸짖었다.
“운학, 네 이놈! 감히 맹주의 개가 되어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려는 게냐!”
설마! 목소리를 들은 운학 도장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사형 허각 도장이 소림사 공각대사와 함께 팽가장 담벼락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운학 도장은 허각의 얼굴을 보자 귀신이라도 본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허각 도장과 공각대사가 담벼락을 뛰어 내려오자 그 뒤를 이어 소림 72 나한이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제미곤을 들고 우르르 나타났다.
“72 나한은 팽 장주와 팽가장을 수호하라.”
“아미타불!”
공각대사의 명이 떨어지자 72 나한이 즉시 눈썹까지 올라오는 제미곤을 들고 무당 자운검수들 앞에 대치했다. 소림 나한승과 무당 자운검수는 실력으로는 막상막하였으나 나한승이 숫자에서 압도하자 자운검수는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자운검수들은 본문을 배반한 운학을 잡아들여라!”
뒤이어 허각 도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당파가 맹주의 사주를 받은 백련신교의 공격에 그토록 쉽게 허물어진 것은 안에서 내통하는 자가 있어서였다. 당시 크게 다쳐 의식을 잃었던 허각 도장은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누가 맹주의 끄나풀인지 은밀히 조사했다. 그러다가 마침 소림사의 공각대사와 연락이 되어 정도련 발족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각 도장은 무당파의 상황을 정도련에 알려 무당파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고 소림사로 달려왔다가 공각대사와 함께 팽가장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허각 도장은 비록 성격이 깐깐하기는 했으나 무공에 대한 뛰어난 식견과 공정한 처사로 무당파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로 중의 한 명이었다. 허각 도장의 말에 자운검수들이 술렁대자 운학 도장이 소리쳤다.
“허각 도장이야말로 본파의 배신자니라. 자운검수는 동요치 말고 각주인 내 명에 따르라.”
운학 도장은 자운검수들의 최고 직속 상관인 자운각주(紫雲閣主)였다. 비록 배분 상으로는 허각 도장이 운학 도장보다 더 높지만 자운검수들은 자운각주의 명에 따르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운검수들이 자연히 허각 도장을 따르는 무리와 운학 도장을 따르는 무리로 나뉘어 서로 검을 겨누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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