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 광세일소_한추영 - 1619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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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대리전(代理戰) (3)
“허억!”
팽충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핏기가 없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내의 무공은 경이로웠다. 자신이 칠십 평생을 닦은 무공을 아낌없이 펼쳐 보였건만 저 사내는 거대한 벽이나 다름없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
이번에도 역시 승부를 가늠한 요인은 사내의 기묘한 장법이었다. 사내의 손바닥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가슴이 거대한 산에 짓눌린 듯 뭉개졌다.
“윽.... 이 장법을, 무엇이라고 하오?”
팽충이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사내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번에도 여전히 조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팽가 놈들은 대가리가 안 돌아가나,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들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라니까.”
사내가 피 묻은 육환대도를 어깨에 걸머지고 사형장의 망나니마냥 팽충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사내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팽가 쪽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였다.
“무인은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는 법이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팽가 쪽 사람들이 심판을 자처하는 운학 도장에게 거칠게 항의했으나 운학 도장은 딴청만 피울 뿐이었다.
급기야 성격이 급하기로는 장주 못지않은 다섯 번째 장로 팽룡이 분통을 터뜨렸다.
“형님, 이럴 게 아니라 그냥 한꺼번에 몰아칩시다. 비무는 무슨 얼어 죽을 개뼈다귀입니까? 제깟 놈이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우리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면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남궁세가에서 뾰족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생각하는 것 하고는. 네놈들이 왜 남궁세가의 뒤꽁무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이제 알겠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인이었다. 웬만한 사내보다 키가 큰 여인이 몸매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꼭 맞는 옷을 입고 도도하게 걸어 나왔다. 출렁이는 가슴과 풍만한 둔부, 게다가 한쪽이 터진 치마 속으로 보이는 맨다리에 사내들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네놈들을 쓸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무림 세가이니만큼 사람은 살려주려는 무당파 도사님의 뜻을 좇아 비무를 벌인 것인데, 뭐? 인제 와서 떼로 덤비겠다고? 질 것 같으니 처음에 한 약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작태로군.”
여인은 손에 뱀의 혓바닥처럼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검고 가느다란 채찍을 들고 있었다. 갈라진 채찍 끝에는 쇠 추가 매달려 서로 부딪치며 딩, 딩, 딩 소리를 냈다.
“우리가 언제 비무를 하겠다고 약조했다는 것이냐? 그건 운학 도장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일 뿐!”
팽룡이 여인을 노려보며 목청을 높였다.
“호호호. 뭐 어찌 됐건 떼로 덤비겠다면 오히려 내가 고마울 판이야.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하느라 온몸이 근질근질했거든. 지금이라도 당장 덤벼봐. 네놈들 모가지를 이렇게 만들어 줄 테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찍이 여인의 손을 떠나 담벼락 옆에 서 있던 수십 년 된 대추나무로 날아가더니 나무줄기를 칭칭 휘감았다.
그리고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힘을 주자 어른 허벅지만 한 나무줄기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는 것이 아닌가.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 윗부분이 땅바닥에 떨어져 부스럭 소리를 냈다.
팽가장 사람들은 눈과 입이 모두 쩍 벌어졌다. 가냘파 보이는 몸매와 달리 엄청난 신공이었다. 검으로는 누구나 나무를 벨 수 있겠지만 멀리서 채찍을 날려 나무를 두 동강 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남궁세가가 어디서 이런 고수들을 영입해왔단 말인가? 강호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면 왜 자신들은 여태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하지만 성격 급한 팽룡은 이미 여인을 향해 튀어나가고 있었다.
“오냐, 당장 나와 한판 붙어보자. 차례대로 할 것 없이 열 명이 한꺼번에 붙으면 되지 않겠느냐?”
팽룡의 무기는 쇠사슬로 연결한 한 쌍의 커다란 철퇴였다. 팽가의 무기가 오호도였지만 팽룡은 자신만의 특기를 살리고자 오호도 외에도 철퇴 무공을 익혔다. 이것은 팽룡이 신력을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팽룡,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팽연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팽룡의 육중한 철퇴가 웅웅, 소리를 내며 여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역시 채찍을 휘둘렀다.
짝.
허공을 찢는 소리가 들리더니 채찍이 대번에 철퇴를 휘감았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백 근이 넘는 철퇴를 가볍게 낚아채 허공에서 크게 원을 한번 그리더니 대번에 다시 제 주인에게 던지는 것이 아닌가. 철퇴는 날아오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팽룡에게 되돌아갔다.
팽룡은 자신의 무기가 자신을 치러 오자 호승심이 생겨 손을 뻗어 잡으려 들었다. 자신이 철퇴 수련을 한 지가 십 년이 넘었거늘 감히 자기에게 철퇴를 던지다니.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철퇴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강타해 들어왔다.
“으윽!”
철퇴 하나가 팽룡의 가슴에 부딪히나 싶더니 곧 다른 하나도 연이어 맞은 곳을 또 때렸다. 애당초 철퇴가 날아올 때 피했어야 했지만 자존심 강한 팽룡이 자신의 병기를 잡으러 든 것이 문제였다.
퍽! 가슴뼈가 함몰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혈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룡아!”
팽연이 놀라서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에 팽룡의 아우 팽작과 팽추가 나는 듯이 팽룡에게 달려갔다.
“형님!”
가슴뼈가 산산조각이 나서 허파와 심장 등 장기를 찔러 팽룡은 숨도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살아날 가망성은 희박해 보였다.
“네 이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장로 중 막내 팽추가 검을 뽑아 들고 여인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팽가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신력이 남다르지만 팽추는 형제들 같은 신력을 타고나지 못해 도를 검으로 바꾸어 수련해왔다.
사사삭.
팽추의 오호검이 질풍같이 여인의 안면부를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여인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팽추의 검을 가볍게 피한 다음,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쐐액. 파공음이 들리나 싶더니 채찍이 어느새 구렁이처럼 팽추의 오른팔을 칭칭 감았다. 팽추는 다급한 나머지 오른손의 검을 던져 왼손으로 잡으며 채찍을 끊어내려고 했으나 여인의 손짓이 팽추보다 좀 더 빨랐다.
“아악!”
팽추의 오른팔이 조금 전 대추나무 줄기처럼 그대로 몸통에서 뜯겨 나가더니 팽연 앞에 떨어졌다.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팽추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다문 팽추의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렜다.
팽연은 몸을 숙여 떨어진 팽추의 팔을 집어 들고 수하에게 건넸다.
“팽추를 모 의원께 데려가라.”
“어딜!”
여인이 채찍을 날려 팽추를 공격했다. 그러자 팽연이 팔을 뻗어 여인의 채찍을 움켜잡았다.
“무공이 정말 대단하시구려. 나머지는 내가 받겠으니 내 아우는 그만 보내어 주시오.”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채찍을 잡아당기려 했으나 팽연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가주는 다르다는 말인가?”
여인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날름 핥으며 말했다. 꼭 먹이를 앞에 둔 승냥이 같았다.
“흥!”
팽연이 별안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채찍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채찍 때문에 찢어진 것인지 팽연의 손바닥에서 핏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팽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궁세가에서 정말 단단히 작정하고 왔구려. 하지만 정작 남궁가의 고수가 아닌 외부 고수들이 판을 치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이다.”
남궁진환은 아픈 곳을 찔리기라도 한 듯 ‘음’ 하고 침음성을 터뜨렸다.
“남궁세가와 우리 하북팽가는 그동안 반목하고 경쟁해왔지만 당당한 무림의 세가였소. 남궁세가가 초빙한 고수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외부 고수들의 뒤에 숨는 것도 남궁세가에서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오. 그러니 어떻소? 가주인 남궁진환 당신과 내가 한판 겨루어 보는 것이. 내가 지면 우리 가문의 토지와 재산, 병력에 대한 모든 처분을 당신께 순순히 맡기리다. 다만 사람들만 살려주시오.”
팽연이 자신의 앞에 오호쌍도를 두고 책상다리를 하고 땅바닥에 앉았다. 남궁진환의 답을 듣기 전에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삭풍이 희끗희끗한 팽연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남궁진환은 팽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하북팽가가 눈엣가시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판을 키울 문제는 애당초 아니었다. 게다가 팽연이 한 말처럼 남궁가의 문제에 외부에서 데려온 고수들이 설쳐대는 것도 사실 지켜보기 유쾌하지 않았다. 당당한 남궁세가가 왜 다른 사람들 뒤에 숨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 또한 자신의 형님인 맹주 남궁진악의 지시였다. 남궁진환이 할 일은 비무를 끝까지 지켜보다가 마지막에 아들인 남궁척으로 하여금 팽연의 목을 베게 하는 일이었다. 그뿐이었다.
이제 팽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은 형님인 남궁진악의 말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 남궁진환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맹주가 된 형님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아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들은 형님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따를 녀석들이었다. 심지어 젖먹이 갓난아기라도 죽이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죽일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신도 그런 심정이었는데.
형님의 말이 곧 법이고 하늘이었고 목숨이었다. 형님의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가주라 하나 허울 좋은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형님이 세워놓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제야 숙부들 사이에서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남궁척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달아났다가 제 숙부들에게 붙잡혀 온 아들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괴롭겠지. 당당한 무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지금껏 협(俠), 의(義) 두 글자만 가르쳤는데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은 협, 의와 거리가 머니 얼마나 괴로울까.
아들의 성격이 저토록 침울해진 것도, 일 년 내내 자신과 말 한마디 섞으려 하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런 괴로움과 회의감이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자신은 아들이 느끼고 있을 괴로움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에게 이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길을 벗어나면 죽음뿐. 자신은 아비이기에 차라리 아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더라도 살아주기를 바랐다.
‘척아, 미안하구나. 언젠가 네가 이 아비 마음을 알 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구나.’
생각을 마친 남궁진환이 팽연을 바라보았다. 기개가 남다른 훌륭한 무인이나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웠다.
“약조한 바대로”
남궁진환이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 세가의 고수들을 다 꺾고 오시오. 그러면 내 기꺼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남궁진환의 말에 팽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궁진환의 말은 결국 자신은 싸우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비겁한 놈. 끝까지 다른 사람의 뒤에 숨으려 하는 것인가.
“하하하하.”
갑자기 팽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동안 남궁 가주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구려.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나와 겨룰 만한 그릇으로 생각했거늘, 이제 보니 그럴 만한 가치는 없는 것 같소.”
팽연의 말에 남궁진환의 바로 아래 동생 남궁진연이 대로하여 소리쳤다.
“팽연, 네놈이 감히 본가의 가주를 능멸하느냐?”
하지만 남궁진연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팽연이 오호쌍도를 쥐고 몸을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좋소이다. 한번 해봅시다. 이름 없는 양반, 오시오.”
팽연의 말에 육환대도를 쓰던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오늘로써 하북팽가는 강호에서 사라질 것이오. 그리고 그 모든 잘못은 시류(時流)를 읽지 못한 팽 장주에게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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