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 광세일소_한추영 - 1618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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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대리전(代理戰) (2)
얼핏 그럴듯한 말이었다. 쌍방 간에 수십, 수백 명이 죽는 것보다 열 명의 목숨만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양측의 앙금이 깊으니만큼 목숨을 건 생사결로 하되 결과에는 무조건 승복해야 하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나 무당파의 운학과 자운검수 36명은 승복하지 않는 쪽을 단죄할 생각이오.”
운학 도장이 다시 한번 생사결을 강조했다. 그 말을 달리 해석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열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팽연은 분통이 터졌다. 보아하니 도와준다고 해놓고서는 운학 도장 자신은 나서지 않을 심산이 분명했다. 열 명의 고수가 벌이는 생사결이라. 누구를 내보낸단 말인가?
“하하하, 좋소이다. 승부를 낼 바에야 목숨을 걸고 해야겠지요. 군사를 이끌고 먼 길을 온 우리에게는 다소 아쉬운 결정이기는 하나 도장의 말에 따르겠소이다. 다만 팽가에서 이 비무를 받아들일 만한 담이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팽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남궁진환이 껄껄 웃으며 운학 도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팽연이 비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는 셈이었다.
“팽 장주, 어떻소? 이 비무에 응하시겠소, 아니면 팽가장을 싹 밀어드릴까? 마침 종복이 좀 더 필요한데 팽가장의 식솔들을 모조리 붙잡아 우리 집안의 종복으로 쓰면 좋겠군. 듣자 하니 팽가 여식들의 미모가 뛰어나다던데 나중에 서로 차지하겠다고 하면 골머리 꽤 썩겠군.”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팽연의 얼굴은 이미 김이 펄펄 나는 주전자나 마찬가지였다.
“네 이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내뱉는 것이냐!”
팽연이 화를 참지 못하고 남궁진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치렁, 소리가 나더니 자운검수 36명이 검을 빼 들고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자운검수들의 옷자락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손에 쥔 36자루의 검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팽 장주, 빈도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운학 도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팽연을 바라보았다.
“남궁진환 저 개자식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도 도장은 그런 말이 나오시오?”
팽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세가의 장로들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무엄하다! 감히 남궁세가의 가주께 그 무슨 미친 소리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팽가장의 팔대 장로가 앞으로 나서며 팽연을 엄호했다.
“그러지 말고 팽 장주 더러 그냥 덤비라고 하시오. 어차피 싸울 거, 지금 덤비나 나중에 덤비나 똑같지 않소? 게다가 생사결이니 싸우다 죽어도 저쪽에서 아무 소리도 못 할 테고 말이야. 크크크.”
덩치 큰 사내가 음산하게 웃었다. 양대 무림세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데도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남궁세가에 저런 자가 있었던가? 사내를 바라보던 팽연의 눈이 움찔했다. 사내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사내의 눈에서 순간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남궁가의 가주께서는 존귀한 분이시니 내가 먼저 팽 장주의 검을 받아 보리다.”
사내가 커다란 육환대도(六環大刀)를 어깨에 턱 하니 올리고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팽 장주께서 우리 가주님과 싸우고 싶으시다면 나를 이기면 되오이다. 아, 물론 내가 죽고 나더라도 8명은 더 죽여야 하겠지만 말이오. 크크크.”
사내의 웃음이 수상쩍었다. 하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좋소이다. 남궁가에서 벌써 한 명이 나왔소이다. 팽가에서는 누가 나오겠소?”
운학 도장이 팽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팽연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였다. 이 비무는 생사결이니만큼 아무나 나갈 수 없다. 그리고 나가면 반드시 적의 목을 취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야 그에 맞는 사람을 내보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앞으로 나온 사내가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 자의 무공이 어떤지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팽연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 백호단주 금문영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장주님, 제가 저자를 한번 상대해 보겠습니다.”
백호단주 금문영은 팽가장 내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순수 무공만 따지더라도 팽가장에서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고수였다. 금문영 정도면 상대가 누구든지 금방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팽연이 금문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게.”
“저놈의 목을 쳐서 장주님을 능멸한 죄를 반드시 묻겠습니다.”
금문영이 팽연에게 허리를 한 번 숙이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사내 앞으로 갔다.
“나는 팽가에서 백호단주를 맡고 있는 금문영이라 하오.”
금문영이 비무를 앞두고 상대에게 포권을 취했다.
“흐흐흐, 팽가장의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로군. 거추장한 인사는 그만두고 바로 시작합시다.”
사내가 공격자세를 취하자 금문영이 노기를 띠었다.
“내게 이름도 알려주지 않을 셈이오?”
비무를 하기 전에 통성명을 하는 것은 강호의 관례였다. 게다가 금문영은 이미 이름과 직위를 밝힌 터라 상대방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것은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흐흐흐, 내가 누군지는 염라대왕께 물어보구려. 그동안 내가 내려보낸 사람이 꽤 되니 염라대왕도 아마 잘 알 것이외다.”
“이런 건방진!”
금문영이 하북 팽가 특유의 오호도(五虎刀)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오호도는 관우가 쓰던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모양새로 손잡이가 길고 도신(刀身)이 넓고 두꺼웠다.
“흐흐흐, 누구 칼이 더 센지 한번 붙어 봅시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내가 육환대도를 휘두르자 순식간에 공기가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그 기세에 금문영이 눈초리를 찌푸렸다. 강호의 무기 중에 우리 팽가의 오호도보다 더 무거운 도는 없거늘. 사내의 육환대도도 오호도 못지않게 육중한 병기가 분명했다.
오호도는 그 자체로 칠팔십 근이 넘는 중병기라 제아무리 힘이 센 역사라도 한 손으로만 휘두를 수는 없었다. 오호도의 손잡이가 길쭉한 이유였다. 오호도는 반드시 두 손으로 잡아야 안정적으로 휘두를 수 있었다. 따라서 도를 한번 휘두를 때의 위력은 엄청나지만 그만큼 민첩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오호도에 육박할 것만 같은 육환대도를 한 손으로 들고서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팽연은 불안한 생각에 숨을 들이마셨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내는 아직 자신의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백호단주 금문영이 맞서기는 벅차 보였다.
카랑.
육환대도와 오호도가 굉음을 내며 서로 부딪쳤다. 육환대도에 달린 육환이 그 충격으로 출렁거리며 딸랑 소리를 냈다. 두 자루의 도가 서로 이를 맞부딪친 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르륵.
칼날이 서로 밀리면서 귀 안쪽을 바늘로 후벼 파는 듯한 금속성이 들렸다.
금문영은 양손으로 오호도를 붙잡고 전력을 다해 상대방 쪽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전력을 다해 버티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를 쥔 양쪽 팔뚝에 힘줄이 툭, 툭, 불거졌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사내는 여유가 있었다. 금문영을 바라보며 애쓴다는 식으로 조소를 날렸다.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로구나. 금문영은 문득 죽음을 직감했다.
자신과 달리 사내는 한쪽 팔로만 도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고도 양측의 도는 팽팽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사내가 별안간 도를 붙잡은 손에 힘을 빼나 싶더니 좌장을 번개같이 뻗어 금문영의 오른쪽 가슴을 때렸다.
금문영은 사내의 도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우렁차게 기합을 넣으며 오호도를 반원 모양으로 크게 휘둘렀다.
“이얍!”
하지만 도를 미처 다 휘두르기도 전에 금문영은 오른쪽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철퍼덕.
금문영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싶더니 어느새 바닥에 나뒹굴었다. 엄청난 장력에 오장육부가 다 끊어진 듯 입을 벌리자 선혈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내장 조각이 튀어나왔다.
“단주님!”
금문영의 모습을 본 풍림대장 척준경이 놀라서 달려왔다. 하지만 척준경은 자운검수들의 검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번 비무는 생사결이요. 금 단주의 호흡이 아직 붙어있으니 승패가 난 것이라 볼 수 없소이다.”
운학 도장의 말에 척준경이 목이 시뻘게지도록 소리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요? 이미 오장육부가 산산조각이 났거늘 무슨 승패를 더 봐야 한단 말이오?”
하지만 운학 도장은 완강했다.
“흥! 개소리라니 지금 빈도에게 하는 소리요? 척 대주가 팽가장을 대표해서 출전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만 금 단주의 호흡이 완전히 끊어진 뒤라야 가능하오.”
“운학 도장! 무당파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사람이 지금 죽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소이까? 당신네가 그러고도 명문정파라고 말할 수 있소?”
척준경이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다. 땅바닥에 쓰러진 금문영을 바라보던 팽연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척 대주는 물러서거라. 금 단주의 복수는 내가 하마.”
꾸역꾸역 선혈을 뿜어내는 금문영을 바라보며 팽연이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독문병기 오호쌍도(五虎雙刀)를 붙잡았다. 오호쌍도는 두 자루의 도를 동시에 쓰기 위해 무게와 길이를 조절한 오호도였다.
팽연은 금문영의 무공실력을 잘 알았다. 자신은 저렇게 단 몇 수만에 금문영에게 치명타를 입힐 자신이 없었다. 아니, 팽연이 알기로는 맹주를 제외한 남궁세가의 그 누구도 금문영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두 집안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리한 싸움을 벌여왔겠는가?
팽연이 두 손에 오호쌍도를 한 자루씩 붙잡으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팽연의 두꺼운 어깨와 가슴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네놈이 정녕 정체를 밝히지 않을 셈이냐?”
팽연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아 글쎄 그것은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라니까.”
팽연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감히 팽가의 가주 앞에서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자가 있을 줄이야.
“좋다. 어서 매듭을 지어라. 그래야 금 단주의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
사내를 바라보는 팽연의 눈에서 맹호 같은 안광이 폭사 되어 나왔다.
“이거 원 비무가 싱겁게 끝나겠군. 팽 장주는 좀 더 뒤에 나와주었으면 했는데 말이야. 크크크.”
사내가 팽연을 코앞에 두고 비웃었다. 그러자 남궁가에 있던 사람 몇 명이 따라서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자가 나타났을까? 남궁세가가 큰소리를 치며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이자를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내는 도법보다 장법이 더 무서웠다. 도대체 강호에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법을 구사하는 자가 누가 있던가? 팽연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누군가가 떠오려는 듯했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팽연이 노여운 눈길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팽연의 앞으로 나섰다.
“장주, 내가 먼저 할 수 있게 해주시오.”
팽연의 숙부이자 수석 장로인 팽충이 흰 수염을 휘날리며 비장한 눈빛으로 팽연을 바라보았다.
팽충이 보아하니 지금 팽가장에서 저 사내의 무공을 제대로 받아낼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저 사내의 무공을 파악하려면 금문영보다 무공이 뛰어난 자가 상대하며 일정 시각 버텨야 하는데 자기 외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저 사내와 싸우는 동안 나머지 장로들이 사내의 무공을 파악하여 대비책을 찾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될 뿐이리라.
팽연은 팽가의 가주.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팽연은 끝까지 버텨야 했다.
팽충의 마음을 안 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
팽연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팽충은 팽연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지긋이 바라보더니 조카를 향해 가주에게 고하는 예를 올렸다.
“장로 팽충, 선조들이 지켜온 가문을 지키기 위해 오늘 싸움에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팽충이 기다란 오호도를 들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이 오히려 태산같이 드높은 팽충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삼국시대에 유비의 수하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사방장군 황충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이렇게 팽 장주는 다시 어물쩍 뒤로 한발 빠지시는구려. 좋소이다, 좋아. 열 명을 채우기로 했으니 팽 장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팽가장 아홉 명의 목을 베어 드리지. 그러고 난 다음에 상대해 드리리다. 그전에 이놈부터 먼저.”
사내가 육환대도를 휘두르자 땅바닥에 앉아서 가쁜 숨을 헐떡이던 금문영의 목이 뎅강 날아가며 땅바닥을 굴렀다. 대도를 얼마나 신속하게 내리쳤는지 칼날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단주님!”
금문영의 직속 수하 척준경이 금문영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팽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리석었구나.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팽연은 군사의 숫자만 채우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신봉문, 신창문, 매화문, 불영사, 개방에서 누가 오더라도 저 사내를 당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소림신승이나 화산파의 태상장로 독고양을 모셔오지 않는 다음에야 저 괴물 같은 자를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나 마나 수석 장로 팽충도 몇 수 겨루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뻔히 질 싸움을, 그것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싸움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니.
팽연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한점씩 천천히 저미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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