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44화 (144/201)

#   144 - 광세일소_한추영 - 1617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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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대리전(代理戰) (1)

하북성의 무림 패자 팽가장에는 오늘따라 불안한 기류가 집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팽가장의 내원을 수호하는 백호단 풍림대(風林隊) 대주 척준경은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지 우려 섞인 눈길로 장주전(莊主展)을 바라보았다.

장주전에는 지금 팽가의 가주인 팽연과 팔대 장로, 백호단주 등 팽가장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받았던 남궁세가의 도전장 때문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은 자신이 직접 남궁가의 정예병을 이끌고 팽가장을 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팽가로서는 맹주의 비호 아래 세력을 급속도로 넓혀가는 남궁세가를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이유는 팽가의 장남 팽호의 죽음 때문이었다. 팽호가 귀면쌍살에게 살해당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성정이 불같은 가주 팽연은 무림맹이 여태껏 귀면쌍살을 잡지 못하는 것은 잡을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며 맹주 남궁진악을 공개적으로 맹비난했다.

그런데 뜻밖에 사천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척이 귀면쌍살에게 납치되었다가 싸움이 끝난 후 멀쩡히 돌아오는 일이 발생했다. 팽가에서는 남궁세가와 귀면쌍살의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팽연은 이 같은 사실을 온 무림에 공개하며 당장 귀면쌍살과의 관계를 밝히라고 남궁세가를 다그쳤다.

그러자 남궁세가는 자신의 가문을 모욕한 팽연을 용서할 수 없다면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세인들이 보기에 이번 남궁세가의 원정은 의아한 구석이 많았다.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팽가 가주의 언행이 혹 불쾌하더라도 군대를 일으킬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남궁세가가 이번 기회를 핑계로 숙적 팽가를 무림에서 축출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쾅, 쾅.

삐죽삐죽 튀어나온 수염이 장비를 연상시키는 팽연의 주먹이 천축국에서 구해온 귀한 자단목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인근 500리 이내에 있는 본문의 제자를 모두 불러 모으라고 했거늘 그 수가 어째서 200명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냐? 본문이 지금 사느냐 죽느냐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거늘 어찌 모두 나 몰라라 한단 말이야!”

팽연의 입에서 침이 튀겼다. 노기를 억누르지 못한 팽연이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신봉문(新鳳門), 신창문(神槍門), 불영사(佛影寺), 개방(丐幇)에 도움을 요청한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4개 문파 모두 하북 무림을 대표하는 문파였다.

“그것이, 저....”

“똑바로 말하지 못할까?”

팽연의 아우이자 팽가장 팔대 장로 중 다섯 번째 장로인 팽룡이 뜸을 들이자 팽연이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이번 전투참가가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맹주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기랄!”

장로들 가운데는 팽연의 숙부나 사촌도 있었고 원로들도 있었지만 팽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만 육두문자를 쓰고 말았다.

“하북 무림이 똘똘 뭉쳐서 싸워야 할 판국에 하나같이 남궁진악의 눈치를 본단 말이더냐? 언제부터 하북 무림이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단 말이냐? 불의 앞에서 눈을 감고 강자의 똥구멍이 살살 긁어 주는 놈들이 무슨 무림인이란 말이야.”

팽연이 다시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다 필요 없다. 남궁세가 잡쓰레기들, 우리끼리 상대하자꾸나. 다른 문파에 도움을 요청하러 간 사람들을 모두 다시 불러들여라.”

가주 팽연의 말에 좌중에서는 미약한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세가는 분명히 맹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 고수들을 대거 동원해 올 것이다. 이쪽에서도 방비해야 할 텐데 팽가장의 고수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그때 갑자기 문밖이 시끌벅적하더니 매화문(梅花門)으로 갔던 팽연의 차남 팽숙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버님, 제가 누구를 모시고 왔는지 한번 보십시오.”

팽숙이 옆으로 물러서자 팽숙의 뒤에서 머리를 품(品)자 모양으로 틀어 올린 도사 한 명이 나타났다.

“팽 장주, 그동안 무탈하셨소이까?”

팽연은 그 도사를 보자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무당파의 운학(雲鶴) 도장 아니십니까? 여기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자 운학 도장이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팽 장주께서 뛰어난 고수들을 모으고 계시다기에 내 한 팔 힘이라도 되어 드릴까 해서 이렇게 불쑥 찾아왔소이다.”

운학 도장은 무당파 장문인 현각(玄覺) 도장의 사제이자 무당파의 장로였다. 무당파의 장로가 도와준다면 하북 무림의 신봉문이나 신창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팽연이 반가운 기색으로 운학 도장의 팔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이다. 자, 앉으시지요.”

팽연이 운학 도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운학 도장의 등장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대번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내 그렇지 않아도 남궁가에서 요즘 맹주의 위세만 믿고 너무 기고만장하기에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운학 도장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북 무림인들은 모두 맹주가 두려워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는데 이제야 진정한 협사를 만나 뵙니다. 이래서 다들 무당파, 무당파 하나 봅니다, 하하하.”

팽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참, 얼마 전에 마교의 공격을 받아 무당파의 피해가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되었소이까? 현각 장문인의 일은 정말 안타깝게 되었소이다. 그래, 허각 도장과 황각 도장은 의식을 회복했습니까?”

팽가의 수석 장로 팽충이 운학 도장에게 물었다. 운학 도장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두 분 사형은 의식은 회복했으나 당분간 정양을 더 해야 할 듯싶소이다.”

“이거 제가 위로부터 드렸어야 하는 건데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결례를 범했소이다.”

팽연이 다시 숙연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하자 운학 도장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무림인들이 죽고 사는 문제에 연연하면 되지 않겠지요. 장문인의 일이 안타깝기는 하나 그렇다고 어려움에 빠진 무림 동도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장문인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소이다. 오늘 내가 우리 무당파의 자운검수(紫雲劍手) 36명을 데려왔으니 장주께서 이제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 없소이다. 나만 믿으시오.”

“자운검수를 36명이나?”

팽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당파의 자운검수는 태극검과 태극혜검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무당파의 실전부대로 화산파의 매화검수와 같이 강호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런 자운검수가 36명이 왔다고 하니 팽연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만하겠군요. 이번 싸움은 우리 팽가와 남궁가의 싸움이 아니라 맹주를 비호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의 싸움입니다. 이번 싸움에 무당파의 운학 도장께서 함께 하시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팽연의 말에 운학 도장이 껄껄껄 웃으며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

운학 도장이 도착하고 이틀 뒤 드디어 남궁세가의 군사들이 팽가장 앞에 당도했다.

“팽연은 대문을 열고 우리 가주님께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자비로운 가주님께서 어쩌면 목숨을 살려주시리라.”

대문이 부서질 듯 커다란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주 남궁진환의 셋째 동생인 남궁진수였다. 때는 초겨울이라 매서운 겨울바람이 북쪽에서 휘몰아쳐 왔다. 남궁진수는 윤기 흐르는 검은색 모피를 걸치고 이마에는 호피 무늬가 들어간 머리띠를 두르고 있어 위세가 당당했다.

그때 사르락, 소리가 들리더니 팽가장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 위에서 검은 무복을 입은 군사 수십 명이 철궁을 들고 나타났다. 화살의 시위가 겨냥한 것은 바로 남궁세가의 군사들이었다.

“어디서 개가 짖나 했더니 바로 남궁가의 개자식들이로군.”

어느새 대문 지붕 위에 우뚝 선 팽연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아래에서 팽연을 바라보던 남궁진수가 이를 갈며 쏜살같이 달려서 대문 지붕 위로 올라가려 하자 쐐액 소리를 내며 쇠 화살 수십 대가 남궁진수 앞으로 날아들었다.

남궁진수는 화살 세례를 받고 걸음을 물린 뒤 코웃음을 쳤다.

“그래, 활은 팽가장만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여봐라. 불화살을 대령해라.”

남궁진수의 명에 남궁가의 정예병 일백여 명이 쇠 화살을 시위에 먹인 거대한 쇠뇌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양옆으로 도열했다.

“시위에 불을 붙여라.”

명이 떨어지자 궁수 옆에 서 있던 무사들이 시위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팽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건방진 놈들. 당장 사정없이 활을 쏴라. 발사.”

팽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수백 발의 강철 화살이 새까맣게 허공을 채우며 남궁세가 정예병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이마 단단히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방패 벽을 쌓아라!”

남궁진수의 명이 떨어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예병들이 각자 지니고 있던 쇠 방패를 착, 착, 착 쌓아 올리며 거대한 방벽을 형성했다. 그와 동시에 방패 뒤에 있는 쇠뇌에서 쏘아 올린 불화살이 팽가장 담벼락 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핑. 핑. 핑.

남궁세가 정예병이 쏜 쇠뇌는 팽가장의 쇠뇌보다 커서인지 훨씬 더 멀리까지 날아갔다. 게다가 화살 끝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을 달고 있었으니 팽가장에 불이 붙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팽가장 안은 삽시간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타오르고 그 와중에 불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반면 남궁세가의 병사들은 처음에 화살을 맞은 몇 명 이외에 큰 피해는 보지 않았다.

“멈추시오.”

그때 팽가장 담벼락 위로 머리가 허연 노도사가 몸을 솟구치며 올라왔다. 남궁가와 팽가, 양측의 병사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에도 노도사가 외친 말은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대단한 내공 고수가 분명했다.

“같은 무림 동도들끼리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남궁세가의 남궁진수가 노도사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무당파의 운학 도장께서 언제부터 팽가 편을 드셨단 말이오? 이것 참 금시초문이구려.”

그러자 운학 도장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언제 팽가의 편을 들었단 말이오? 우리 무당은 오늘 일을 안타깝게 여겨 양 무림세가를 중재하러 왔소이다. 매사를 말로 풀어야지 주먹이 앞서서야 되겠소? 그러니 남궁가는 불화살을 멈추고 팽가는 대문을 여시오.”

이번에는 팽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운학 도장을 바라보았다. 이 영감탱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팽가 편을 들러 온 게 아니라 양측을 중재하러 왔다니, 우리가 언제 저들과 말로 푼다고 했단 말인가?

팽연이 잠시 얼이 빠져 있을 때 운학 도장이 과시하듯 절정의 제운종을 구사하며 지붕 위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왔다.

“좋소이다. 무림 명숙이신 운학 도장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우리는 도장의 말씀에 따르겠소이다.”

남궁진수가 궁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활을 멈추어라.”

남궁세가가 불화살을 멈추었다. 그러자 운학 도장이 이번에는 팽연을 돌아보았다. 어서 대문을 열지 않고 뭐하냐는 표정이었다. 팽연은 속으로 일이 꼬인다고 생각했으나 운학 도장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끼익. 끽.

팽가장의 대문이 열렸다. 대문 안쪽에는 팽가장의 호위단인 백호단의 제1 대대인 풍림대가 삼엄한 표정으로 도열 해 있었다. 나머지 2개 대대인 거룡대와 비호대는 팽가장의 외곽과 내원을 수비 중이었다.

팽가장의 문이 열리자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사태를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이 성큼성큼 걸어서 팽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진환 바로 뒤를 따라 남궁세가의 오대 장로와 남궁세가에서 특별히 초빙한 듯한 고수 한 무리가 들어가고, 그 뒤를 이어 남궁가의 호위부대인 천(天), 지(地), 풍(風), 뢰(雷) 4개 대주가 보무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남궁진환의 유일한 아들인 남궁척은 숙부들 틈에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팽연은 남궁진환을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어차피 양측의 앙금이 깊으니 이대로 그만두라고 하면 아무도 듣지 않겠지요. 그래서 빈도가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오.”

“그것이 무엇이오이까?”

이미 팽연은 운학 도장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저놈들과 시원하게 한판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속으로 생각했다.

“도장의 말씀, 귀를 씻고 경청하겠소이다.”

뜻밖에 남궁진환이 운학 도장의 말에 공손하게 응대했다.

“으하하하, 좋소이다. 남궁세가의 가주께서는 흉금이 좁지 않으니 과연 대인이시구려. 어차피 양 가문이 정도 무림의 큰 기둥이니 오늘 비록 서로 얼굴을 붉히더라도 금도를 넘지는 말아야겠지요.”

운학 도장의 말을 듣고 있던 팽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분명히 자기 입으로 남궁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남궁 가주께서도 분노를 이기지 못하시고, 팽 장주께서도 팽가장이 공격을 받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차라리 양측에서 고수 열 명을 선발하여 겨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다만 그 비무를 생사결로 하면 좋을 듯싶소이다. 양 세가의 불화 때문에 수십 명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수뇌부의 비무로 결정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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