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42화 (142/201)

#   142 - 광세일소_한추영 - 161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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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화. 분열 (8)

“여기가, 어딥니까?”

석추명이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깨어났다. 깨고 보니 자신은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이고, 도솔천사님,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나이가 쉰쯤 된 듯한 남자 교도가 반가워하며 말을 걸었다.

“예. 머리가 좀 아픈 것 빼고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저희 교도들이 화련산 총단을 회복하기 전까지 임시 총단으로 쓰는 곳입니다요. 예전에는 제법 규모가 큰 절이었는데 중들이 모두 떠나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된 지 오래된 곳입죠. 마침 규모도 크고 위치도 적당하여 저희 교에서 수리하여 임시총단으로 쓰고 있습지요.”

남자 교도는 수더분한 인상과 달리 말이 많았다. 석추명이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하더니 이제는 예전 절의 역사까지 얘기할 참이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습니까?”

석추명은 남자 교도의 입을 막을 겸 얼른 다시 물었다.

“도솔천사님께서는 지난 삼 일을 한 번도 깨지 않고 주무셨습니다요. 교주님께서도 천사님의 상태에 걱정이 많으셨는데 이렇게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게 모두 천사님의 성품이 부처님처럼 자비롭기 때문입죠. 당시 교도 삼백 명을 구하느라 힘을 모두 소진하신 상태에서 다시 교주님까지 구하시느라 진원지기(眞元之氣)가 크게 손상되어서 무척 위험했습니다요.”

석추명은 벌써 삼 일이 지났다는 말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기하진과 임예린이 자신을 많이 찾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하북팽가로 갈 테니 그쪽으로 따로 가는 수밖에.

“참, 사마곤과 백골마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날 싸움의 결과가 궁금했다. 그러자 남자 교도는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백골마군은 도솔천사님의 어검술에 놀라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습니다. 백골마군이 제아무리 백골공을 쌓아본들 제 놈이 어찌 도솔천사님을 이기겠습니까요? 그야말로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요, 가죽 속의 뼈다귀에 불과합죠. 사마곤은 진즉에 도솔천사님의 검에 심하게 다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는데 사마곤의 시신을 봤다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게 분명합니다요.”

남자 교도는 신이 나서 입에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윗대가리들이 그 모양이니 아랫것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저희 교도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절벽 위로 올라가서 그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베어 버렸습죠. 교주님께서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요. 하긴 교주님의 명이 아니었더라도 그놈들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아마 그날 많이 바빴을 겁니다, 하하하.”

남자 교도는 통쾌한 듯 껄껄껄 웃었다. 하지만 석추명은 적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모두 베어버렸다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 중에 적군을 베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항복한 적까지 죽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날 백련교의 병사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거꾸로 이들 모두가 절벽 아래에 뼈를 묻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남무궁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요. 하하하. 이제는 도솔천사님께서도 계시니 사악한 백련교 놈들 아주 씨를 말려버릴 수 있겠습니다.”

남자 교도의 말에 석추명이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교를 믿는 사람이 살생을 즐겨서야 되겠습니까? 앞으로 불필요한 살생은 가능한 한 줄이십시오. 따지고 보면 저들도 다 같은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남자 교도는 뜨끔했는지 석추명의 눈치를 보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도솔천사님은 과연 보살님이십니다. 앞으로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석추명은 자신을 도솔천사로 부르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그간의 상황 때문에 이 사람은 자신을 도솔천사로 철석같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석추명은 말해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생각에 이 문제는 음양사자를 만나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양사자를 도와 남무궁에게 복수는 하되 흑련교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고.

“교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교주님은 지금 본당에서 교우들의 결속을 다지는 성례(聖禮)를 집전하고 계십니다. 아직 몸이 불편하실 텐데 참가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앞장서십시오.”

횃불을 대낮처럼 밝힌 본당에는 삼백 명의 교도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음양사자가 단상에 서서 의식을 주관하고 있었다. 지난번 백련교의 공격 때문인지 본당 주위에는 중무장한 고수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디선가 향기로운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보니 단상 위에 커다란 청동 향로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음양사자가 향로 앞에 우뚝 서더니 닭을 잡아 닭 피를 술에 탔다. 그리고는 술을 한 잔 퍼 올려 제단 위에 놓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삼가 무생노모께 고하니, 저희 흑련교도들은 오늘 이 잔을 마시며 신교(神敎) 탈환을 맹세합니다. 간적 남무궁을 잡아 앞서간 형제들의 혈채(血債)를 갚고, 신교를 재건할 때까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생사고락을 함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저버리는 자가 있다면 무생노모의 진공가향에 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살아도 살지 못하고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혼백이 되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될 것입니다.”

맹세를 마치더니 음양사자가 먼저 술잔을 비웠다.

“자, 이제 교도들은 한 사람씩 와서 이 술잔을 받아라.”

음양사자의 명에 흑련교도들이 일어나 줄을 서더니 한 사람씩 술을 받아 마셨다.

석추명은 의식을 방해할 수 없어 뒤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꽤 지나 모든 사람이 술잔을 다 받아들자 석추명이 음양사자에게 다가갔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이 다가오자 기뻐하며 역시 술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석추명은 술잔을 받지 않았다.

“선배님, 저는 술잔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교도들 앞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밝힐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석추명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지며 ‘탁탁’하고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것이 무엇이냐?”

“저는 흑련교에 가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석추명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순간, 교도들 간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도솔천사가 교에 가입을 하지 않겠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음양사자가 눈빛을 번뜩이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미 본교에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웠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교도가 이미 심중으로 자네를 차기 교주가 될 도솔천사로 인정하고 있거늘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가 한때 백련교에 몸을 담긴 했으나 이미 교를 떠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화산에서 태상장로 독고양 선배님께 심법을 전수받으면서 화산파 재건을 돕겠다고 약조했습니다. 남무궁을 처단하는 일에는 선배님과 함께하겠지만 교에 가입할 수는 없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석추명의 말에 음양사자의 목소리가 돌연 쩌렁쩌렁 울렸다.

“석추명, 이제 와서 명문정파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냐? 명문정파라고 하는 놈들이 얼마나 위선자들인지 무림맹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교도들은 교주와 석추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새삼 명문정파의 제자라는 칭호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 때문에 화산파가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화산파의 재건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을 따름입니다. 교에 가입한 상태로 화산파를 돕는다면 양측에 모두 누가 될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자 음양사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화산파가 멸문지화를 입은 것이 어찌 자네 때문이겠느냐? 그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맹주 남궁진악이 계획했던 일이야. 그리고 자네는 교를 떠날 수 없다. 한번 신교에 몸을 담은 사람은 죽어서도 신교의 사람임을 자네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선배님! 교에 가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배님과 뜻을 함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발 제 뜻을 이해해 주십시오.”

“듣기 싫다. 나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음양사자가 석추명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소매를 떨치며 뒤돌아서더니 뒷짐을 지었다.

그때 교도들 가운데 누군가 소리높여 외쳤다.

“도솔천사님, 저희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도솔천사님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소리치자 곧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조하여 외치기 시작했다.

“저희는 도솔천사님이 필요합니다.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도솔천사님,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교도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엎드렸다.

“고개를 드십시오. 저한테까지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석추명이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도솔천사님께서 저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시기 전까지 저희는 이대로 꼼짝하지도 않겠습니다.”

석추명이 교도 몇 명에게 직접 다가가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모두 요지부동이었다.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음양사자가 입을 열었다.

“교도들의 이 간곡한 청을 자네가 외면할 수 있겠나? 화산파 사람들의 부탁만 중요하고 우리 교도들의 간절한 청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석추명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화산파가 자기 때문에 화를 입은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화산파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나찰녀가 자신을 잡으러 화산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쩌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은 화산파 제자가 아닌데도 화산파의 창파조사 때부터 전해오던 화산심법을 얻지 않았던가? 그 심법을 전해주면서 화산파를 부탁하던 독고양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면 흑련교는 자신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흑련교는 사실 자신과 직접 관련은 없었다. 처음에는 다만 공동의 적인 남무궁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음양사자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이 몸담았던 신교의 지파(支派)라 친근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남무궁의 손에 교도 3,000명이 몰살했다는 말에 안타깝고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번 목숨을 걸고 교도들을 탈출시키면서 죽음의 경계에서 있었던 탓인지 끈끈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화산파는 중요하고 흑련교도들은 중요하지 않냐는 음양사자의 말에 석추명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과연 누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목숨이 더 귀한지, 누구의 뜻이 더 높은지 내가 판단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은 화산파와 함께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 또한 자신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리라.

석추명이 음양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삼가 석추명,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석추명의 말이 떨어지자 엎드려 있던 교도들이 환호하며 모두 고개를 들었다.

“이 잔을 마시거라. 이 잔을 마시면서 맹세하거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흑련교와 함께 하겠다고.”

석추명은 닭피가 섞인 술잔을 받아들고 그대로 들이켰다.

“신교의 제자 석추명, 살아서도 죽어서도 교도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저버린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이미 체념한 석추명은 담담한 어조로 음양사자가 요구하는 맹세를 했다.

“좋다! 석추명은 이제 본교의 제자인 동시에 공식적으로 도솔천사가 되었으니 모든 교도는 앞으로 나 다음으로 도솔천사의 명에 따라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주님.”

교도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음양사자의 말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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