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 광세일소_한추영 - 160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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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분열 (6)
석추명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검은 두건을 쓴 흑의인을 쫓았다. 흑의인의 무공은 석추명 자신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아 아무리 속력을 내어도 흑의인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석추명이 그렇게 빗속을 달린 지 3각(刻)쯤 지나자 눈앞에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났다. 바위산은 무척 가파른 데다 비까지 와서 표면이 미끄럽기까지 해서 발을 딛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곧이어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흑의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발끝으로 바위를 밟으며 순식간에 바위 절벽을 거꾸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러기가 절벽 위로 날아오른다는 절정의 금안공(金鴈功)이었다.
석추명도 이에 뒤질세라 자신이 제일 자신 있는 경공 천종보(踐宗步)의 벽호공(壁虎功)을 펼쳤다. 벽호공은 말 그대로 호랑이가 절벽을 올라가는 형세라 지금 가장 적합한 무공이었다.
공력을 끌어올려 발걸음을 내딛는 석추명의 정수리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공력을 절정으로 펼쳐 머리에 닿는 빗물이 바로 수증기로 변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앞서가던 흑의인은 고개를 돌려 석추명을 힐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빗속을 뚫고 수십 장 높이의 바위 절벽을 오르는 두 사람을 누군가 보았다면 아마도 산짐승이나 날짐승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절벽을 중간쯤 오르던 흑의인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석추명이 놀라서 유심히 살펴보니 흑의인이 사라진 곳에 한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 입구가 바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석추명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아울러 혹시 있을지도 모를 공격에 대비해서 검을 뽑아 손에 들었다.
“교주님께서 돌아오셨다. 교도들은 무릎을 꿇고 영접하라.”
어린아이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합창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수백 명의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진공가향 무생노모(眞空家鄕, 無生老母), 흑련신교 영원불멸(黑蓮神敎 永遠不滅)”
이 주문은 세상의 창조주 어머니인 무생노모가 이 땅에 강림하여 영원한 극락인 진공가향을 건설하기를 염원하는 말로 백련신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였다. 하지만 ‘진공가향 무생노모’ 여덟 글자 뒤에 백련신교가 아니라 흑련신교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흑련교의 교도들이 분명했다.
동굴 안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앉아 있었고 곳곳에서 횃불이 대낮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석추명은 그 광경에 경계심이 들어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쫓아왔던 흑의인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가뿐히 날아서 제일 앞에 마련된 단상 위로 올라가더니 한가운데 있는 보좌(寶座)에 앉았다.
보좌 양옆으로는 동남동녀 여덟 명이 네 명씩 서서 흑의인이 보좌 위로 올라오자 손에 든 바구니에서 꽃을 꺼내 허공에 뿌렸다. 색색의 꽃잎이 허공에 흩날리며 동굴 안이 순식간에 꽃향기로 가득 찼다.
흑의인이 보좌에 앉기 전에 두건과 장포를 벗었다. 흑의인은 역시 석추명이 예상한 대로 음양사자였다. 붉은 옷을 입은 음양사자가 보좌에 좌정하자 수백 명의 교도가 머리를 숙여 절을 하며 외쳤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지르자 동굴 안이 웅웅 울렸다.
음양사자가 오른손을 들자 갑자기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음양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소리높여 외쳤다.
“신교를 되찾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도다. 그날이 되면 배신자 남무궁을 처단하여 억울하게 죽은 삼 천 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적들에게 빼앗긴 화련산 총단을 되찾겠노라.”
음양사자의 말에 수백 명의 교도가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절을 하며 화답했다.
“진공가향 무생노모, 흑련신교 영원불멸”
흑련교도들이 주문을 반복해서 내뱉자 동굴 안이 이상한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석추명은 제일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이 모든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음양사자가 다시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교도들은 일제히 입을 닫고 음양사자의 말을 경청했다.
“교도들은 듣거라. 오늘 이 자리에 우리의 대업에 동참할 중요한 사람이 와 있다.”
음양사자가 돌연 석추명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석추명은 앞으로 나오라.”
음양사자가 석추명을 호명하자 그 자리에 운집한 수백 명 교도의 시선이 일제히 뒤에 있는 석추명에게 꽂혔다. 석추명은 당황했으나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앞으로 나갔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한 다음 교도들에게 말했다.
“석추명은 본래 남무궁의 밑에서 수라대주를 맡고 있었으나 남무궁의 악행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석 대주는 검에 관한 한 불세출의 고수로 이후로 나와 함께 남무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서기로 했으니 교도들은 앞으로 석 대주를 보면 나를 본 것같이 하라.”
음양사자의 파격적인 말에 석추명은 속으로 잔뜩 긴장했다. 음양사자는 교주인데 석추명 자신을 보면 교주를 본 것같이 하라니 음양사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또한 석추명은 앞으로 나를 도와 신교의 법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교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것인즉, 석추명에게 교주 다음으로 높은 도솔천사(兜率天使)의 지위를 내리노라. 도솔천사는 차기 교주가 될 자이니 모든 교도는 지극한 공경심으로 도솔천사를 대하고, 천사의 말이나 명에 절대복종해야 하느니라.”
석추명은 음양사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차기 교주가 될 도솔천사의 지위라니. 자신이 언제 흑련신교의 교주가 되겠다고 했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남무궁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음양사자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뿐이었다.
늘 신교에 몸을 담게 되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던 석추명은 티끌만큼이라도 흑련신교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신을 차기 교주에 임명하다니.
“선배님, 아니 교주님. 뭔가 착오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석추명이 황급히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고 했으나 음양사자는 석추명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자네가 남무궁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수백 명의 염원을 외면하지 말게.”
“하지만 교주님, 저는 정말―”
석추명이 다시 한번 음양사자에게 거절 의사를 밝히려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더니 수십 자루의 표창이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불시에 날아든 표창의 기세가 워낙 대단하여 입구 가까이 앉아 있던 교도 수십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표창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바닥에 핏물이 흥건하고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놈이냐? 썩 나오지 못할까!”
음양사자가 몸을 날리며 동굴 입구를 향해 허공을 격하고 장풍을 내쏘았다.
우르릉 쾅!
음양사자의 손짓과 맞추어 벼락이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어디에 모여있나 했더니 여기에 다들 모여 계시군.”
동굴 밖에서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골마군?”
석추명이 검을 붙잡고 몸을 날려 음양사자 옆에 내려서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석 대주, 네놈도 여기 있었더냐? 잘됐군. 본교의 역도들이 모두 모여있으니 일망타진하기 딱 좋구나. 크하하하.”
백골마군의 웃음소리와 함께 동굴 밖에서 안쪽으로 시커먼 물체가 휙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음양사자가 대번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그 물건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위험합니다.”
석추명이 반보 더 빨리 몸을 날리며 날아온 물체를 검으로 베었다. 그러자 물체가 터지며 안에서 서역 지역에서 많이 나는 시커먼 기름이 쏟아졌다. 기름이 터지자 석추명은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필 기름을 왜...?
그때 갑자기 머릿속으로 무엇인가 번뜩이며 지나갔다.
“적이 화공(火攻)을 펼치려고 합니다. 교도들은 더욱 안쪽으로 물러서십시오.”
석추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동굴 입구 바깥쪽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유성처럼 날아왔다. 불길이 기름에 닿자 대번에 크게 치솟으며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밖에서 날아온 불덩이는 유황에 붙인 불로 기름 때문에 삽시간에 번져갔다. 불길이 워낙 거세서 음양사자가 만약 기름 주머니를 손으로 움켜잡아 주머니가 터졌다면 음양사자의 손도 화염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밖에서 다시 유황불이 수십여 개 더 날아왔다. 석추명이 날아오는 유황불을 검으로 베어봤지만, 오히려 유황불의 개수만 더 늘어 적을 돕는 꼴이라 섣불리 검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유황이 타들어 가면서 내는 검은 연기에 불길까지 크게 치솟으면서 동굴 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얼마 되지 않아 연기에 질식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석추명은 얼른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으며 음양사자에게 소리쳤다.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기 다른 출구는 없습니까?”
음양사자는 백련신교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쫓아왔는데 자신은 이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없네. 무조건 저 입구로 나가야 해. 저놈들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음양사자가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동안 석추명이 비천검을 휘두르며 동굴 입구로 달려갔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나가서 길을 뚫겠습니다. 제가 신호를 드리면 선배님께서는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어 주십시오.”
석추명이 땅바닥을 한번 박차더니 그 기세로 곧장 화살처럼 동굴 입구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강철 표창과 비도 수십 자루가 석추명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금방이라도 온몸이 고슴도치로 변할 판국이었다.
“타앗!”
석추명이 기합을 넣으며 공력을 끌어올려 검에 불어넣었다. 검 끝에서 순식간에 시퍼런 검기가 두 자나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검기의 그물, 기망(氣網)을 형성했다.
파지직.
기망에 닿는 표창과 비수들이 그대로 바스러지면서 기세를 잃고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 밖은 아래쪽은 낭떠러지이고 위쪽은 급격한 경사의 좁은 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는데, 위쪽 길은 어느새 검은 두건을 쓴 신교의 정예병들이 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동굴 바깥은 낭떠러지의 한가운데 있어 경사가 워낙 가파른 데다 비까지 와서 미끄러웠기 때문에 백골마군과 정예병을 이끌고 온 명왕대주 사마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두 발로 버티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십 명의 정예병이 절벽 위와 연결된 밧줄을 허리에 감은 채 공중에 매달려 석추명을 향해 비도와 표창을 내쏘고 있었다.
석추명은 이들이 품에 지닌 표창과 비도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자 즉시 몸을 날려 이들을 매달고 있는 밧줄을 끊어 버렸다.
신교의 정예병들은 모두 사마곤의 수하로 신교의 5개 대대 중에서도 무공이 높기로 유명한 명왕대원들이었으나 석추명의 칼 짓 한 번을 막지 못하고 밧줄이 끊어지면서 줄줄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멈춰라, 석추명!”
사마곤이 자신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검을 뽑아 들고 석추명을 공격해왔다. 검에서 일어난 경기(勁氣)에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간 일제히 옆으로 누우면서 마치 비가 직각으로 꺾여 내리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사마곤이 교주 남무궁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부동명왕검(不動冥王劍)이었다.
“잘 만났다, 사마곤. 그렇지 않아도 네 녀석을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석추명이 물기로 미끄러운 동굴 벽면을 발로 박차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중양검법 중 숭양일기검의 절초, 어천비락(御天飛落)을 펼쳤다.
스스슥.
그러자 석추명을 향해 날아오던 수백, 수천 개의 물방울이 마치 원래 자리로 빨려 들어가듯 다시 사마곤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타다다닥.
물방울이 사마곤의 검과 몸에 부딪히면서 콩 볶는 소리가 났다. 비록 물방울이 작디작았으나 경기(勁氣)가 실려서인지 사마곤이 입고 있던 옷에 물방울이 부딪히는 자리마다 작은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비천검 독고양에게 화산심법을 전수받았다고 하더니 수천 개에 달하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경기를 실을 줄이야.
사마곤은 석추명의 검을 받는 순간 석추명의 무위가 이미 예전에 자신이 알던 무위가 아님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사마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검을 휘둘렀다.
파바바박.
두 사람의 검이 한차례 부딪히는 순간, 사마경의 옷에 다시 수백 개의 작은 구멍이 생기면서 옷이 삽시간에 누더기가 되어 속살이 다 보였다. 그리고 의복으로 보호되지 못한 맨살에는 수십 개의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석추명은 검을 한 차례 나눈 뒤 허공에서 몸을 틀어 다시 절벽을 박차며 사마곤을 향해 제2 검을 찔러왔다. 그 사이 다시 사마곤의 수하 두 명이 허리를 묶은 밧줄이 끊어지면서 비명소리와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석추명이 숭양일기검의 또 다른 절초 일검단양(一劍斷陽)을 전개했다.
검을 한 번 휘둘러 해를 가른다는 말처럼 순식간에 검이 한번 번쩍하고 지나가자 사마곤은 오른쪽 어깨가 불에 덴 듯이 뜨거워지며 오른팔에 힘이 빠져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석추명이 사마곤을 향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석추명은 지금도 수라대주로 부임하던 날 사마곤과 겨룬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사마곤은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고 방해해왔는데 이제 자신의 손으로 사마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자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흥, 네놈이 만만한 상대를 만나 즐거운 나머지 노부가 있음을 잊어버린 게로구나.”
순간 백골검이 시퍼런 인광(燐光)을 번쩍이며 석추명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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