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39화 (139/201)

#   139 - 광세일소_한추영 - 160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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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분열 (5)

귀면쌍살이 와서 사마경을 데리고 갔다는 연락에 석추명과 남이는 즉시 임예린 일행이 머무는 객잔으로 되돌아왔다.

“대주님, 돌아오셨어요?”

사소혜가 석추명을 맞았다.

“그래 대충 얘기는 들었다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사소혜는 석추명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설랑이라는 놈이 와서 임예린을 납치했다가 때마침 기하진이 구하러 왔기에 아무 탈 없이 돌아왔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임 소저가 지독한 고뿔에 걸려서 지난 이틀 동안 무척 고생했어요. 기침도 심하고 신열이 펄펄 나서 미음조차 못 먹을 정도였어요. 이제 열은 내리기 시작한 것 같으니 들어가서 보세요.”

사소혜의 말을 듣자 석추명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약은 먹었느냐?”

“네. 지난 이틀 동안 기 소협이 고생 많았어요. 손수 탕약을 끓이고 약 수발과 밥 수발을 다 들었답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였어요. 호호호.”

사소혜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 그래?”

웬일인지 그 말을 듣는데 석추명의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석추명이 사소혜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가만히 임예린의 방으로 갔다.

문밖으로 두 사람이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가 석추명의 귀에 들려왔다.

“오라버니께서 저 때문에 요즘 너무 고생이 많으세요. 이제 열도 내렸으니 오라버니도 가서 좀 쉬세요.”

“아니다. 내 걱정은 말고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날 생각이나 하여라. 정도련 군사께서 이따위 고뿔에 지면 되겠느냐?”

“호호호, 고뿔은 꾀로 이길 수가 없네요. 저도 얼른 털고 일어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임예린이 기하진의 농담에 맞장구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진이 저 녀석, 저런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석추명의 머릿속에 있는 기하진은 늘 차가운 표정으로 딱딱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기하진에게 저런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늘 차가운 기하진이 서운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설랑의 소식은 혹시 들으셨나요?”

“설랑 그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이후로 흔적도 찾지 못하겠구나. 그놈이 잡히기만 하면 내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 너에게 그 딴짓을 한 놈을...!”

그 얘기를 들은 석추명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석추명이 급히 문을 두드렸다.

“예린아, 나 추명이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석추명의 소리에 문이 덜컹 열리더니 기하진의 얼굴이 보였다.

“돌아오셨군요.”

기하진의 말투가 다시 원래대로 차가워졌지만 석추명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

석추명이 들어가자 기쁨에 들 떤 임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추명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오셨군요.”

석추명은 걱정이 되어 침상으로 다가가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침상 옆에는 소반 위에 빈 탕약 그릇과 물수건이 담긴 대야가 있었다.

“몸이 얼마나 안 좋은 것이냐? 혹시 설랑 그놈의 손에 다치기라도 한 것이냐?”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저 차가운 밤바람을 좀 쐬었더니 고뿔에 심하게 걸렸을 뿐이랍니다.”

“방을 들어오기 전에 하진이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설랑에게 무슨 짓을 당한 것이냐?”

석추명의 물음에 임예린이 화들짝 놀라며 잠시 기하진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 아니어요. 당, 당하다니요. 추명 오라버니가 잘못 들으신 것이겠지요. 그렇지요, 하진 오라버니?”

임예린이 기하진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래요. 형님이 잘못 들었나 봅니다.”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이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하진이 네가 예린이에게 ‘그 딴짓을 한 놈’이라고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는데...?”

“아, 그 말은 예린이를 그놈이 납치해서 한 소리입니다. 딴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보다 혼자 돌아오셨습니까? 요혜신니와 운진자께서는 안 오셨는지요?”

기하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석추명은 자신이 분명히 들은 얘기를 두 사람이 잘못 들었다고 하며 얼버무리자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과 석추명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 듯했다.

“신니와 운진자께서는 먼저 소림사로 가신다고 했다. 여기는 남 소저와 나 둘만 왔다.”

석추명이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렇군요.”

석추명의 말을 듣던 기하진이 듣는 둥 마는 둥 답을 하더니 손등으로 임예린의 이마를 짚으며 열이 있나 확인했다.

“다시 물수건을 갈아야겠구나. 아직 미열이 있어.”

기하진이 손등으로 임예린의 열을 재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석추명은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자신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속으로 상당히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워졌던가?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하진이 물수건을 대야에 담가 차가운 물에 적신 다음 물을 짜서 임예린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임예린이 편안하게 기하진의 수발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석추명은 왠지 자신이 이 자리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가보마. 그럼 편히 쉬어라.”

석추명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누군가 후닥닥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을 보니 남이가 분명했다. 남이도 방으로 들어오려다 임예린과 기하진의 다정한 이야기 소리에 선뜻 걸음을 내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인사도 못 하고 달아나는 남이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안 되겠군. 오늘은 하진이에게 확실히 물어봐야지, 남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후 임예린이 잠이 들었는지 기하진이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석추명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하진이 나오자 팔을 끌고 살짝 객잔 밖으로 나갔다.

“하진아, 이야기 좀 하자꾸나.”

“무슨 이야기요?”

아까와 달리 기하진의 표정이 다시 무뚝뚝해졌다.

석추명이 그런 기하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남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냐?”

“야밤에 불러내서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하진이 불편한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요전 날 비적단을 쫓을 때 보니 남 소저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네가 몸을 사리지 않고 남 소저를 구하지 않았느냐. 그때 둘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남이는 한때 제 부하였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기하진이 쌀쌀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그래. 하지만 그러니 하는 소리다. 그때부터 남 소저가 너에게 연정을 품은 듯한데 네 태도가 불분명하니 남 소저가 계속 속을 끓이는 것 아니냐? 남 소저가 무림인이지만 마음은 여린 여인이다. 남 소저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라.”

석추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하진을 늘 동생으로 생각하던 석추명이었기에 이번에도 역시 형으로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흥! 형님이 뭘 알아요? 남이의 마음만 중요하고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까?”

기하진이 대뜸 석추명에게 대들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남이에게 확실히 선을 그을 테니 형님도 이 일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기하진이 객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기하진, 이 녀석. 뭘 하려는 거야?”

석추명은 기하진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어 얼른 따라 들어갔다.

마침 남이는 객잔 안에서 사소혜, 금린과 같이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기하진이 대뜸 남이의 팔을 잡더니 밖으로 끌었다. 기하진이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갑자기 남이의 팔을 끌고 가자 남이가 당황하여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함께 있던 사소혜, 금린도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며 그런 기하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기하진!”

석추명이 소리쳤으나 기하진은 잠시 멈추지 않고 남이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남이의 팔을 내동댕이치듯 놓았다. 남이는 평소와는 다른 기하진의 태도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나는 마음에 따로 둔 사람이 있으니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좋겠어. 우리는 단순히 단주와 단원의 관계였을 뿐이야.”

남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기하진이 자기 할 말만 내뱉더니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길로 석추명을 쓱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무심한 얼굴로 객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온 채 날벼락 같은 말을 들은 남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석추명은 기하진의 돌발적인 행동에 남이를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기하진이 이렇게 행동을 한 것은 사실 자신의 책임도 있기에 남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후 내내 먹구름이 잔뜩 껴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갑자기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이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람, 임 소저죠?”

떨리는 남이의 목소리가 기하진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렇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남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기하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남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빗방울이 남이의 얼굴에 쏟아졌다. 남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듯했으나 빗물과 섞여 분간이 어려웠다.

석추명이 얼른 달려가서 남이를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너마저 고뿔에 걸릴라.”

석추명은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간 남이를 부축하여 객잔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소혜가 얼른 달려와 남이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다 젖었군요.”

사소혜가 자신이 알아서 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석추명에게 보내고는 남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석추명은 이마를 손으로 받치고 탁자 앞에 앉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탁자 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진이, 이 녀석을 내 당장...!

석추명은 어금니를 깨물며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은 왜 남이를 기하진과 연결해주려고 한 것일까? 기하진을 사모하는 남이가 안타까워서인가 아니면 임예린에게서 기하진을 떼놓고 싶어서일까?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남이가 걱정되어 그랬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었다.

휴! 큰 일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쓸모없는 감정소모란 말인가.

석추명이 답답한 마음에 그대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비라도 맞으면 정신이 좀 맑아질 것 같았다.

쐐애액!

그때 짧은 화살 하나가 석추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석추명이 본능적으로 화살을 붙잡고 보니 화살에 기름 먹인 종이가 묶여 있었다.

- 지금 즉시 따라오너라. 흑련교주.

그제야 석추명이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니 십여 장 정도 거리에 있는 높은 소나무 위에 누군가 꼿꼿한 자세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산란한 데다 폭우마저 내리는 바람에 사람이 거기 있는 것을 미리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나무 위에 있던 사람은 석추명이 자신을 바라보자 빗속을 뚫고 순식간에 옆에 있는 나무로 몸을 날리며 어디론가 급히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석추명도 공력을 끌어올려 그 사람의 뒤를 쫓아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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