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 광세일소_한추영 - 160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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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분열 (4)
기하진은 남궁세가의 검객들이 지나간 뒤에 나무 위에서 나무 위로 날다람쥐처럼 몸을 날렸다. 임예린을 안고서도 잔가지 하나 건드리는 소리도 내지 않아서 남궁세가 최고의 검객들도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누가 움직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검객 다섯 명이 어느새 한 청년을 포위하고 있었다. 청년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은 남궁척? 남궁세가 사람들이 왜 남궁척을 쫓는단 말인가?’
남궁척은 맹주 남궁진악의 조카이자 현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진환의 외동아들이었다. 남궁세가의 다음 대를 이어갈 가주를 남궁세가의 검객들이 쫓았다? 뭔가 납득가지 않았다.
“척아, 네가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더 이상 머뭇거릴 것 없이 우리와 함께 돌아가자.”
남궁세가 검객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남궁척에게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둘째 숙부님,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숙부님들도 정신 차리십시오. 이건 우리 가문을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문을 멸문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벌써 전 무림이 우리 가문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이게 모두 백부님의 망상 어린 야욕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미치광이가 백부님이라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닥쳐라!”
현 남궁세가 가주의 동생이자 맹주의 두 번째 동생인 남궁진연이 노해서 목에 핏대가 생기도록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우리 남궁세가의 장남이거늘 네 녀석이 어찌하여 맹주이신 네 백부님을 그토록 모욕한단 말이냐? 네 백부님은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오대 세가의 가주 가운데 최초로 무림맹주가 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우리 남궁세가가 어떤 강호지사(江湖之事)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토대를 닦으려고 하시는 것이야. 전 무림이 우리 남궁세가를 떠받든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느냐?”
“무력으로 다른 문파를 억압하여 억지로 순종하게 한들 그게 과연 진정으로 존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 만한 일들을 어찌 남궁세가의 장로님들께서는 모르십니까? 아니 모르는 척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볼이 홀쭉한 검객이 나섰다. 그 사람은 남궁척의 셋째 숙부 남궁진수였다.
“시끄럽다. 이번에 하북팽가만 꺾으면 오대세가 중에서 더 이상 우리 남궁세가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 가문은 없을 것이다. 흥! 그동안 팽가 놈들이 자기네 세를 믿고 우리 앞에서 얼마나 건방을 떨었느냐? 그런 놈들은 맹주님의 명이 아니더라도 진즉에 휩쓸어 버렸어야 할 놈들이야. 잔말 말고 우리와 함께 돌아가자. 하북팽가 놈들에게 우리 남궁세가와 맞서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야지.”
“싫습니다! 저보고 팽가의 가주이신 팽연의 목을 직접 치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팽연은 제 벗이었던 팽호의 부친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시니까, 셋째 숙부님?”
“네가 팽호와 천림원에서 수학하기는 했지만 어찌 팽호 따위가 네 벗이 되겠느냐? 그리고 네가 이번 일을 거부할수록 네 부친의 입장이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셋째 숙부 남궁진수의 말에 이어 이번에는 막내 숙부인 남궁진충이 말했다.
“네가 이번 일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가문의 제일 어른이신 맹주님께서 직접 결정하신 일이야. 맹주님이 결정하신 일은 네 아버지인 남궁세가의 가주라 하더라도 감히 거역할 수 없다. 그 사실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네 녀석 때문에 지금 가주님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 아느냐?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당장 돌아가자꾸나.”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이십시오.”
남궁척이 비장한 눈빛으로 외쳤다.
“네 녀석이 아무리 남궁세가의 장남이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 숙부들이 네놈을 강제로 끌고 가는 수밖에. 아우님들, 손을 쓰시게나.”
남궁척의 숙부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들고 남궁척을 공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일 대 오의 싸움이 벌어졌다.
기하진은 남궁척이 평소에 말이 없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 지금까지 별로 교류가 없었는데 이제 숙부들과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남궁척이 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맹주에게 반항하는 태도가 자신의 마음과 딱 부합하여 당장 남궁척을 구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하진이 싸움에 개입하려고 하자 임예린이 눈치를 채고 얼른 기하진을 붙잡았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저들은 남궁세가의 장남을 다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임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기하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사마경에게 또 속은 것 같습니다. 맹주는 아미파가 아니라 하북팽가를 칠 계획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마경은 우리가 맹주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멀리 사천 아미산으로 쫓아 보내려 했던 것이지요.”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흠칫하여 임예린을 돌아보았다.
“그 늙은이가 정말 천 년 묵은 여우로구나.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당시 사마경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요혜신니께서 당신의 사문이 위태롭다는 말을 들으시자 마음이 급해지셨어요. 그래서 저도 다른 말을 드릴 수가 없었죠. 이제야 사마경이 그때도 농간을 부렸음을 확실히 알겠어요.”
“그럼 어떡한단 말이냐?”
“일단은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해요. 우리가 이번 일을 알아챘다는 것을 맹주가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요. 차라리 맹주가 하북팽가를 칠 때 우리가 불시에 나서서 하북팽가를 도와 맹주의 계획을 좌절시켜야 합니다.”
임예린의 말을 듣던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게 좋겠구나. 그럼 어서 돌아가서 이 모든 일을 말씀드리도록 요혜신니께 빨리 오시라고 해야겠구나.”
기하진과 임예린은 남궁척이 결국 숙부들의 손에 붙잡혀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조용히 다시 객잔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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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님, 면목 없습니다.”
사마경은 식은땀을 흘리며 맹주 남궁진악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남궁진악은 사마경의 얼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뒷짐을 지고 서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맹주 옆에는 귀면쌍살과 음양사자, 원무개가 시립해 있었고 그 뒤 탁자에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이 앉아 있었다.
“저놈들이 역천마라진의 파훼법을 생각해낼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사마경의 다급한 말에 맹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군사께서 직접 풀지 않으면 천하의 그 누구도 풀 수 없다는 진법을 그놈들이 무슨 재주로 파훼법을 알아냈겠나? 그게 다 자네의 도움 때문이었을 테지.”
맹주의 비웃음이 차가운 비수처럼 사마경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사마경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연신 옷자락에 닦았다.
“그놈들이 그런 기발한 방법을 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게 모두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맹주님. 하지만 제가 저들에게 붙잡혔을 때 저들이 맹주님의 대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 치 혓바닥을 좀 놀렸습니다. 아마 지금쯤 요혜신니와 정도련 인사들이 발바닥이 닳도록 아미산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하북에서 진행하실 거사에 저들이 방해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궁진악은 연신 손바닥을 비비는 사마경을 마뜩잖은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역천마라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사마경의 노력이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그건 잘했군.”
남궁진악의 한 마디에 사마경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고 남궁진악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남궁진악이 옆에 있던 원무개에게 갑자기 말했다.
“총군사를 숙소로 모시고 가라.”
남궁진악의 말에 사마경은 속으로 안심했다. 맹주의 화가 좀 누그러진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다음 말에 사마경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정도련 인사들과 접하여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지 모르니 당분간 맹 밖으로의 출입은 물론, 숙소 밖으로의 출입도 금한다.”
“존명.”
원무개가 포권을 취하며 맹주의 명을 받들더니 사마경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만 나가시지요.”
사마경은 가슴이 섬뜩하여 맹주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맹주의 눈길에 냉소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임예린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 ‘제가 알기로 맹주는 그 누구보다 자비심이 없는 사람인데 총군사님이라고 용서해줄까요?’
-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맹주가 야욕을 달성하면 자신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총군사를 과연 그냥 내버려 둘까요?’
사마경은 그제야 임예린과 손을 잡는 것보다는 맹주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단 말인가?’
맹주전 밖으로 나가는 사마경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남궁진악이 귀면쌍살에게 한마디 툭 던지듯 말했다.
“총군사 일은 잘 처리했다, 석문.”
“감사합니다, 맹주님.”
귀면쌍살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여봐란듯이 음양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남궁진악이 이번에는 음양사자를 질책하며 말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맹주님.”
자신과 달리 음양사자를 대하는 맹주의 말투에 귀면쌍살은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음양사자도 수하이거늘 어찌 실수를 그냥 넘어가며, 또한 저 정중한 말투는 무엇이란 말인가? 설마 음양사자의 무공 때문에 맹주도 음양사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인가?
귀면쌍살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맹주가 음양사자와 귀면쌍살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이 정중히 포권을 취하고 방에서 나가자 남궁진악은 아우 남궁진환에게 말했다.
“척이는 찾았나?”
“지금 아우들이 찾고 있습니다.”
“아들놈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하나밖에 없는 놈이 그토록 물러 터진 게야?”
남궁진악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남궁진환이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에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남궁척 그놈은 진즉에 내쳤을 텐데.”
남궁진악이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하자 남궁진환이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그 아이가 제 어미를 닮아 마음이 좀 약한 것이 문제입니다만 똑똑하기 짝이 없는 녀석입니다. 가문을 걱정하는 형님의 지극한 마음을 금방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팽연의 목을 베는 일은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남궁진환은 남궁척이 그 일을 얼마나 내켜 하지 않는지 잘 알았다. 자식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에 남궁진환이 자신이 하겠다고 하자 금방 남궁진악의 노성이 떨어졌다.
“네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 빠졌으니 척이가 그 모양이 아니냐? 그래서 그 녀석이 이 험난한 강호에서 우리 가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남궁진악이 동생 남궁진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명심하거라. 이번에 남궁척이 팽연의 목을 베지 못한다면 그 녀석에게서 장남의 지위를 뺏는 것은 물론, 내 명을 어긴 죄를 물어 무림맹 지하감옥에 유폐해 버리겠다. 그리고 너는 셋째의 장남, 남궁민을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남궁진악의 말에 남궁진환이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급히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형님. 척이가 알아듣게 잘 말하겠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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