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 광세일소_한추영 - 1595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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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분열 (2)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길, 찬 서리가 내린 풀잎이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풀잎을 밟고 빠른 속도로 내닫는 거침없는 발걸음들. 바로 요혜신니와 기하진의 일행이었다. 요혜신니는 날이 밝는 대로 말을 구해서 타기로 하고 밤에는 경공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는 또 다른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요혜신니가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일행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십 장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고요한 밤이라 그런지 그 소리는 일행 중에 공력이 제일 낮은 남이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기하진이 요혜신니에게 말하고 가볍고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갔다. 기하진의 움직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 전과는 달리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봉은 기하진의 경공을 보면서 속으로 묵묵히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다.
‘더욱 쉬지 않고 노력하리라.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저 경지에 이르겠지.’
잠시 후, 정찰을 나갔던 기하진이 돌아왔다.
“앞에 수십 명의 무리가 인근 마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비적단들인 듯합니다.”
“비적단? 이 주변은 비적단이라고는 없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을꼬?”
기하진의 말에 요혜신니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다른 특징은 없던가?”
“상당수 비적들이 이마 한가운데 붉은 점을 찍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그런 놈들을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게 무슨 표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하진의 말에 일봉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듯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놈들 가운데 피부와 머리 색깔이 온통 하얀 벌거숭이 놈이 하나 있지 않았습니까?”
기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마 한가운데 붉은 점을 찍은 놈들이라면 적비랑(赤飛狼) 놈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비랑?”
요혜신니가 일봉에게 되물었다.
“천산산맥을 주름잡던 흉포하기 짝이 없는 비적단 놈들입니다. 일전에 임풍 대방을 모시고 살말건으로 가다가 맞닥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놈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지난번 사천대전 때도 나타나더니 여기까지 나타났군요.”
일봉의 말이 끝나자 기하진이 덧붙였다.
“그냥 가면 아무래도 근처의 민가 수십 채가 피해를 볼 듯합니다.”
그 말에 요혜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본문(本門)의 일이 급하다고는 하나 눈앞에서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비적단들이라고 하니 무공이 그렇게 높지는 않을 게야. 기 소협과 석 소협, 그리고 남이가 남아서 저들을 소탕하고 뒤쫓아 오게나.”
요혜신니의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요혜신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이에게 말했다.
“두 분 소협에게만 맡겨도 되겠지만 아미파 제자로서 의협(義俠)을 행하는 일에 다른 사람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너도 같이 보내는 것이니 최선을 다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요혜신니에게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이 길을 떠나려고 하자 일봉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하진에게 다가왔다.
“기 소협, 그놈들 중에 아까 얘기한 피부 색깔이 온통 하얀 놈이 두목이니 그놈을 꼭 잡아야 합니다. 당연히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지만, 그놈은 일전에 임 소저를 납치까지 했던 놈입니다. 이놈들이 있는 곳에서 아가씨가 계신 곳이 멀지 않으니 신경이 쓰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같이 가고 싶으나 사문의 일 때문에 지금 당장 몸을 뺄 수가 없군요.”
일봉의 말에 기하진이 일봉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린이는 저에게 동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놈들 중 어떤 놈도 예린이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할 테니 마음 놓고 아미산으로 달려가십시오.”
마침 남이가 옆에 있다가 기하진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갑시다.”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과 남이는 동시에 경공을 전개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세 사람의 신형이 깃털처럼 날아올랐다.
*****
석추명과 기하진, 남이 세 사람은 비적들의 뒤를 쫓아 근처 마을 인근까지 갔다. 비적들은 마을 인근에서 누구를 기다리는지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세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근처에서 그들을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석추명은 남이가 아까부터 계속 기하진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기하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심각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요혜신니가 자신과 남이를 맺어주려고 했을 때 기하진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얘기하던 남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이가 안보는 척 또다시 기하진의 얼굴을 훔쳐보다가 그만 석추명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남이는 석추명에게 들켜서 부끄러운지 얼굴에 금방 홍조가 피어오르더니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남이가 튀어 나가자 기하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곧바로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이렇게 무작정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기하진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석추명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은 누가 보더라도 남이를 걱정하는 말이 분명했다.
석추명은 그런 기하진을 보며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기하진이 남이와 잘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는 비적단의 무공이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나겠나 싶어 비적단의 뒤에 바싹 따라붙어 담벼락에 몸을 숨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자신의 좌우에서 세 개씩 총 여섯 개의 검이 질풍처럼 자신을 찔러 들어왔다.
검을 놀리는 솜씨가 워낙 신묘하고 전광석화 같아서 도무지 비적단의 솜씨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남이는 일순간 방심했다가 갑자기 여섯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화들짝 놀랐다. 다급히 검을 휘둘러 적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한 번에 여섯 자루의 검을 모두 막아내기는 아직 벅차 그만 두 개는 놓치고 말았다. 두 자루의 검이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독사같이 남이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헉!”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번개같이 뛰어들어 온몸으로 남이를 감싸 보호하며 한 손으로 남이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경쾌한 금속성이 ‘띠딩’ 하고 두 번 울리며 남이가 놓친 검 두 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단했다.
남이는 익숙한 체취와 함께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따뜻한 손 느낌에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나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왜 그래? 혈도라도 찍힌 건가?”
남이가 휘청거리자 기하진이 남이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물었다. 그 순간 기하진의 얼굴은 남이의 얼굴에서 한 치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아 기하진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질 정도였다.
“아, 아닙니다.”
남이가 당황하여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때 남이를 공격했던 여섯 명의 검객 중 한 명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사내의 말에 기하진이 사내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군. 당신들, 비적도 아니면서 비적들 틈에 숨어 있는 이유가 뭐지?”
기하진의 말에 이번에는 여섯 명의 사내들이 움찔거렸다. 여섯 명의 사내는 휘장을 두른 커다란 방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기하진은 이들과 한번 손을 섞고는 이 여섯 명의 무공이 절대 예사 실력이 아님을 파악했던 것이다.
기하진과 남이를 뒤따라 오던 석추명은 여섯 명의 검객이 쓰는 무공을 보고 차갑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탈명대 소속의 추혼팔검(追魂八劍)이 아니냐? 여기는 무슨 일이냐? 나머지 두 명은 어디에 있지?”
석추명이 나타나자 여섯 명의 검객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석 대주님을 뵈옵니다.”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추혼팔검? 그렇다면 이놈들이 모두 마교 놈들이란 소리잖아?”
마교라는 치를 떠는 기하진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때 비적들이 우르르 몰려와 석추명과 기하진, 남이를 에워쌌다.
“대주님, 교주님의 명으로 부득이 대주님께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말과 동시에 여섯 명의 검이 차가운 검기를 뿌리며 동서남북 사방에서 석추명을 찔러 들어왔다. 교주 남무궁은 전 교도들에게 도망간 석추명을 보면 무조건 척살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추혼팔검은 부대주급에 육박하는 놀라운 무공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여덟 명이 한꺼번에 펼치는 추혼팔도(追魂八道)라는 합격진은 석추명의 스승이었던 뢰정마저 찬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석추명이 이들의 검을 받아내기에 앞서 기하진이 뛰어들어 추혼육검의 공세를 막아냈다.
“형은 마음이 약해 이들을 상대하기 힘들 테니 비적 놈들이나 맡아.”
기하진이 추혼육검의 검을 떨쳐내며 소리 질렀다.
자신의 속마음을 족집게처럼 찍어낸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직속 수하는 아니었으나 한때 자신이 수하로 여기던 자들에게 어떻게 검을 꽂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영웅은 마음이 독해야 하는데 나는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 영웅이 되기는 글렀군. 그렇다면 차라리 하진이에게 맡기는 것이 낫겠지.
“그러마. 나는 비적단을 처리하마.”
석추명과 남이가 비적단을 향해 달려갔다.
적비랑은 천산산맥에서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이리 떼로 천산산맥을 넘어가는 모든 상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여기서는 입장이 바뀌어 온순한 양 떼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석추명과 남이가 하늘을 나는 이리와 마찬가지였다.
휘리릭, 소리가 나더니 어딘가에서 강철 유성추 두 자루가 석추명을 향해 날아왔다. 커다란 유성추는 무쇠로 만들어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데 온통 삐죽삐죽한 가시로 덮여 있어서 한 대 맞았다가는 뼈도 추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석추명은 날아오는 유성추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검집째 그대로 유성추를 때렸다. 유성추가 돌연 날아오던 것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제 주인을 향해 되돌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유성추가 그대로 제주인의 가슴팍을 내리찍으면서 유성추의 원래 주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석추명과 남이의 무위에 겁에 질린 비적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일제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런!”
석추명이 도망치는 비적단을 쫓기 시작했지만 불과 몇 명밖에 잡지 못했다.
“네놈들 여기서 무슨 수작이었느냐?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석추명이 잡은 놈들을 족쳐보았지만 모두 두려움에 벌벌 떨며 헛소리만 지껄일 뿐이었다. 보아하니 비적단에서 그다지 위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기하진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한 놈들!”
석추명이 고개를 돌려 보니 기하진을 공격하던 추혼육검 가운데 두 명이 심장이 뚫린 채 절명하여 기하진의 앞에 고꾸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석추명이 묻자 기하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석추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교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 지는 형이 더 잘 알지 않아? 이 두 놈이 나한테 붙잡히니 나머지 네 녀석이 이 놈들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고는 도망갔어. 지독한 놈들.”
숨이 끊어진 추혼육검 가운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빛에 경멸감이 어려 있었다.
기하진의 말을 들은 석추명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추혼육검은 적에게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동료를 죽여 입막음을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예린이에게 가봐야겠어. 여기에 갑자기 마교 놈들이 나타난 것이 수상해. 형은 남이와 함께 다시 요혜신니의 뒤를 따라가. 나도 별일 없으면 곧 뒤따라 갈 테니.”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임예린이 걱정되기는 했으나 아까와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자신보다 기하진이 가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요혜신니에게 금방 뒤따라 간다고 했으니 두 사람이 모두 빠지기도 어려웠다.
“조심해라.”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남이는 사라지는 기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린이에게 가봐야겠다’는 기하진의 목소리가 자꾸만 남이의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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