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 광세일소_한추영 - 15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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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지혜 대결 (5)
석추명의 망연자실한 모습에 기하진이 자신의 가슴을 열어젖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음양사자, 나는 어차피 당신의 손에 한 번 패했으니 나를 죽이시오. 자, 내 심장을 꺼내 가시오. 어서!”
“안 됩니다, 선배!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두 사람을 살려주십시오.”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음양사자가 눈꼬리를 추켜 올렸다.
“아무래도 이 두 연놈을 모두 죽여야 네가 흔들리지 않겠구나.”
음양사자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제 그 손이 임예린의 천령개에 떨어지기만 하면 임예린은 즉사해 버릴 것이다.
음양사자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기하진과 석추명의 등 뒤에 축축하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임예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사람을 향해 소리 질렀다.
“오라버니들, 어째서 죽을 생각만 하세요? 두 분이 힘을 합쳐 싸워보세요. 두 분은 중양신공을 절반씩 나뉘어서 익혔으니 두 분이 힘을 합치면 둘로 나뉜 신공이 하나로 합치지 않겠어요?”
기하진과 석추명이 중양신공을 바탕으로 절세 무공을 터득했으나 두 사람의 무공은 사실 반쪽짜리 무공이었다. 기하진은 내력은 고강하나 그 내력을 풀어나갈 상승 무공이 부족했고, 석추명은 귀신도 놀랄 정도로 검술이 오묘했으나 내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했다.
임예린은 두 사람이 한 가지 신공을 나뉘어 익힌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데다 자신의 무공은 보잘것없으나 눈썰미가 빠르고 두뇌가 명석하여 벌써 이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과 석추명은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듯 동시에 섬광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진아, 내가 검으로 공격할 테니 네가 장법을 펼치거라.”
기하진은 석추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두 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음양사자의 옆구리를 향해 장력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석추명의 검이 음양사자의 어깨를 겨냥하고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자 과연 두 무공이 아귀가 딱 맞아 전혀 빈틈이 없었다.
음양사자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임예린을 붙잡은 손을 놓고 공중으로 높이 도약했다. 음양사자의 붉은 옷이 허공에 펄럭이자 커다란 붉은 꽃이 공중에 피어난 것만 같았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세 사람의 목숨쯤은 언제든지 간단히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 하리라.
“어리석은 놈들.”
음양사자가 움직이자마자 기하진이 아래에서 위로 쌍장을 교차하여 힘차게 뻗어내며 선공을 가했다. 그러자 곧 광풍노도(狂風怒濤)와 같은 장력이 음양사자에게 몰려들었다.
“흥!”
음양사자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펄럭이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기하진을 향해 아무렇게나 한 손을 쳐들고 자신의 또 다른 절학, 구유백귀장(九幽百鬼掌)을 펼쳤다.
펑!
기하진의 양강한 내력과 음양사자의 음유한 내력이 부딪히는 순간, 석추명이 숭양일기검 삼도종검세(三到鐘劍勢)로 음양사자를 베어갔다. 삼도종검세는 상대방의 어깨와 허리, 다리를 노리는 수법으로 한 번 공격에 삼삼은 구, 총 아홉 번의 변초가 숨어 있었다.
음양사자는 기하진의 장력에 맞서느라 두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다리를 교묘히 놀려 무릎을 노리고 날아드는 석추명의 검을 피했다.
그러자 석추명의 검초가 대번에 변하더니 구렁이가 담을 타고 넘어가듯 그대로 허리와 어깨를 공격해왔다.
음양사자는 신공을 완성한 이후로 자신의 무공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하진과 석추명 모두 한 사람씩 놓고 본다면 아직 자신에게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몇 배의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기하진을 겨냥한 공격은 석추명의 검에 막히고, 석추명을 겨냥한 공격은 기하진의 웅혼한 장력에 막혀 도무지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게 되자 음양사자는 놀라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공을 완성하고 처음으로 낭패감이 들었다.
‘이 무공이 정말 중양일지에 있던 그 무공이란 말인가?’
음양사자는 자신도 중양일지를 보았기에 중양신공쯤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무공은 자신이 책 속에서 봤던 무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무공이 이토록 놀라운 상승효과를 발휘한 데는 음양사자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이 형제보다 끈끈한 관계로 이어져 있어 자신의 안위보다 상대방의 안위를 더 위한다는 점이었다.
석추명은 형으로서 기하진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했고, 기하진은 겉으로는 쌀쌀맞으나 속으로는 역시 석추명을 친형처럼 여겼기에 석추명이 위험해지면 자신의 안전은 제쳐놓고 석추명을 구원했다.
이러다 보니 두 사람이 펼치는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음양사자는 두 사람의 공격에 손발이 다급해지자 귀연신공을 펼쳐 몸을 숨겼다. 무림의 대선배로 자처하는 자신이 후배들의 공격을 받고 피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퍽!
음양사자의 몸이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에서 사라졌다. 자존심은 상하나 자신이 피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두 사람은 결코 자신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음양사자의 몸이 미처 다 사라지기도 전에 석추명의 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자신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허억!”
검이 음양사자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옷자락이 검날에 베여 나풀거렸다. 반 치만 더 깊게 들어왔다면 자신의 허리는 반으로 갈라져 핏물을 뿜었을지도 몰랐다.
음양사자가 갈라진 옷자락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석추명과 기하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현 무림에서 음양사자를 능가할 만한 이는 암만 생각해봐도 소림신승이나 화산파 태상장로 독고양밖에 없었다. 맹주 남궁진악과 신교의 교주 남무궁의 무공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음양사자와 비교하여 월등히 뛰어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들이 힘을 합치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음양사자와 대등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음양사자를 능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림맹주나 신교의 교주를 상대로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석추명이 검을 거두며 음양사자에게 말했다.
“선배님, 아까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도 칼날에 사정을 두었습니다. 이제 저희를 그냥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음양사자는 패배를 시인하는 듯 두말없이 몸을 돌려 길을 터주었다.
석추명과 기하진은 음양사자의 마음이 바뀔까 봐 임예린과 임풍 부부를 엄호하고 서둘러 음양각을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드넓은 무림맹 총단에 사람 그림자는 이상하리만큼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군데군데 횃불과 화톳불만 타오르며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임예린의 어머니 방씨 부인은 오랫동안 묶여 있다가 갑자기 급하게 뛰려 하니 숨이 차서 몇 걸음 못 가 헉헉댔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임예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방씨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다. 나 때문에 걸음이 늦어지는구나.”
방씨 부인은 미안하고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석추명이 자신의 등을 방씨 부인에게 보이며 말했다.
“아들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업히십시오.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보다 못한 석추명이 방씨 부인을 등에 업었다.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제일 앞에서 달려가던 기하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오라버니?”
임예린이 기하진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무림맹 정문 앞에 어느새 군사 수십 명이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로 늘어서 있는 게 아닌가.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는가, 기 단주?”
군사들 속에서 누군가 담뱃대를 물고 걸어 나왔다. 왕취선이었다.
기하진은 자신들의 앞을 막고 선 왕취선을 노려보았다.
“비키십시오.”
기하진의 말에 왕취선이 곰방대를 입에서 떼고 허공으로 연기 한 모금을 피워 올렸다.
“허허허,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네.”
“우리는 진법을 통과했고, 음양사자와 귀면쌍살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앞을 막으시는 겁니까?”
그래도 한때 무공 스승이었던 자라 기하진은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허허허, 미안하지만 원래부터 관문이 세 개였다네. 자네가 앞의 두 관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네. 여기를 마저 통과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네. 첫 번째 관문은 총군사가 설치한 것이나 두 번째, 세 번째 관문은 맹주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라네. 나도 설마 자네들이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과연 맹주님의 용의주도하심은 따라갈 수가 없군.”
왕취선이 감탄한 목소리로 은근히 맹주를 치켜세우자 기하진은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진을 통과하면 무사히 보내주기로 해놓고서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맹주 남궁진악이 한 입으로 두말했으니 그러고도 그자를 무림인이라 칭할 수 있습니까?”
왕취선을 노려보는 기하진의 눈이 불이라도 뿜을 듯했다. 강호사에 관심 없는 탈속한 은둔 기인으로만 여기던 왕취선마저 맹주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기하진에게 더욱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자네, 아직 순진한 면이 있구먼. 자네가 그래도 한때 내 제자였으니 알려줌세.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요, 말이 필요 없는 곳이라네. 예전에 한 약속만 믿고 우리가 자네를 순순히 보내줄 것으로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지.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과 결과네. 무슨 방법을 쓰든, 어떤 속임수를 쓰던 다 괜찮아. 살아남을 수만 있고 결과만 좋으면 말이야. 지금처럼 말이지.”
왕취선이 담뱃대를 뻐끔거리며 건들건들 기하진에게 다가왔다.
기하진은 왕취선의 담배 연기가 독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하진은 잠시 숨을 참고 즉시 맹공을 펼쳐 길을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참, 노파심에서 말하네만 자네와 석 대주는 내 독연을 피할 수 있어도 나머지 세 사람은 어려울 걸세. 숨을 참아봤자 얼마나 참을 수 있겠는가? 흐흐흐.”
왕취선이 기하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냥 말했다.
담뱃대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사라지지도 않고 안개처럼 뭉쳐 임풍 부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하진과 석추명은 임예린과 임풍 부부를 안아 들고 경공을 발휘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챘는지 군사들이 다섯 사람을 빙 둘러 에워쌌다.
“자, 그럼 누가 실력 발휘를 한번 해보겠는가? 무공으로만 따진다면야 나 왕팔야가 음양사자의 발끝에도 못 미칠지 모르나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나라고 음양사자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지.”
왕취선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기하진과 석추명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 별안간 무림맹 담장 위에서 날카롭게 울부짖는 고양이 소리가 들리더니 콩알 같은 검은 구슬 다섯 개가 왕취선을 향해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다.
왕취선이 놀라서 구슬을 피하려고 했으나 검은 구슬들은 애초에 그를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 듯 왕취선과의 거리를 약 한두 자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팡’, ‘팡’ 소리를 내며 저절로 터지더니 곧 시큼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절령오독환(切靈烏毒丸)! 누구냐. 썩 정체를 드러내지 못할까!”
“호호호, 영감의 담배 연기와 상극이라 그런지 잘 아는구나. 이따위 산공독(散功毒)으로 지금 누구를 위협하는 거야? 영감, 진짜 독이 뭔지 내가 좀 보여줄까?”
눈앞의 젊은 여인이 단번에 담배 연기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왕취선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소혜였다.
석추명이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사소혜가 음양묘와 함께 앞에서 달려오고 그 뒤로 남이, 운진자와 곤륜칠검, 현암자 등의 고수들이 대거 무림맹 담장을 뛰어넘으며 나타났다.
임예린은 그들을 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웃었다.
“때마침 잘 왔군요.”
“호호호, 과연 모든 게 임 소저가 예측한 대로군요. 무림맹 쓰레기들이 이렇게 신의가 없을 줄이야.”
“물도 오래 괴면 썩잖아요? 맹의 수장이 바뀌지 않은 지 30년이 다 되었으니 썩을 만도 하지요. 그보다 말씀드린 대어는 낚았나요?”
“호호호, 아무리 생각해도 신계자(神計子)라는 별호는 임 소저가 써야 할 것 같아요. 임 소저의 말대로 가봤더니 정말 대어가 한 마리 있더군요. 하지만 썩은 물에서 놀던 대어라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소혜와 임예린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석추명과 기하진은 두 여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라 두 사람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소혜는 궁금해하는 석추명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게 있답니다, 대주님. 이따가 직접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사소혜와 임예린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왕취선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세 번째 관문마저 실패한다면 맹주님께 뭐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큰소리를 뻥뻥 쳤던 자신의 산공독마저 무용지물이 된 지금, 승산이 낮아도 군사를 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당장 저놈들을 잡아라.”
왕취선의 말에 정렬해 있던 군사 수십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기 소협, 석 소협,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임 대방 내외분을 모시고 나가시게나. 밖에 청풍도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운진자와 곤륜칠검, 남이와 현암자가 검을 뽑아 들고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 짓거리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었는데 오늘 마침 잘 만났다, 요놈들아!”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기다랗게 휘파람을 불며 여덟 가닥의 흰 무지개가 되어 앞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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