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33화 (133/201)

#   133 - 광세일소_한추영 - 1588876

#

제132화 지혜 대결 (4)

“스승은 무슨 우라질의 스승!”

기하진이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남궁진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궁진악이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거늘. 쯧쯧.”

남궁진악의 말에 뛰쳐나가려는 기하진을 석추명이 잡았다.

“진정해.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석추명의 말이 맞았다. 기하진은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한 기세는 누그러뜨렸으나 여전히 남궁진악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맹주님, 사마경 선생이 역천마라진을 파훼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지키시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임예린이 사마경과의 약속을 내세웠다. 그러자 남궁진악이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사마경이 무림맹주인 줄 아는가? 사마경과 한 약속을 왜 내게 말하는 거지?”

그러자 임예린의 낯빛이 변했다.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설마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건가요?”

남궁진악은 임예린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좌우에 선 음양사자와 귀면쌍살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해. 모두 없애도 좋다.”

“존명”

남궁진악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날렸다.

그러자 기하진이 참지 못하고 남궁진악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남궁진악! 어디로 내빼려고 하느냐?”

하지만 기하진은 서너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음양사자의 손길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기하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네 녀석이 나를 이긴다면 그때는 맹주님을 뵙게 해주지.”

그 말에 기하진이 음양사자를 바라보며 등에 찬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맞붙을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선배님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봐 드리지 않겠습니다.”

“호호호, 기하진, 정말 오만방자하구나. 네놈이 중양신공과 천마검법을 익혔다고 스스로 자부심이 대단한가 본데, 그 비급들이 모두 애초에 어디에 있었는지 잊지는 않았겠지?”

음양사자의 말에 기하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둘 다 천림비고에 수장되어 있었지. 나 음양사자가 그 두 비급을 보지 않았을 것 같은가?”

음양사자가 양손을 갈고리처럼 내밀고 기하진에게 달려들었다.

기하진은 음양사자의 귀조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지라 처음부터 극성의 천마검법을 펼쳐냈다.

콰릉.

검기를 주입하자 검에서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더니 돌연 뜨거운 화염이 허공을 쓸고 지나갔다.

“과연 대단하구나. 천마검보를 네놈에게 주었을 때 네놈이 예전 홍진노괴의 무공수위를 능가할 줄은 몰랐느니라.”

기하진의 검이 세찬 소리를 내며 음양사자를 압박해 들어갔다.

“이제 알았다면 물러서시오.”

기하진의 검에서 갑자기 화염이 한 자 이상 뻗어 나오며 금방이라도 음양사자의 옷과 머리를 태울 듯했다. 하지만 화기가 다가오자 음양사자의 몸이 ‘팍’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음양사자의 독문보법, 귀연신공(鬼煙神功)을 펼친 것이다.

기하진의 화염검이 음양사자가 서 있던 곳을 헛되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하진과 음양사자가 맞붙는 동안 석추명은 귀면쌍살을 상대하고 있었다. 귀면쌍살은 아내의 죽음 때문에 석추명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다.

귀면쌍살이 손에 공력을 모으자 손이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석추명, 네놈이 화산에서 기연을 얻었다지만 오늘은 기필코 네놈의 살을 발라내고 뼈를 씹으리라.”

귀면쌍살이 공중으로 높이 도약을 하더니 위에서 아래로 번개같이 손을 연달아 내뻗으며 철산장 가운데의 절초(絶招)인 연환파산장(連環坡山掌)을 펼쳤다. 처음부터 강공을 펼친 것이다. 귀면쌍살은 석추명의 검법이 워낙 귀신같이 빠르므로 조금도 반격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숨쉴 틈 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석추명은 스승 뢰정에게 전수받은 독문경공, 신룡보를 펼쳐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석추명이 피할 때마다 귀면쌍살의 장법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포탄이 터지듯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세차게 피어올랐다.

과연 귀면쌍살의 내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석추명은 검을 뽑아 들 여유조차 없었다. 귀면쌍살은 내력 소모가 심한 연환장을 펼치면서도 기세가 줄기는커녕 손을 뻗을 때마다 오히려 더욱 사나워지는 듯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절대 승기를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검을 뽑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한다?

그때 문득 예전에 초의공이 선보였던 어검술(御劍術)이 떠올랐다. 초의공은 당시 검을 잡지도 않고 허공에서 조종하여 적을 공격했었다. 당시 초의공의 어검술이 하도 신기해서 그 원리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성공할지는 모르나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추명이 뒤로 둥글게 공중제비를 돌아 연달아 뻗어오는 귀면쌍살의 공격을 피하면서 정신을 모으고 공력을 등에 있는 검에 집중했다.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저절로 검집에서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공중 높이 치솟았다.

됐다! 석추명이 당시 초의공에게 전수받은 어검술의 원리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검을 조종하자 검은 허공에서 한 바퀴 선회하더니 검 끝을 앞으로 세우고 곧장 귀면쌍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귀면쌍살은 석추명을 공격하다가 돌연 검 한 자루가 자신을 공격해오자 깜짝 놀랐다.

‘설마 어검술마저 쓴단 말인가?’

날아드는 검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귀면쌍살은 석추명을 공격하던 손길을 멈추고 서둘러 검을 뽑아 석추명이 던진 검을 막아냈다.

챙강!

저절로 날아온 검이지만 석추명이 두 손으로 붙잡고 휘두른 것처럼 위력이 막강했다.

검을 붙잡은 귀면쌍살의 손이 순간 저릿할 정도였다.

설마 이 녀석의 내공마저 이제는 자신을 앞지를 정도란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석추명의 내공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력이 상당히 고갈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귀면쌍살의 내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도 사람인데 내력 소모가 극심한 연환장을 벌써 몇 차례나 펼쳐냈으니 힘이 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귀면쌍살이 어검술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석추명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기를 조절하여 공중에 뜬 검을 조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 번 이상의 공격은 힘들었다.

‘아직 내력이 부족하여 어검술은 더 이상 쓸 수 없겠구나. 아쉽군.’

허공에 뜬 검이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석추명이 물찬 제비처럼 몸을 날리며 비천검을 손에 쥐었다. 일단 검이 손에 들어온 이상, 귀면쌍살의 공력이 아무리 높아도 무섭지 않았다.

귀면쌍살이 승기를 한번 놓치자 두 사람의 입장이 대번에 바뀌었다.

이번에는 귀면쌍살이 철산장을 펼치지 못할 정도로 석추명이 맹공을 퍼부었다. 귀면쌍살의 팔과 다리에는 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상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수십 초만 더 싸운다면 귀면쌍살은 석추명의 검에 패할 것만 같았다.

그때 석추명의 눈에 패색이 짙은 기하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하진은 공력은 절륜하되 신법과 초식의 오묘함은 음양사자를 따라가지 못해 벌써 몇 번 위험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음양사자가 귀연신공을 잇달아 펼치며 기하진의 주의를 흩뜨리고는 돌연 기하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음양사자의 손이 순식간에 한 척이나 쑥 늘어나는가 싶더니 대번에 기하진의 심장에 푹 꽂혀 들어갔다.

“안돼!”

그 순간, 비천검이 뱀의 혓바닥처럼 파르르 떨리며 음양사자를 공격했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이 불시에 공격해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기하진을 노리던 손길을 거두어 석추명의 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석추명은 기하진의 목숨이 위험하자 자신의 등 뒤에 누가 있는지 잠시 까맣게 잊어버렸다.

“흥! 네놈이 감히 어디에 한눈을 파는 것이냐?”

귀면쌍살이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석추명의 등을 질풍같이 찔러 들어갔다. 고수들 간의 싸움은 찰나지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데 석추명은 기하진이 위험한 모습을 보자 무학(武學)의 금기를 어기고 만 것이다.

귀면쌍살의 검이 석추명의 등을 꿰뚫으려는 순간, 음양사자가 ‘퍽’ 소리와 함께 석추명의 등 뒤에 나타나 귀면쌍살의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 버렸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귀면쌍살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사자, 이게 무슨 짓이오!”

귀면쌍살이 음양사자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음양사자는 귀면쌍살의 검을 튕겨내고는 어느새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귀면쌍살을 바라보았다.

“이 두 녀석은 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으니 자네는 이만 빠지게나.”

“그게 무슨 소리요? 상대는 화산신검이외다. 이번에 또 실패하면 맹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시오?”

귀면쌍살은 음양사자에게 소리치면서도 검을 쥐었던 손이 여전히 부르르 떨리자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음양사자의 무공이 자신보다 훨씬 윗길임을 이 한 수로 깨달은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지 않았느냐?”

음양사자의 노란 고양이 눈이 번쩍 빛을 내며 귀면쌍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귀면쌍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음양사자의 귀조수가 할퀴고 지나간 기하진의 가슴이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때마침 석추명이 개입하여 상처가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기하진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석추명은 음양사자가 기하진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는 동시에 자신의 목숨은 구해주자 마음이 착잡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런데 그때 음양사자가 몸을 휙 날리더니 대번에 임예린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선배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서 임 소저를 놓아주십시오.”

음양사자가 임예린을 낚아챌지 몰랐던 석추명이 깜짝 놀라 다급히 소리쳤다.

“맹주가 명을 내렸으니 너희 세 명은 원래 죽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나와 함께 신교의 대업을 잇고 남무궁에게 복수를 해야 하니 죽을 수 없다. 대신 이 두 사람을 죽여 맹주의 명을 이행하겠다.”

음양사자의 말에 석추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맹주 남궁진악은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 찬 자입니다. 그자는 자기의 욕심을 위해 죄 없는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자의 명에 따르려고 하십니까?”

“세상천지에 위선과 가식이 없는 자가 어디 있더냐? 나 음양사자는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에게든지 한번 약속하면 그 약속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지. 그리고 신교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맹주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맹주의 말을 따를 수밖에.”

음양사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명문정파의 후기지수 몇 명쯤 죽이는 것이 무어 그리 큰 대수이겠느냐? 어차피 명문정파 놈들은 모두 신교의 적. 신교가 통일되면 언젠가는 베야 할 놈들이다.”

신교가 마교라고 불리는 것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음양사자만 보더라도 비록 남무궁에 대한 원한이 깊으나 무고한 사람 몇 명 죽이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됩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남무궁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흥! 석추명, 너는 지난번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

음양사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합니다. 제가 어찌 선배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기억한다는 녀석이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인단 말이냐? 신교의 교도 3,000명의 원한을 갚고 교주의 자리를 되찾는 대업에 동참해야 할 네가 어찌 이리 유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이냐? 좋다. 정 그렇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려주마. 네가 선택해라. 둘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

음양사자의 말이 청천벽력같이 석추명의 귓전에 울렸다. 기하진과 임예린 중 누구를 골라야 한단 말인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