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 광세일소_한추영 - 1587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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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화 지혜 대결 (3)
임예린은 진(陣) 속에 빠지자마자 바로 환상이 시작될 줄은 알았으나 그 환상이 이토록 생생할 줄을 미처 몰랐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하진과 석추명이 불과 한두 걸음 앞에서 걷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자신은 천산 꼭대기에 있던 호수, 천지(天池)에 다시 서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자신을 노려보는 뜨거운 눈빛.
임예린은 마음속으로 지금 일어나는 일은 환상이라고 아무리 외쳐보았으나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오는 설랑의 눈빛은 오히려 실제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었다.
“너, 오랜만이군.”
설랑의 짧은 한어를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예린은 눈앞에 나타난 허상을 보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이게 만약 환상이라면 보지 않으면 사라지겠지.
하지만 두 눈을 감았음에도 설랑이 다가오는 기척은 점점 더 커졌다.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라고.
임예린이 두 눈을 감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는데 문득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흐흐흐, 보고 싶었다.”
설랑의 숨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며 설랑이 ‘후’ 하고 자신의 귀에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임예린은 수만 마리의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느낌에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뜨고 말았다.
“허억!”
자신의 두 눈 바로 앞 코가 맞닿을 거리에 설랑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임예린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가오지 마!”
자신도 모르게 임예린은 설랑에게 소리쳤다.
“흐흐흐, 너, 내 신부다. 너, 나 따라간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얀 설랑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번지더니 설랑이 손을 뻗쳐 임예린을 잡으려 들었다.
임예린은 눈앞의 설랑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지 마.”
크게 소리쳤으나 사실 마음속은 이미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임예린은 다시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사라져라. 사라져.
그때 귓가에 갑자기 자신을 따라 살말건으로 갔던 몸종, 홍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가씨. 눈 좀 떠보세요.”
임예린은 그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홍월아!”
임예린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소스라치게 비명을 내질렀다.
설랑이 홍월의 머리채를 뒤에서 털어 쥐고 잡아당겨 홍월이 허연 목을 드러낸 채 꼼짝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랑의 눈빛은 계속 임예린을 주시했다.
“나랑 따라가자. 그렇지 않으면, 홍월, 죽는다.”
설랑의 말에 홍월이 임예린에게 애걸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아직 죽기 싫어요. 아가씨, 제발요.”
이미 홍월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홍월을 보자 임예린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릴 때 워낙 잘 울어서 석추명과 기하진이 자신을 눈물의 여왕이라고 놀리기도 했는데 커서도 눈물이 많은 것은 바뀌지 않았다.
임예린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홍월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홍월, 너는 이미 죽었어. 내가 지금 설랑을 따라가도 너는 살아나지 못해. 그러니 따라갈 수 없어. 미안해, 홍월아.”
임예린의 말에 홍월의 눈이 핏빛으로 변하더니 홍월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쁜 년, 네년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어릴 때부터 네년 옆에서 밤낮 쉬지 않고 시중을 들던 나를 버리고 네년 혼자 살겠다고? 퉤, 이 더러운 년. 천하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년.”
홍월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나오자 설랑이 껄껄껄 웃더니 홍월의 머리채를 쥔 손에 그대로 힘을 주었다.
“후후, 홍월은, 네가, 죽인 것이다.”
설랑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진다 싶더니 홍월의 머리가 목에서 뜯겨 나가면서 그대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살점이 뜯겨 나간 자리에서 선홍색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홍월은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었어도 원통한 듯 두 눈을 감지 않고 임예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잘 들어둬. 네년도 곧 내 꼴이 날 테니까. 호호호. 네년의 두 오라버니는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아. 네 옆에 있는 그 누구도 사실 정말로 너를 좋아하지 않지. 네년의 부모는 양부모일 뿐인데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지 알았더냐? 네 옆에는 아무도 없어. 너를 돌봐줄 사람도, 보호해줄 사람도 아무도 없어. 주위를 둘러봐. 내 말이 거짓말인가. 호호호.”
임예린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보았지만 목이 뜯긴 채로 웃는 홍월의 섬뜩한 웃음소리는 계속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버텨야 해. 조금만 더 버텨야 해. 이 모든 게 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홍월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임예린의 발 앞으로 흘러오더니 자신의 신발을 붉게 적시기 시작했다. 사방은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홍월과 설랑의 웃음소리가 자꾸 커져만 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임예린은 땅이 기우는 듯한 현기증이 일어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현기증이 더욱 심해졌다. 그 순간, 땅바닥이 푹 꺼지는 착각이 들었다.
임예린은 놀라서 얼른 눈을 떴다.
“헉!”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이 땅바닥에 커다란 금이 가며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갈라진 부분이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아울러 임예린이 서 있던 땅은 아래로 쑤욱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땅의 갈라진 틈 여기저기에 뜨거운 기운과 함께 붉은 용암이 솟구쳐 올랐다.
진이 무너지기 시작했구나!
사마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선물한 청자 술잔에 술을 담아 마신 것이다. 그 술잔에는 사소혜에게 받은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색무취한 독약이 분말 형태로 미세하게 도포되어 있었다.
귀하기 힘든 청자 술잔에 특이한 기능까지 있으니 사마경은 아마 참지 못하고 분명히 그 잔에 술을 담아 시험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잔을 음미하며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자신이 설치한 진 가까이 와서 우리를 지켜보려 했겠지.
임예린이 애초에 사마경에게 청자 술잔을 선물할 때 여기까지 예상했었다. 사마경은 자신의 명석함에 대한 자신감이 과해서 분명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절세진법에 갇혀 고통받는 우리 세 사람을 바라보며 승리의 축배를 들려고 했겠지.
하지만 사소혜의 독약이 효능을 발휘하면서 사마경은 환상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환상이 방금 임예린 자신이 보았던 환상만큼 소름 끼치도록 생생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사마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마저 역천마라진에 갇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허겁지겁 진의 발동을 멈추려고 한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었다.
땅 표면이 거대로 뜯겨 나가면서 수직으로 곤두섰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여기저기서 무엇인가 터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출렁이면서 간혹 석추명과 기하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진법으로 형성된 공간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관건은 지금이었다. 사마경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임예린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추명 오라버니, 하진 오라버니, 여기예요.”
임예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석추명이 얼핏 뒤로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공간이 다시 일그러지면서 석추명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분노에 찬 설랑의 모습이 보였다.
임예린은 석추명을 보았던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때 석추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린아, 어디에 있니?”
“여기 있어요. 오라버니, 보이세요?”
“안 보여!”
공간이 출렁거리면서 대나무숲이 통째로 임예린 앞으로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환상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광경에 임예린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에게 떨어지는 굵은 대나무들을 겁에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나무의 잔가지와 이파리가 임예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팔과 손등에 생채기가 났다. 갑자기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직경이 한 뼘도 넘는 굵은 대나무 수십 그루가 임예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악!”
임예린이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옆으로 홱 끌어당겼다.
“암만 생각해도 이 대나무들은 진짜인 것만 같아. 여기에 원래 대나무 숲이 있거든.”
임예린을 구한 사람은 바로 기하진이었다. 기하진에게도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대나무들이 똑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젠장,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또 떨어진다. 꼭 잡아라.”
기하진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임예린을 붙잡고 경공을 펼쳐 쏟아져 내리는 대나무를 피했다.
“갸르릉, 갸르릉.”
그때 어디선가 음양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임예린은 정신이 번쩍 들어 기하진에게 말했다.
“하진 오라버니, 음양묘 소리 들리죠? 저 소리를 따라가야 해요.”
기하진이 발바닥으로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높이 도약하며 말했다.
“알겠어.”
음양묘는 일명 섬전묘라고도 하는 영물로 무림고수도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다. 하지만 기하진이 한번 쫓기로 마음먹은 이상 기하진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시 공간이 출렁이면서 석추명의 모습이 멀리서 나타났다.
“추명 오라버니, 음양묘를 따라가세요!”
임예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석추명이 알아들었는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다시 공간이 닫히고 이번에는 하늘에서 화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할. 사마경 이 늙은이의 재주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기하진이 하늘을 쳐다보며 더욱 다리에 공력을 집중했다. 멀리서 음양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파바박.
기하진이 중양신공을 끌어올려 초상비(草上비)를 시전했다. 풀잎이 출렁인다 싶더니 기하진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다시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안개 너머로 음양각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됐다.”
기하진이 음양각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쌩쌩 소리를 냈다. 임예린은 그 속도에 정신이 아찔하여 두 팔을 기하진의 목에 감고 아예 안기다시피 한 자세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코끝에 기하진의 체취가 감돌고 맞닿은 가슴에서 기하진의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붙잡은 기하진의 손길이 그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 왔다.”
기하진의 목소리에 임예린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눈앞에 팔각형 모양으로 지어진 이 층 전각이 있었다.
“다친 데는 없니?”
미리 와 있던 석추명이 임예린을 보고 부드럽게 물었다. 흑백의 음양묘 두 마리는 어느새 석추명의 어깨에 올라가 편안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 난 것인가.
석추명의 물음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모두 결국 난관을 뚫고 지나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떻게 이 녀석들이 나를 찾아왔지?”
석추명이 물었다.
“오라버니의 몸에 천리향(千里香)을 살짝 뿌려 놓았거든요. 음양묘는 영물이라 아무리 멀리서도 그 냄새를 찾아내리라고 생각했죠.”
“그렇군.”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석추명이 위험한 것을 감지한 음양묘는 진(陣)의 결계가 잠시 허술해진 틈을 타서 안전한 곳으로 석추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저기에 네 부모님이 계실 거야. 얼른 들어가 보자.”
기하진이 앞장서서 음양각으로 들어갔다.
팔각형으로 지어진 음양각의 팔면에 있는 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기하진은 지난번에 음양각에서 보았던 괴이한 동남동녀들이 지금도 있을까 봐 문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허공을 향해 팔을 한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사람이 손으로 민 것처럼 여덟 개의 문 중 하나가 활짝 열렸다.
다행히 동남동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음양각 안으로 들어가자 방 중앙의 바닥에 새겨진 태극 문양 위에 임풍 내외가 재갈을 물고 서로 등을 맞댄 채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임예린이 소리를 지르며 임풍 부부를 향해 달려갔다. 임예린을 본 임풍 내외는 놀란 듯했으나 곧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임예린은 눈물이 차올라 앞이 뿌예졌지만 개의치 않고 서둘러 임풍 내외를 묶은 줄을 풀었다.
그때 열려 있던 음양각의 문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마경도 이제는 늙었구나. 이런 실수를 다 하고.”
기하진이 벌떡 일어나 앞을 노려보았다.
“스승을 뵈었는데도 예를 차리지 않을 셈이냐?”
음양각의 문밖에 맹주 남궁진악이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가운 눈길로 기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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