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31화 (131/201)

#   131 - 광세일소_한추영 - 158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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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지혜 대결 (2)

음양각으로 가는 대나무숲 입구는 짙은 안개가 자욱해서 불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새삼 엄습하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심호흡을 했다.

“오라버니들, 역천마라진 안에서 무슨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환상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슨 환상을 보든지 거기 현혹되어서는 안 돼요. 괴롭고 힘들다고 기운을 폭증하고 이성을 잃는다면 그게 바로 적이 원하는 일이니 꼭 명심하셔야 해요. 그리고 제 생각에 반 시진 이내에 분명히 진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이 무너질 때 음양묘의 소리가 나면 무조건 그쪽으로 달려가세요. 아시겠죠?”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과 석추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하진이 제일 먼저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안개는 갈수록 진해지나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옅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옅어지자 조금 안도감이 든 기하진은 석추명과 임예린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나무 숲에는 자기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냥 그렇겠거니 하고 세심히 전후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그때 옅은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아직 안개에 둘러싸여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어딘지 익숙한 모습이어서 기하진은 걸음을 멈추고 앞을 주시했다.

또각또각.

땅바닥을 내딛는 발걸음 소리마저 선명했다. 드디어 그 사람이 얼굴을 알아볼 만큼 다가왔다.

“잘 지냈어? 하진아?”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난번 사천대전 때 죽은 자신의 친우, 지학이 아닌가.

기하진은 너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냐?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지학의 웃음소리는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 순간 기하진은 멍하니 무엇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지학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 정말 지학, 너란 말이냐?”

기하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뻗어 지학의 얼굴에 난 상처를 만졌다.

“아앗!”

지학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 놀라 기하진은 움찔하며 손을 뗐다.

손에 닿는 지학의 차가운 얼굴과 상처에서 흐르는 끈적한 피의 느낌마저 너무 선명했다.

“지, 지학아!”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지난번 사천대전에서 기하진은 지학이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극심한 죄책감과 괴로움에 시달렸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지학의 모습이 나타나서 자다가 깬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기하진은 자신의 목숨은 지학에게 빚졌다고 생각했다. 지학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지학을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이런 괴로움을 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기서, 지학과의 추억이 어려 있는 무림맹 안에서 지학을 다시 만난 것이다.

“지학아!”

기하진이 지학을 잡으려고 한 걸음 다가가자 지학이 돌연 냉소를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혼자 살아남으니 좋더냐?”

지학의 말이 기하진이 아파하던 부위를 쿡 찔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얼굴도 모르는 네놈 하나 구하자고 50여 명이 넘는 내 사형제들이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었어. 그때 죽어간 내 사형제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어야 했단 말이냐?”

기하진은 괴로움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문득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기하진이 다시 고개를 드니 안개 저편, 지학의 뒤쪽에 어디서 몰려왔는지 소림 승려 50여 명이 절뚝거리며 서 있었다.

“내 사형제들은 네 녀석에게 핏값을 받기 전에는 열반에 들지도 못해. 이 핏값을 어떻게 치를 테냐?”

지학이 기하진을 노려보며 다시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지학은 생전에는 더없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성격이어서 한 번도 기하진에게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으나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지학은 얼굴은 그대로이되 느낌은 아주 달랐다.

기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누군가 바로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하진아, 네가 나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

그 소리에 놀란 기하진이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이번에는 자신의 바로 옆에 백무결이 있는 게 아닌가? 백무결은 귀면쌍살에게 죽은 모습 그대로 얼굴은 창백한 보랏빛이었고 온몸에 무수한 자상이 나 있었다.

“무, 무결?”

기하진이 엉겁결에 이름을 부르자 백무결이 슬픈 표정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는데 너는 어째서 나를 잊은 것이냐?”

“아, 아니야, 무결. 내가 어찌 너를 잊을 수가 있겠어? 내가 어찌...!”

돌연 극심한 죄책감과 슬픔이 몰려와서 기하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네놈은 이기적인 놈이야. 네놈은 내 이야기를 듣고 중양일지를 훔치려고 몰래 천림비고로 몰래 들어가기까지 했었지. 음양사자에게 잡혀 죽을 뻔한 네놈을 내가 목숨을 걸고 구해왔지만, 네놈은 천림비고에서 구해온 신공, 천마검법을 혼자서만 몰래 익혔지. 내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말이야. 크흐흐흐.”

지학의 말에 기하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지학을 바라보았다.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느냐고? 크흐흐흐.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당시 네놈의 짓거리를 생각해 봐.”

지학은 기하진을 노려보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흥, 네놈은 원래 그런 놈이야. 우리가 목숨을 걸고 구해주어도 제 한 몸 살고 나면 우리는 싹 잊어버리지. 저놈은 우리가 흘린 피를 마시고 우리 몸에서 베어낸 살로 배를 채우고 있는 거야. 아주 탐욕스러운 놈이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야.”

지학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지학과 소림승, 백무결이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기하진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니라고!”

괴로움에 소리치는 기하진을 바라보며 지학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맛봐. 그러면 위선자가 아니라고 인정해 줄게.”

지학의 피 묻은 손이 자신의 멱살을 잡으려 들자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지학의 손을 피했다.

“저것 봐.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몸으로는 항상 제 살 궁리만 하잖아. 크하하하. 그게 바로 네놈의 실체야. 네놈의 본 모습이라고.”

그 순간 소림 승려 50여 명과 백무결이 기하진을 잡으려 일제히 달려들었다.

기하진은 허겁지겁 몸을 돌려 피했다. 지금 이 상황이 실제인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분간할 틈도 없었다. 그저 너무 괴롭고 힘들고 너무 생생했다.

“으아악!”

자신도 모르게 울분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하진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피하기만 할 뿐, 감히 검을 뽑아 들고 맞받아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에게 칼날을 대는 것만큼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다.

같은 순간, 석추명은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순간을 또 한 번 보고 있었다.

“불모님....”

불모 황연화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연화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석 대주,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도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황연화가 비수를 높이 쳐들더니 자신의 가슴을 푹 찔렀다. 붉은 핏물이 끝없이 흘러내리더니 주위 땅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될까요...?”

황연화가 애처로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석추명은 그 순간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제발 죽지 마십시오. 불모님, 제발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말란 말입니다.

“네놈이 결국 황연화를 죽였구나. 내 사매를 죽인 것이야.”

문득 뒤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석추명이 몸을 돌려 보니 자신의 스승 뢰정이 황보, 초의공과 함께 서 있었다.

“스, 스승님!”

뢰정을 보자 석추명은 그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불모님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불모님을 구해 드리고―”

“시끄럽다, 이놈! 황연화에 대한 잘못된 연정으로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네놈이 아직도 황연화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냐?”

뢰정이 호통을 쳤다.

“아닙니다. 스승님, 저는 불모님께 연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스승님!”

“네놈이 끝까지 네 양심을 속이고 발뺌을 하는구나. 황연화가 네놈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줄은 네놈도 진즉부터 알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계속 발뺌을 한단 말이냐, 이놈!”

뢰정의 말에 석추명이 쓰러질 듯 머리를 뢰정의 발아래 조아렸다.

“불모님의 친절함과 따뜻함이 늘 감사했습니다. 맞습니다. 어쩌면 그 따뜻함 때문에 잠시 불모님에 대한 감정이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제가 감히 교주님의 부인께 어찌 다른 망상을 품었겠습니까?”

“네놈의 그 잘못된 연정으로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황연화도 결국 네놈이 죽인 셈이야!”

뢰정이 검을 번뜩이더니 불시에 석추명을 찔러왔다. 석추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비천검을 꺼내 뢰정을 검을 막았다.

챙강.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네놈이 우리를 버리고 화산으로 간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뢰정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스승님을 버리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화산으로 간 것은 스승님의 말씀을 따라 한 일입니다.”

“으하하하하.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내 말을 따라 한 일이라. 네놈은 항상 신교에 온 것을 후회했었어. 내가 그 사실을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은 교주의 명을 수행할 때마다 늘 극심한 갈등을 느꼈지. 왜냐하면 우리 신교는 바로 ‘마교’이니까. 네놈은 마교인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지. 크흐흐흐.”

뢰정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고한 자들을 죽이라는 명을 받을 때마다 석추명은 심장이 끊어져 나가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너는 신교를 떠나지 못했어. 누군가가 네 자리에서 더욱 무자비한 방법으로 네 임무를 대신 수행할까 봐 두려워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지. 어떻게 보면 바로 네놈의 연약함이 그런 고통을 자초했다고 볼 수도 있지. 크흐흐흐. 그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이 사부의 손에 깨끗이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어떠냐?”

뢰정이 석추명을 바라보며 낄낄낄 웃었다. 그 옆에 선 황보 장로와 초의공도 함께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웃었다. 골수를 파고드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석추명은 지금 이 상황이 환상이나 거짓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이 환상인지 예전 일이 환상이었는지 알 수 없이 모든 일이 모호하기만 했다.

돌연 뢰정과 황보, 초의공 세 사람이 동시에 석추명을 둘러싸고 검을 찔러왔다. 석추명이 절묘한 신법으로 세 사람의 검을 피하자 뢰정이 소리쳤다.

“오냐, 네놈이 화산에서 배운 심검이 더 나은지, 아니면 우리 세 사람의 검법이 더 나은지 오늘 결판을 내도록 하자. 너도 화산에서 수련하는 동안 내내 궁금하지 않았더냐? 으하하하.”

웃음이 끝나는 순간, 뢰정의 수라검과 황보의 응룡검, 초의공의 중천자미유성검이 서로 엇갈리며 동시에 석추명을 찔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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