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29화 (129/201)

#   129 - 광세일소_한추영 - 158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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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원하는 건 오직 그대뿐 (4)

“천문선생의 진법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것이 바로 환상마라진(幻像魔羅陣)이오. 한번 빠지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환상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죽고 마는 무서운 진법이지요. 아미타불.”

공애대사의 설명에 임예린이 다시 물었다.

“환상이라면 어떤 환상을 보는 것인가요?”

“자신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오. 그것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일 수도 있고, 원수일 수도 있고, 여하튼 자신이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존재가 끊임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지요.”

“그 진법의 활로(活路)나 파훼법 외에는 정녕 진법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나요?”

“진을 설치한 진석(陣石)이나 결계를 친 자연물이 파괴되면 간혹 저절로 활로가 열리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만분지일도 되지 않소. 그러니 없다고 봐야 할 것이오.”

이번에는 곤륜파의 운진자가 입을 열었다. 도가 문파들 중에서도 곤륜파는 기문둔갑과 음양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음양팔괘진, 구궁현천진(九宮玄天陣) 등 다양한 진법도 운용하고 있었기에 다른 문파들보다 진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때 사소혜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라가 있는 흑, 백 음양묘 한 쌍이 임예린의 눈에 들어왔다. 석추명이 데리고 온 이 한 쌍의 기묘한 영물들은 독에 대한 습성 때문인지 어느새 석추명보다 사소혜를 더 잘 따랐다. 음양묘는 사소혜의 무릎에 앉아 서로의 몸을 핥아주고 있었다.

“혹시 이 진법이 사람이 아닌 동물들에게 영향을 미칩니까?”

임예린이 다시 운진자에게 물었다.

“토진(土陣)이나 석진(石陣) 같이 물리적인 진의 경우, 동물들도 영향을 받지만 환상진 같이 사람의 이지(理智)에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영향을 받지 않소이다.”

운진자의 말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마경의 진법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와 공애대사를 비롯하여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심지어 기하진마저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하겠소? 진의 활로나 파훼법은 진을 설치한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렵소. 특히나 그 진이 천문선생의 제자인 사마경 같은 자가 설치한 진이라면 더욱 그렇소. 도대체 진법을 어떻게 풀겠다는 것이오?”

요혜신니가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임예린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 그 방법이 무척 궁금하던 터라 임예린의 입만 바라보았다.

“간단합니다. 진을 설치한 자가 풀게 하는 것이지요.”

임예린이 생긋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임예린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와 닿지 않자 사람들은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사 소저, 소저는 독의 전문가이니 하나 물어보겠어요. 독약 중에 진법에 빠진 것처럼 환상을 보게 하는 독약이 있나요?”

임예린의 물음에 사소혜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진법과 비슷할지는 모르겠으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지속시간이 반 시진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진짜 환상진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가짜라고 금방 눈치챌 것 같아요.”

사소혜의 말에 임예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사마경이 똑똑하고 음흉하나 겁이 많은 사람이라 위험을 무릅쓰고 환상진을 몸소 체험해봤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요혜신니를 비롯한 정도련의 수뇌부들은 임예린이 하는 말을 알 듯하면서도 여전히 확실히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가 반격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사마경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이라든가 여자라든가 아니면 취미 같은 것이 있을까요?”

임예린의 질문에 무림맹에서 사마경을 자주 만났던 기하진이 대답했다.

“사마경은 골동품을 좋아해. 특히 백자나 청자와 같은 값진 도자기를 좋아해서 수집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그렇다면 일이 오히려 쉽게 풀리겠군요.”

임예린이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소림사를 떠나기 전날 밤. 석추명이 자신의 숙소에서 조용히 운기행공을 하며 수련을 하는데 문득 멀리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이 가벼운 것으로 봐서 무공을 익힌 여인이 분명하고 보폭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아미 신법이었다.

어느덧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왔다.

“남 소저, 문은 열려 있으니 들어오세요.”

야심한 밤에 여인이 남자의 숙소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에 좋은 일이라 석추명은 무심코 말을 꺼내고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문 앞에서 선 사람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예상한 대로 남이였다.

“남 소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석추명이 남이에게 물었다. 등잔불에 비친 남이의 얼굴이 자못 비장하게까지 보였다.

“석 오라버니께서 내일 아침 일찍 항주로 떠나시기에 결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발그레 상기된 남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석추명이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인지요?”

“스승님께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스승님은 겉으로는 깐깐해 보이시지만 속으로는 제자들에 대한 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도 저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덥석 진행하신 것 같아요. 이게 모두 스승님께서 석 오라버니를 좋게 본 탓이니 너무 언짢게 여기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제야 석추명은 남이가 왜 이 야밤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아챘다. 낮에 임예린이 한 말이 생각났다. 자신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남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석추명이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신니께서 저를 좋게 보셨으니 저로서는 영광이지요. 하하하.”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석추명이 일부러 쾌활하게 웃었다.

“사, 사실은 저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답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둔 지는 오래되었어요.”

남이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석추명은 내성적인 남이의 성격을 알던 터라 남이가 밤에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것도 놀라운데,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자 더욱 놀라웠다.

“석 오라버니도 제가 좋아하기는 하지만 석 오라버니는 친오빠와 같은 느낌이랍니다. 만약 제게 큰 오라버니가 있다면 아마 석 오라버니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석 오라버니께서 먼 길을 떠나시기 전에 이런 제 마음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왔답니다.”

남이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으나 작정한 듯 속에 있는 얘기를 다 꺼냈다. 아마 아직 자신이 임예린에게 한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석추명은 지금 남이가 얼마나 용기를 내고 있는지 잘 알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대견하고 정말 친동생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남 소저가 친누이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석추명의 말을 듣자 남이가 안심이 된 듯 갑자기 고개를 들고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정말인가요?”

“그럼요. 그래서 앞으로는 남 소저에게 말을 편히 할까 생각 중인데, 어때요?”

석추명의 말에 남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면 정말 친 오라버니 같을 거예요.”

“그래. 그럼 편하게 부르도록 하지. 그런데 누이의 마음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이 오라버니가 물어봐도 될까?”

석추명의 물음에 남이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지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수줍어하는 남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 갑자기 석추명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는 사람이라. 남이가 무림맹에서 용봉단 소속이었지, 아마?”

“네.”

남이가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석추명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이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기 단주였군. 그렇지?”

석추명의 말에 남이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지더니 부끄러운 듯 보일락 말락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구나. 하진이는 내가 잘 아니 이 오라버니가 도와주마. 이거 아무래도 내가 중매업자로 업종을 바꿔야 할 듯싶구나. 오늘 낮에도 한 쌍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석추명의 머릿속에 임예린과 일봉의 모습이 떠올랐다. 임예린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필시 일봉일 것이다. 두 사람이 유독 붙어 다녀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석추명의 입가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추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 또 누가...?”

“하하하, 그런 사람이 있느니라. 중매업자가 고객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해서야 쓰겠느냐?”

석추명의 말에 남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이번에는 여인의 숙소 앞에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신성한 소림사 경내에서 남자가 젊은 처자의 숙소를 찾아가다니 스님들이 알면 경을 칠 일이었으나 남자는 그런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아가씨, 일봉입니다. 주무십니까?”

일봉의 말이 들리자마자 방문이 열리더니 임예린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일봉, 그렇지 않아도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잘 와주었어. 어서 들어와.”

선승의 거처를 임시 거처로 쓰는 터라 방에는 작은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침상만 있을 뿐, 천린상단의 영애 임예린이 쓰기에는 턱없이 단촐했다.

임예린이 모처럼 자신의 방을 찾은 일봉을 위해 손수 찻잔에 차를 따르려 하자 일봉이 얼른 임예린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뺏더니 자신이 임예린의 잔에 따라 주었다.

“임 장주님과 주인마님의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일봉의 말에 임예린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낮에 무림 선배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꾹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일봉과 단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게 왜 일봉이 죄송할 일이야? 다 내 불찰인데.”

임예린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일봉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말했다.

“임가장을 수호하는 호천대가 좀 더 강했더라면 장주님 내외께서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아도 되셨을 겁니다. 이게 다 제 무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일봉의 말에 임예린이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피식 웃었다.

“일봉은 무슨 말만 하면 꼭 자신의 무공과 관련짓더라. 걱정하지 마. 절세고수가 두 사람이나 같이 가니 부모님을 반드시 구해낼 거야.”

일봉이 임예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림사의 거친 환경에서 지내느라 다소 수척해진 임예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봉은 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임예린에게 건넸다.

아가씨의 호위무사는 저인데 제가 이렇게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가서 임장주님과 주인마님을 구해드리고 싶습니다. 아가씨 눈의 그 눈물, 제가 닦아 드리고 싶습니다.

“요혜신니께서 일봉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 같던데? 당신께서 아시는 무공을 일봉에게 모두 전해주겠다고 하셨어. 일봉이 어쩌면 아미파 최고의 고수가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더라도 계속 나를 지켜줄 거야?”

임예린이 눈에 웃음을 띠고 일봉에게 물었다. 일봉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예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중에 일봉이 얼마나 발전할지 너무 궁금해.”

임예린이 찻잔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일봉, 있잖아, 신니의 부탁으로 오늘 낮에 추명 오라버니와 잠깐 얘기를 나눴어. 신니께서는 추명 오라버니를 남 소저의 배필감으로 염두에 두고 계시거든. 그래서 내가 대신 추명 오라버니께 물어봤는데....”

임예린이 쓸쓸한 눈빛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추명 오라버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둔 사람이 있었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떨리는 목소리에서 임예린이 받았을 상처가 일봉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 바보 같지? 부모님이 잡혀가신 마당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임예린의 말을 들으며 일봉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뜻대로 되겠습니까? 머릿속으로는 냉정해지자고, 생각하지 말자고 아무리 되뇌어도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마음은 끝내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을요.

“아닙니다. 아가씨.”

일봉의 대답에 임예린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일봉이야.”

그 말이 일봉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임예린 자신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일봉이 서늘한 눈빛으로 임예린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먼 길 가셔야 하는데 편히 쉬십시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도 대지 않은 일봉의 찻잔이 어느새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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