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 광세일소_한추영 - 158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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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원하는 건 오직 그대뿐 (3)
요혜신니 일행이 소림사에 머문 지 어느덧 10여 일이 지났다. 하남성에 위치한 소림사는 사천에 치우친 아미파보다 다른 문파들과 연락을 주고받기에 지리적으로 편리했고, 소림사 방장 공애대사를 비롯하여 주요 문파의 중진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터라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에도 좋았다. 따라서 소림사는 지금 정도련(正道聯)의 임시 총단이 된 셈이었다.
군사 역할을 맡은 임예린은 매일 열리는 수뇌부 회의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남궁진악과 남무궁을 상대할 묘책을 짜내느라 바빴지만 정작 임예린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따로 있었다.
‘휴, 신니의 부탁을 받은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어. 오늘은 추명 오라버니께 얘기를 해봐야겠어. 하지만 내 입으로 그 얘기를 꺼내야 한다니.’
임예린이 회의 중에 석추명을 바라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석추명은 아까부터 임예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고 임예린을 마주 보며 씩 웃어주었다.
석추명의 웃음에 당황한 임예린이 얼른 눈길을 거두는데 이번에는 그런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기하진은 임예린과 석추명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임예린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자 기분이 나빠졌다. 임예린이 자신의 눈치를 살짝 보는 듯하여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고개를 돌리자 기하진의 눈에 여전히 임예린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 석추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기하진은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회의가 끝난 후 임예린은 심호흡을 하며 석추명에게 다가갔다. 얼굴에는 불안하고 복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오라버니,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무슨 말이냐?”
“여기서 하기에는 좀 그러니 조용한 곳으로 같이 가셔요.”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영문도 모르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꾸나. 마침 회의가 길어져서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다. 같이 바람이나 좀 쐬자꾸나.”
기하진은 자신은 내버려 둔 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자신과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느껴졌다. 어릴 때는 항상 셋이서 함께 움직였는데 헤어지고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나니 두 사람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문득 자신과 석추명에게 동시에 시집가서 평생 같이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꼬마 임예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기하진은 한없이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낙엽이 바람에 우수수 흩날렸다.
기하진이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남이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안 갔구나.”
기하진이 담담하게 남이에게 물었다.
“단주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요?”
안부를 묻는 남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해 보였다.
기하진은 무심한 얼굴로 그 눈을 외면하며 말했다.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 하루속히 맹주와 남 교주를 몰아낼 걱정밖에 없어.”
기하진은 그렇게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서 방장실 밖으로 나갔다. 남이가 뒤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는 것도 모른 채.
****
걷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소림사 경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억새밭까지 올라왔다. 바람이 불자 파도가 치듯 새하얀 억새가 굼실거렸다. 오늘따라 유독 새파란 하늘에도 억새같이 하얀 솜털 구름이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임예린과 석추명은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억새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무림의 상황과 달리 눈앞에 펼친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 임예린의 심정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예린의 긴장한 표정을 살피던 석추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심호흡을 해봤지만 가슴을 옥죄이는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석추명의 맑은 눈빛을 바라보던 임예린이 용기를 내는 듯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오라버니, 저.... 남이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석추명은 임예린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이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석추명이 임예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남이 소저는 아미파의 적전제자이고, 또 요혜신니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인품과 무공이 가장 빼어난 소저잖아요.”
“그건 나도 알지. 성격이 유약한 듯하지만 심지는 강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처자더구나. 그런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지?”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석추명의 순진한 눈빛을 바라보자 임예린은 참지 못하고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남이 소저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앞으로 오라버니의 배필로, 어떨지....”
임예린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용기를 쥐어짜 억지로 내뱉었건만, 석추명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걸 물어보려고 아까부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느냐?”
석추명이 재밌다는 표정을 짓자 임예린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일까?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을 괜히 물어본 걸까?
한참을 웃던 석추명이 여전히 미소를 띠며 임예린에게 물었다.
“남 소저가 부탁하더냐? 한번 알아봐 달라고?”
“남 소저가 아니라 요혜신니께서....”
“그렇군.”
석추명이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임예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신니께 잘 말씀드리거라. 나는 오래전부터 사모하던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은 그만 작게 ‘아!’하고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추명 오라버니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헤어지고 보낸 세월이 얼마인데 나는 왜 추명 오라버니가 아직도 꼬맹이 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리라고 믿었던 걸까?
가슴 한구석으로 차가운 가을바람이 ‘쏴’하고 불었다. 억새가 머리를 들지 못할 만큼.
“그, 그러셨군요.”
차마 그 사람이 누군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은 임예린이 석추명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석추명이 남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텐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번에는 석추명이 임예린에게 물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임예린이 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석추명이 임예린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운이 좋은 친구로군. 걱정하지 말아라, 이 오라버니가 적극 도와주마.”
석추명이 애써 쾌활하게 말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그때 갑자기 산 아래가 부산해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추명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 생긴 듯하구나. 빨리 내려가 보자.”
석추명이 임예린을 안고 경공을 시전했다. 임예린은 짧은 순간이나마 이렇게 석추명의 품 안에 안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
임예린과 석추명이 허겁지겁 방장실로 들어섰다. 방장실에는 벌써 정도련의 중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급히 자리에 앉는 석추명과 임예린을 기하진이 빤히 노려보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차가운 얼굴이 마치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묻는 듯했다.
석추명은 기하진에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냥 앉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나같이 굳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석추명이 물었다.
“이걸 보시게나.”
요혜신니가 석추명에게 한 통의 짧은 서찰을 보여주었다.
- 통첩: 임풍 부부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모월 모일 모시까지 무림맹 팔각정으로 오너라. 단, 임예린, 기하진, 석추명 세 사람만 와야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즉시 임풍 부부의 목을 베어 맹의 정문 앞에 내 걸겠다. 무림맹주 남궁진악.
서찰을 보던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임예린은 서찰을 보더니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손마저 부들부들 떨었다.
“임 소저, 진정하게나. 맹주가 이 서찰을 보내온 것을 보면 아직 임풍 부부는 무사할 것이네.”
요혜신니가 임예린을 위로했다.
“제, 제 잘못입니다. 부모님이 무림맹의 지척에 계시는데 이를 미리 내다보지 제 잘못입니다.”
임예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옆에 있던 석추명이 임예린을 돌아보며 위로했다.
“신니의 말씀처럼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진이와 내가 가서 네 부모님을 반드시 구해내도록 하마.”
“임가장은 황궁 근처라 맹주가 아무리 대담하다고 하나 황상이 있는 응천부(應天府)에서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거늘....”
요혜신니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성격이 급한 청풍도장이 입에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맹주가 이제는 더 이상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이런 협박 서한까지 보냈소이다. 무얼 더 망설이시오? 당장 무림맹을 치러가야 합니다. 당장 우리 정도련의 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직은 시기상조요. 정도련에 가입한 문파의 수가 중소 문파를 모두 합쳐도 20개 남짓이고 우리는 아직 저들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알지 못하오이다. 게다가 백련신교가 무림맹의 뒤를 떠받치고 있지 않소이까? 좀 더 기다리며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보오.”
공애대사가 즉각 공격하자는 청풍도장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지금 당장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니 일단 저들의 말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기하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기하진의 말에 임예린은 눈물을 닦아내고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그 표정 아래 자신을 걱정하는 기하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생각에도 그 일이 지금 가장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맹주가 저희 세 사람을 지명했으니 일단 저희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석추명이 기하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지금 석 소협과 기 단주, 임 소저는 정도련의 가장 핵심인사인데 세 사람을 어찌 적의 소굴에 그냥 보낸단 말이오? 이는 필시 세 사람을 제거하려는 맹주의 계략이 틀림없소이다. 속내가 뻔히 들여 보이는 데도 속아 넘어가자는 말이오? 그건 안될 말이올시다.”
이번에는 요혜신니가 강경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스승님, 지금 세 분이 가지 않으면 임 소저 부모님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수뇌부 회의에서 좀처럼 말을 하지 않던 남이가 용기를 내어 스승의 말에 반박했다.
“어허, 아미타불....”
남이의 말에 요혜신니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두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감정을 추스른 임예린이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부모님이 연루되어 제가 잠시 감상에 빠졌습니다. 요혜신니의 말씀대로 맹주는 이번 기회에 기 단주와 석 소협, 그리고 저를 제거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저들의 생각대로 속아주는 척하면서 우리가 이번 기회를 역이용할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곤륜파의 운진자가 물었다.
“역이용하다니? 어떻게 말이오?”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은 총군사 사마경이겠지요. 사마경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임예린의 질문에 이번에는 공애대사가 말했다.
“사마경은 기문둔갑에 능한 천문선생(天文先生)의 수제자로 병법과 진법에 능하오. 그래서 두뇌가 비상하고 적의 허를 치르는 술책에 능하다오. 바로 그런 이유로 아무런 세력 없이도 맹주의 눈에 들어 무림맹의 군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
공애대사의 말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진법을 활용할 가능성이 크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진법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임예린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중진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소림사 장경각에도 진법에 관한 책이 몇 권 있기는 하지만 그 학문을 어디 하루 이틀 만에 익힐 수 있겠소이까?”
공애대사마저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대사님, 진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림고수들이 왜 진법을 두려워하는지요?”
하지만 임예린은 사람들의 실망 따위는 개의치 않고 다시 공애대사에게 물었다.
“진법이 무서운 이유는 진법이 펼쳐진 공간에 한번 발을 들이면 활로를 알거나 파훼법을 알지 못하는 이상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요.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불가능하지.”
임예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천문선생의 진법 가운데 위력이 가장 강한 진법은 무엇이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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