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27화 (127/201)

#   127 - 광세일소_한추영 - 158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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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원하는 건 오직 그대뿐 (2)

“그게 무슨 소리냐?”

맹주 남궁진악의 눈빛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마경에게 꽂혔다. 인자하던 평소 모습은 간데없고 두 눈에는 맹수와 같은 흉포한 기운이 일렁였다.

사마경은 간담이 서늘하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맹주 곁에서 일한 지 벌써 30년, 이제는 좀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도 맹주가 화를 내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화포감 부제조(副提調)가 조만간 금의위에서 직접 감찰을 나올 예정으로 당분간 벽력탄을 내어주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사마경의 말에 맹주가 어이없다는 듯 ‘하!’ 소리를 냈다.

“그동안 그놈에게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정작 필요한 지금, 벽력탄을 주지 못하겠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금의위에서 감찰을 나온다는 것이지?”

맹주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마경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물었다.

“그, 그것이, 저, 그것이....”

“똑바로 말하지 못할까?”

맹주의 눈초리가 샐쭉해지면서 맹주의 몸에서 주위를 금방이라도 얼려 버릴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부제조의 말에 따르면 벽력탄이 몰래 유용되고 있다는 투서가 황상께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일로 황상께서 진노하셔서 화포감 총제조를 비롯한 모든 관리와 화포기술자 전원에 대한 감찰을 지시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감히 그런 투서를 한단 말인가?”

사마경의 주위를 서성이던 남궁진악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마경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사마경은 이를 악물었지만 어깨가 연신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얼마 전에 천린상단의 임풍 대방이 황상을 몰래 찾아뵈었다고 합니다.”

“임풍이?”

“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나 그 이후 갑자기 화포감 감찰이 결정된 것으로 보아 임풍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마경이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남궁진악의 눈길이 더욱 차가워졌다. 온기가 하나도 없는 그 눈길에 사마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화포감 부제조가 저에게 넌지시 알려주기를 조만간 어림군 부대 수만 명이 백련신교의 총단을 칠 예정이므로 화포와 각종 탄환을 차질없이 준비하라는 공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마경의 말에 남궁진악이 사마경의 어깨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사마경은 순식간에 어깨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윽!”

“백련신교를 친다? 관에서 갑자기 백련신교를 왜 친다는 것이지?”

남궁진악이 손아귀의 힘을 높이자 사마경의 어깨뼈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사마경은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리며 맹주에게 간청했다.

“맹, 맹주님, 고정하십시오.”

그제야 맹주는 사마경을 돌아보더니 손에서 힘을 뺐다.

사마경은 어깨가 몹시 아팠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각 문파에 아미파 장문인 요혜신니의 명의로 정도련의 창설을 알리고 가맹을 촉구하는 서찰이 은밀히 배포되고 있다고 합니다.”

“요혜 그 늙은이가?”

남궁진악이 뒷짐을 진 채 사마경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작 정도련의 창설을 주도한 것은 임풍의 여식인 임예린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임풍이 황상을 배알하고 금의위에서 화포감을 감찰하게 된 것도 모두 임예린이 꾸민 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건방진 년!”

남궁진악이 나지막이 내뱉으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이 흔들려 넘어지며 찻물이 쏟아졌다.

“지금 즉시 신교에 이 사실을 알리고 소림사 공격을 중지하라고 해. 그리고 지금 당장 임풍을 찾아서 단칼에 베어 버리고 임가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려.”

남궁진악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맹주님, 지금 당장 임풍을 죽인다고 해서 정도련의 확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천린상단은 앞으로 무림맹의 자금줄이 될 터인데 지금 없애버린다면 분명히 득보다 실이 많을 것입니다. 저에게 임풍과 임예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면서 정도련의 확장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사마경의 말에 표독스럽던 남궁진악의 눈빛이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총군사에게 방법이 있다면 확실하겠지. 지금 당장 시행하게나.”

****

요혜신니는 일봉을 제자로 들이고 나서 천하의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는 맹자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일봉의 자질이 뛰어나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아무리 힘들어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해내는 강인한 정신이야말로 아미파 여제자들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장점이었다.

요혜신니는 남이와 일봉의 대련을 지켜보면서 일봉이 더욱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일봉의 무공은 어느덧 자신에게 10년을 넘게 배운 남이와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사제의 실력이 날이 갈수록 출중해지는군요.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저는 상대도 안 되겠어요.”

남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일봉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사자(師姊)의 날카로운 검법에 비하면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사자.”

일봉이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인사했다.

남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큰오빠뻘인 일봉이 자신에게 깍듯이 존칭을 쓰며 선배 대접을 하자 왠지 기분이 흐뭇했다.

그때 석추명이 임예린과 함께 걸어왔다.

“남 소저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호호, 그래 보이나요? 석 오라버니도 일봉 소협 같은 사제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평소에 수줍음이 많아 말이 없는 편인 남이가 밝게 웃으며 얘기하자 석추명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었다.

“아이쿠!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일봉 형님같이 무뚝뚝한 분이 사제라니 어디 말이나 편히 하겠습니까? 하하하.”

아직 석추명과 기하진이 불편하기만 한 일봉과는 달리 석추명은 자신보다 서너 살 많은 일봉을 벌써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석추명은 성격이 부드럽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탓에 남이와도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마침 일봉 사제와 검술을 수련하던 중이었는데 석 오라버니께서 저희와 대련해 주시겠어요? 혼자서 백 번 수련하는 것보다 화산신검과 한 번 대련할 수만 있다면 훨씬 배우는 게 많을 것 같아요.”

남이의 말에 석추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럴까요?”

“다만 오라버니와 저희의 무공이 너무 차이가 크게 나니 저희는 사남매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하겠어요. 괜찮으시죠, 석 대협?”

남이가 석추명을 대협이라고 부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흠, 이거 뭔가 내가 불리한 듯하지만, 암튼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군요. 두 분은 손에 사정을 두셔야 합니다.”

“호호호, 제가 해야 할 소리를 석 오라버니께서 하시면 어떡하세요? 그럼 공격하겠습니다. 사제, 아미복마검으로 우리 함께 공격해요.”

남이가 검을 뽑아 들고 일봉에게 소리치더니 질풍같이 석추명을 찔러 들어갔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실전을 방불케 하는 기세였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웃던 표정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남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일봉이 지난 수 개월간 요혜신니에게서 검술 지도를 받은 이후, 아미파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검을 겨루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요혜신니도 인정한 당금 무림 제일의 검객 석추명이다.

일봉은 긴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배움에 대한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두 사람의 무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큰 공부가 될 것이다.

남이의 검은 한 수 한 수에 아미 중검(重劍)의 원리가 실려 있어서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쾌활하면서 동시에 근엄했다.

반면에 석추명이 펼치는 검법은 한눈에 그 오묘함을 파악할 수 없었다. 바람같이 가볍다가도 태산같이 무겁고, 안개처럼 한순간에 흩어지는가 싶더니 또 순식간에 돌개바람이 되어 세차게 몰아쳤다. 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검법을 한꺼번에 펼칠 수 있는지 일봉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석추명이 남이, 일봉과 대련을 시작하자 임예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멀찌감치 서 있는 요혜신니를 발견하고 신니에게 다가갔다.

“신니께서 지도해주신 덕분에 일봉의 검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듯합니다. 제가 무공은 잘 모르지만 일봉의 검술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겠어요.”

“허허허. 암, 아미검법을 배우는 데 달라져야겠지요.”

요혜신니의 말에서 아미파 무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일봉은 무공에 대한 자질도 뛰어나고 근성도 훌륭하오. 그동안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무공이 답보상태에 머물렀지만, 기왕 나와 인연이 닿아 아미파에 들어왔으니 앞으로 내 모든 절기를 다 전수할 작정이오.”

요혜신니의 말에 임예린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일봉을 대신해서 신니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감사랄 게 뭐가 있겠소? 스승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을. 임 소저, 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좋아한다오. 일봉의 무공이 단지 스승의 수준에 이를 것이 아니라 그 경지를 뛰어넘어서 석 소협처럼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 나가기를 나는 진정으로 바라오.”

요혜신니의 진심 어린 말에서 임예린은 참된 스승의 표본을 보는 듯했다.

“일봉이 복이 많아서 신니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앞으로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 같아요.”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세 사람의 비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임 소저, 저 두 사람, 참으로 잘 어울리지 않소?”

눈길은 여전히 비무 중인 세 사람을 향한 채 요혜신니가 임예린에게 물었다. 임예린은 요혜신니가 말한 두 사람이 남이와 일봉일 것으로 생각하고 속으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일봉이 복이 많아서 신니의 제자가 되더니, 이제는 신니께서 가장 아끼시는 아미파의 적전제자를 아내로 맞이하겠구나.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제 사남매지간이라 앞으로 서로 무공을 절차탁마할 기회도 많으니 아미파 무공에 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임예린이 미소를 띠며 하는 말을 듣던 요혜신니가 별안간 껄껄껄 웃었다.

“임 소저께서 이 늙은이의 말을 오해했구려. 나는 일봉이 아니라 석 소협과 남이를 말한 것이오.”

요혜신니의 말에 임예린은 순간 심장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당황한 임예린이 말을 잇지 못했지만 요혜신니는 그런 임예린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이가 보기와는 달리 수줍음이 많아서 타 문파의 남자 제자들과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석 소협과는 아주 편하게 지내더군요. 게다가 석 소협도 우리 남이에게 잘 대해주니 분명히 남이에게 남다른 관심이 있을 것이오. 암, 이 늙은이의 눈은 못 속이지.”

요혜신니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임예린은 마음이 떨려왔다.

한참 세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요혜신니가 임예린에게 고개를 돌리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그래서 임 소저에게 부탁이 있소이다. 석 소협과 우리 남이를 서로 맺어주고 싶은데 마침 임 소저께서 석 소협과는 오누이처럼 친하니 이 늙은이 대신 넌지시 말을 좀 전해주시겠소?”

“네, 네?”

임예린은 요혜신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사자끼리는 서로 좋아해도 이런 일은 원래 부모나 스승이 관여해야 한다오. 석 소협은 부모가 안 계시고 스승도 돌아가셨으니 내 부득이 임 소저께 부탁할 수밖에. 모쪼록 이 늙은이의 청을 거절하지 말고 잘 좀 전해주시오.”

요혜신니가 말을 마치더니 임예린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임예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감히 신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허허, 고맙소이다. 근래에 우리 아미파에 좋은 일이 없었는데 이제 곧 큰 경사가 하나 생기겠구려. 한 쌍의 선남선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더 큰 경사는 없지요. 게다가 우리 아미파 제자의 부군이 될 사람이 화산신검이니 앞으로 두 문파 간에도 큰 발전이 있지 않겠소이까? 허허허, 여러모로 보아 두 사람의 결합은 큰 복이오. 두 사람이 맺어진다면 내 임 소저의 은혜, 절대 잊지 않으리다.”

요혜신니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 소리 내어 웃더니 망연자실한 임예린을 남겨두고 떠났다.

임예린은 신니가 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착잡한 심정으로 비무 중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이에게 미소 짓는 석추명의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을 비수로 도려내는 듯 가슴이 쓰라렸다. 요혜신니의 부탁을 자신의 입으로 석추명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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