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26화 (126/201)

#   126 - 광세일소_한추영 - 157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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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원하는 건 오직 그대뿐 (1)

소림사 방장실.

무소유를 실천하는 고승의 방이라 그런지 제자가 3,000명이 넘는 대 문파의 장문인 방이라고 하기에는 방이 소박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했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방 한가운데 둥근 원탁이 있고 공애대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요혜신니와 임예린, 계법사태, 운진자, 청풍도장, 현암자와 기하진, 남이 등이 죽 앉아 있었고, 요혜신니의 맞은 편에 앉은 석추명의 옆에는 요혜신니 일행과 합류하여 화산파의 일을 소상히 알려준 사소혜와 화산파의 막내 제자 금린이 함께 앉아 있었다.

화산파에서는 정도련을 출범한다는 요혜신니의 전갈을 받자 장문 대행을 맡은 열화가 급히 금린을 소림사로 급파했다. 아울러 화산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화산신검이 된 석추명이 조속히 화산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도 함께 전했다.

사소혜는 무당산을 내려와 석추명을 만나려고 소림사로 오던 중 요혜신니의 일행 가운데 임예린을 알아보고 요혜신니 일행과 합류했다. 그리고 거기서 뜻밖에 금린까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신승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요혜신니가 공애 방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워낙 고령이신 데다 이번에 우리 소림에 발생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당분간 정양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공애 방장의 말에 요혜신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승께서는 정파 무림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신데 어찌 이런 일이.....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마침 기 단주께서 절세 내공으로 내상 치료를 도와주셨습니다. 게다가 우리 소림의 영약인 대환단을 복용하셨으니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공애 방장의 말을 듣던 요혜신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맹주가 이토록 치밀하고 악랄할 줄이야. 나도 처음에 임 소저에게 맹주의 본모습을 들었을 때는 그저 맹주를 비방하는 소리라고만 생각했소이다. 그런데 이번에 맹주의 진면목이 백일하에 드러났소이다.”

요혜신니의 말에 청풍도장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탁자를 때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눈뜬장님이었소. 그동안 각 문파의 젊은 후기지수들을 살해하도록 교사한 자가 맹주이고, 이번에 화산파와 무당파, 소림사를 공격한 것도 맹주가 꾸민 짓이라니, 이를 어찌 더 두고 보겠소? 당장 맹주를 치러 갑시다.”

청풍도장의 말에 눈을 감고 가만히 불호를 외던 공애 방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사실 임 소저의 공이 크외다. 맹주의 본모습을 진즉에 간파한 사람도 임 소저이고, 꾀를 내어 마교와 무림맹의 연합군을 물리친 사람도 임 소저요.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임 소저의 고견을 먼저 들어보는 게 어떻겠소?”

공애 방장의 말에 모든 사람이 다 찬성하자 임예린도 더 사양치 않았다.

“교맹 연합군이 물러가긴 했으나 조만간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들도 정도련의 존재를 안 이상, 섣불리 소림사를 다시 공격할 생각은 품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소 문파의 경우는 다르지요.”

“중소 문파의 경우는 다르다니?”

공동파의 현암자가 물었다.

“아마 맹주는 처음에 소림과 무당을 굴복시키면 나머지 문파들은 자연스레 자신에게 복종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림과 무당도 맹주에게 맞서지 못했는데 하물며 중소 문파들이 어찌 맹주에 대항하겠습니까? 아마 그런 심리전을 펼쳐 손쉽게 강호 전체를 접수하러 들었겠지요.”

“흠, 하기야 그렇기도 하겠군. 또 그런 이유로 소림과 무당을 대체할 만한 화산파를 먼저 친 것이로구먼. 게다가 청성은 이미 자멸했고.”

청풍도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미파도 치려 했지만 지리적으로 먼 데다 지난번 사천대전 때 타격을 받았으므로 굳이 먼 사천까지 군대를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현암자가 되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림사를 치려던 저들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나올 것 같소이까?”

“아마도 중소문파를 각개 격파하는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뭣이라? 중소 문파를 각개 격파한다?”

임예린의 말에 현암자와 청풍도장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무당파가 굴복했으나 소림사가 건재하니 중소 문파들이 호락호락 심리전에 말려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무당파의 입장입니다.”

“무당파의 입장이라니?”

공애대사가 눈썹을 추켜 올리며 물었다.

“이번에 교맹 연합군이 무당파를 쳤지만 무당파의 인명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화산파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번에 벽력탄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사소혜가 왠지 발끈하며 물었다. 무당파에서 벽력탄을 쓰지 못하도록 자신이 힘들게 고생했는데 임예린의 말이 어쩐지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임예린이 사소혜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 이유가 가장 크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무당파를 몰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도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 소저의 말은 맹주가 무당파를 이용할 것이라는 말이오? 무당파는 명문정파외다. 그런 문파가 어찌 맹주의 압박에 굴복하겠소이까?”

요혜신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당이 명문정파이기에 더 그렇지 않을까요? 일단은 살아남아야 명맥을 이을 텐데 그러려면 지금은 수치스럽고 괴로워도 맹주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임예린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요혜신니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히 말했다.

“아미타불. 무당은 소림과 함께 무림의 태산북두인 위치에 있던 문파요. 무당 협객들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 맹주와 손을 잡으려 들지 않을 것이오.”

“저도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무튼, 당분간 무당을 주시할 필요는 있습니다. 모두 표시 나지 않게 주시하면서 혹시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알려주십시오.”

정도련 수뇌부의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석추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회의 내내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임예린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장성했을까? 눈부시게 아름답게 자란 것도 놀랍지만 무림의 대선배요, 대고수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저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모습이 더욱 기특하고 대견했다.

수뇌부 회의가 끝나고 기하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공애 방장이 요혜신니와 함께 기하진을 불렀다.

“기 단주, 밤이 늦긴 했으나 혹시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최근 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가 아는 대로 좀 소상히 얘기해 주게나.”

기하진은 공애 방장의 부탁에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방문 밖으로 나가는 석추명과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웬일인지 마음 한구석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알겠습니다.”

기하진이 여전히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공애 방장에게 대답했다.

****

임예린의 숙소는 꽤 멀리 있었다. 여승이 없는 소림사의 특성상 여시주가 묵을 만한 숙소가 경내에 없는 데다 젊은 처자가 절간에 묵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 가지 난처한 일이 생길까 봐 지객승이 일반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임예린의 거처를 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임예린은 왠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듯하여 서운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석추명과 둘이서 오붓하게 걸을 수 있어서 이제는 소림사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고 길 안내를 맡은 지객동자가 한참 앞에서 들고 가는 등불이 반딧불처럼 일렁거렸다.

“여기서 오라버니를 다시 뵐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래. 나도 너를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구나. 너뿐만 아니라 하진도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그것도 둘 다 이렇게 유명인사가 되어서 말이야. 하하하.”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빙긋 웃었다.

“어디 화산신검만 하겠어요?”

“그러냐? 하하하.”

“아까 소림신승과 싸울 때는 정말 놀랐어요. 요혜신니의 말씀으로는 당금 무림에서 신승의 백 초를 받아낼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셨거든요.”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감개무량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모두 독고양 대선배님의 가르침 덕분이지.”

“독고양이라면 신승과 함께 무림쌍절로 명성이 높은 화산파의 전대 고수분이시죠?”

그러자 석추명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것도 아느냐? 강호 제일의 재녀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구나.”

“아이참, 오라버니 마저 놀리시기에요? 비천검 독고양 선배님을 누가 모른다고 그러셔요?”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산 위에서 밤바람이 ‘쏴아’ 하고 불었다. 산사(山寺)의 바람은 원래 차서 아직 늦가을이지만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임예린이 추위에 몸을 움츠리자 석추명이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서 둘러주었다.

“땀내가 좀 배어 있겠지만 추운 것보다는 나을 테니 걸치려무나.”

석추명의 체취가 묻어 있는 장포를 걸치자 임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무림의 대선배들 앞에서도 당당했건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첫사랑을 만난 어린 소녀마냥 자꾸만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라버니, 화산신검이 될 줄 알고 화산으로 가신 건가요?”

임예린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걸음을 옮기며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야.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그저 사부님의 유언을 따랐을 뿐이란다.”

“뢰정 백부님께서 뭐라고 하셨기에요?”

석추명은 뢰정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중양일지의 전반부를 찾아 신공을 익히라고 하셨지. 만약 찾지 못한다면―”

석추명이 말을 끝내지도 않았건만 임예린이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중양일지 전반부라고 하셨나요?”

임예린이 석추명의 팔을 잡았다. 몹시도 놀란 듯한 임예린의 표정에 석추명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네가 중양일지를 아느냐?”

임예린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떻게...?”

그 순간, 임예린의 입에서 처음 들으나 전혀 낯설지 않은 무공비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 당황한 사람은 석추명이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 거지?”

석추명이 다급히 묻자 임예린은 자신이 어떻게 천림비고로 납치되고 중양일지를 보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임예린의 말을 듣던 석추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옛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화산으로 간 것은 중양일지 전반부에 수록된 중양내공을 얻지 못해서였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중양내공을 얻지 못하면 도가 무공의 최고 경지에 오른 독고양 선배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라고 하셨어. 나는 아무리 찾아도 중양일지 전반부를 구할 수가 없어서 결국 화산으로 갔던 거야. 그런데 네가 그걸 외우고 있었다니. 그때 네게 화산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만 했었더라도...!”

“그때 제가 중양일지 전반부를 오라버니께 알려드렸다면 지금 오라버니의 처지가 더 나아졌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석추명이 죽어간 화산십수를 생각하며 먼 산기슭에다 눈길을 던졌다.

“오라버니, 제 생각에는 오라버니가 화산으로 가신 것이 더 잘된 일 같아요. 그간 힘든 일이야 많았겠지만, 어찌 되었건 오라버니는 이제 전 무림이 인정하는 화산신검이 되셨잖아요. 중양 내공이 대단하다고 하나 제 생각에는 지금 오라버니의 경지보다 더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아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임예린의 말을 듣자 석추명은 마음이 뜨거워져 자신도 모르게 임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임예린이 석추명의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추명은 그 순간 임예린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생각이 들자 당황해서 얼른 임예린의 손을 놓았다. 이전에는 스스럼없이 임예린의 손을 잡았지만 이제는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미, 미안하구나.”

석추명이 말을 더듬자 이번에는 임예린이 석추명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하지만 제가 제일 기쁜 것은 오라버니가 화산신검이 된 것이 아니라 무사히 돌아오신 거예요. 그게 저는 가장 기쁘답니다.”

석추명은 임예린의 따뜻한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감싸 쥔 임예린의 손이 부드럽다는 느낌이 새삼 들었다.

“고맙구나.”

석추명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어서 가자꾸나. 귀하신 우리 정도련 군사님 고뿔 걸릴라.”

석추명이 임예린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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