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 광세일소_한추영 - 157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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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태동(胎動) (7)
“앗! 사제, 이게 무슨 짓인가?”
소림방장 공애대사가 격노하며 공명대사에게 소리쳤다.
신승은 공명이 자신을 공격하자 손을 뻗어 공명을 단숨에 이삼십 척 밖으로 내던졌다. 공명도 수십 년 공력을 닦은 소림의 고승인데 부상한 신승의 단 한 수를 막아내지 못했다.
공명이 땅바닥에 나뒹굴자 달마팔로 중 여섯 사람이 바람같이 달려와 공명을 빙 에워싸며 계도를 겨누었다.
소림방장 공애대사는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공명이 왜 신승을 공격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제,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들이 자네에게 이지를 잃게 하는 약물이라도 강제로 먹인 겐가? 말을 좀 해보게나.”
공애대사가 답답해하며 연거푸 물었지만 공명은 멍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공승대사를 죽인 사람이 바로 공명대사 자신이니까요.”
그 말에 놀라 공애대사와 신승이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혜신니의 옆에서 이슬을 머금은 난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 걸어 나왔다.
“뉘시오? 소저가 누군데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게요?”
공애대사가 임예린을 돌아보며 노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서 아무도 들어간 흔적이 없는데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사라졌다면 당연히 사라진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 그 무슨...!”
임예린의 말에 공애대사는 선뜻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제자로 정(情)에 얽매이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인정에 이끌려 자명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의심은 번뇌를 낳는 법. 자신이 어찌 사제를 의심한단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요? 공명과 공승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수련하여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거늘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는단 소리요?”
공애대사가 임예린의 말을 부정하며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부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데 스님들은 석추명이 과거에 신교의 수라대주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죄를 저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것 아닌가요?”
석추명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하는 임예린의 음성은 크지 않았으나 말에 논리가 분명해서 아무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공명대사가 저들에게 약점을 잡혔겠지요. 저들이 무엇을 믿고 이렇듯 겁 없이 소림사를 치려 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군요. 공명대사 같이 지위가 높은 스님이 안에서 도와주니 자신이 있었겠지요.”
듣고 보니 수상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무당파는 적이 쳐들어오는 정확한 시기를 알지 못해 결국 적들의 손에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들은 어떻게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얘기를 해준 사람 또한 공명이었다.
“약점이라니.... 설마...?”
임예린의 말을 듣던 공애대사가 사제 공명을 돌아보았다. 공애대사의 눈빛에는 질책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설마 20년 전 그 일 때문이더냐? 속세의 인연을 끊어내기가 그토록 어렵더냐?”
공애대사의 머릿속에 20년 전 일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출가한 공명은 여인이라고는 가까이해 본 적이 없었으나 20년 전 우연히 탁발 겸 강호행을 나갔다가 어떤 여인을 알게 되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계를 어겨 괴로워하던 공명은 그 사실을 사형인 공애대사에게 말했고, 사제를 아끼던 공애대사는 이 사실을 계율원에 얘기했다가는 공명이 쫓겨날까 두려워 결국 그대로 덮었다. 그래 봤자 하룻밤 인연인데 그것보다 수십 년 수련한 무공과 불학이 더 중하지 않겠는가 생각했었다.
공애대사가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데 공명대사가 미친 사람처럼 처절하게 웃더니 나찰녀에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약속을 지켰소이다. 맹주께서도 약조하신 대로 내 아들을 꼭 풀어주셔야 할 것이오.”
공명의 말에 공애대사를 비롯한 소림승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명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연속해서 놀람과 충격에 빠진 공애대사를 바라보며 공명이 처량하게 말했다.
“사형, 속세의 인연은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조차 제 전생의 업보 때문이겠지요. 이 죄 많은 아우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평생의 악업을 참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형께서는 부디 보중하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공명이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찍었다.
“공명 사제!”
공애대사가 손을 뻗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공명의 두개골은 박살이 나서 허연 뇌수가 새어 나왔다.
“공명 사제, 이 무슨 끔찍한 업보란 말인가.”
공명을 붙잡은 공애대사가 가슴이 찢어지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죄, 죄송, 합니다. 사형....”
아직 숨이 다 끊어지지 않은 공명의 눈에서도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리더니 잠시 후 공명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신승과 소림 승려들은 석추명을 의심했다가 뜻밖에도 공명이 범인으로 밝혀지자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승이 불호를 외더니 내상을 입어 창백한 얼굴로 사제들의 부축을 받아 석추명에게 다가갔다.
“석 대주, 자네에게 면목 없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덥석 자네를 의심했네. 수십 년 수련이 다 헛공부로구먼.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제라도 진상이 드러났으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상처가 좀 어떠십니까?”
석추명의 말에 신승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재로다, 선재야. 독고양의 안목이 이 어리석은 늙은이보다 훨씬 낫구나.”
나찰녀는 난데없이 나타난 젊은 여인의 말 한마디에 일이 엉뚱하게 흘러가자 당황했다. 도대체 이 소저가 누군데 자신과 무림맹이 비밀리에 추진한 계획을 이렇게 순식간에 꿰뚫어 본단 말인가?
그런 나찰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임예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저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신승이었습니다. 신승만 제거하고 나면 그다음에 소림사를 쓸어버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테니까요.”
임예린의 말에 나찰녀가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젊은 처자의 머리가 아주 비상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찰녀의 물음에 지난번에 사천대전에 참전했던 탈명검 마립이 대답했다.
“저 여인이 바로 천린상단 임풍의 여식이네. 소문에 의하면 친자식은 아니라는데 임풍이 친자식 이상으로 아낀다는군.”
마립의 말에 임예린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마립을 바라보았다.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마 장로께서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하군요.”
당시 기하진에게 죽을뻔했던 마립은 그때 일이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었는데 이제 임예린이 다시 그 일을 상기시키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뉘신가 했더니 천하제일의 재녀로 명성이 높은 임 소저였군. 하지만 임 소저, 네 말대로 우리는 이번에 소림을 방문한 목표를 달성했다. 신승이 다쳤는데 과연 소림사가 이제 우리를 막아낼 수 있을까? 임 소저는 보지 못했지만 저기 음양사자는 혼자서도 달마팔로와 상대할 수 있는 고수지. 게다가 귀면쌍살, 백골마군, 왕취선, 탈명검 마 장로와 본교 최정예 고수들만 모인 명왕대와 대주 사마곤까지 있어. 과연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나?”
나찰녀가 비웃었지만 임예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신승과 대등하게 싸운 화산신검 석 대주가 있습니다. 석 대주의 무공이 어떤지는 직접 경험했을 테니 제가 다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우리 측에는 귀교의 장로쯤은 우습게 여기는 기 단주가 있습니다. 귀교의 마 장로가 기 단주의 손에 패한 적이 있으니 모르면 물어보시던가요.”
그러면서 임예린이 마립을 비웃듯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마립은 반박도 못 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리고 우리 측에는 소림 방장 공애대사님을 비롯하여 달마팔로와 아미파 장문인 요혜신니께서도 계십니다. 그리고 곤륜파의 운진자께서도 곤륜칠검을 이끌고 오는 중입니다. 아마 이제 거의 다 오셨을 겁니다.”
임예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수한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하하하, 임 소저께서 정확히 알아맞히셨소이다. 곤륜의 운진이 인사드리오.”
말소리와 함께 붉은 얼굴에 눈썹이 짙은 중년의 도인이 7명의 검객과 함께 곤륜의 유명한 경공, 운룡대팔식을 펼치며 허공에서 내려왔다.
“가장 멀리 계신 분이 우리보다 빨리 오셨군요. 임 소저, 우리 종남도 빼놓지 마시구려.”
종남파의 청풍도장이 제자 이십여 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설마 우리 공동파가 한발 늦은 것입니까?”
이번에는 공동파의 현암 도장이 제자 수십 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나찰녀는 3개 문파의 고수들이 연달아 나타나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모습에 임예린이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아, 이분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마 지금쯤 황상께서 보내신 어림군 수만 명이 벽력탄 뿐만 아니라 각종 화포를 가지고 화련산에 있는 귀교의 총단을 포위하고 있을 겁니다. 남 교주의 무공이 아무리 경천동지할 정도라지만 화포로 무장한 어림군 수만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허튼소리 마라! 일개 교주를 잡으러 황제가 뭣 하러 어림군 수만 명을 보낸단 말이냐?”
“호호호, 일개 교주라니, 설마 귀교의 교주가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그 질문은 귀교의 연합군인 무림맹에 하셔야겠군요. 조정에서 엄히 금하는 벽력탄 수백 발이 조정에 대립하는 귀교로 흘러간 정황이 포착되어 황상께서 진노하셨답니다. 그래서 어림군을 급파하시면서 귀교의 총단을 풀뿌리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초토화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임예린의 말에 나찰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서 돼먹지 못할 말장난을 치는 게냐? 오냐, 오늘 소림을 싹쓸이해 주지. 그러고도 그 세 치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지 보겠다. 전원 공격 준비하라!”
나찰녀의 명령에 신교와 무림맹 연합군 수백 명이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잠깐만!”
그때 전령의 보고를 받던 백골마군이 황급히 나찰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백골마군의 말을 듣던 나찰녀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결국 전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임예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다만 다음에 만날 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임예린!”
“호호호, 과연 다음이 있을까요? 어림군의 화포 공격을 받고도 살아난다면 한번 생각해보지요.”
임예린은 나찰녀의 매서운 눈빛에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더니 이번에는 귀면쌍살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맹주에게 전하세요. 이제 마각이 드러났으니 더 이상 숨을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요.”
귀면쌍살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해 올리도록 하지.”
신교와 무림맹의 연합군이 빠른 속도로 소실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풍도장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렇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둘 참이오? 당장 쫓아가서 일망타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됩니다. 지금은 저들이 퇴각하도록 내버려 두셔야 합니다.”
임예린이 청풍도장의 말에 즉각 반대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들을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라니 무슨 뜻이오?”
요혜신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서 임예린에게 물었다.
“지금 양쪽이 싸우면 틀림없이 양패구상하고 말 것입니다. 양패구상을 하면 저희가 훨씬 더 손해입니다. 저들은 아직 교주와 맹주가 건재하지만, 저희는 끝장이니까요. 차라니 지금 보내주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맹주도 이제는 이전처럼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동파의 현암자가 사라지는 교맹 연합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백골마군이 말한 것이 뭐였기에 나찰녀가 그토록 당황했을까요?”
“아마도 어림군이 총단을 공격해 들어간다는 정보를 들었겠지요.”
임예린의 말에 청풍도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마교 놈들이 어림군 수만 명의 화포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이 참으로 볼 만하겠군. 이번에 마교 놈들이 깡그리 소탕되면 이후로는 그놈들과 더 이상 볼 일이 없겠구나. 하하하.”
청풍도장의 말에 임예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림군 수만 명이 출동했다는 것은 사실 저들을 겁주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황제의 어림군이 그렇게 쉽사리 움직이겠습니까?”
임예린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아니, 방금 저들이 어림군이 공격해 들어간다는 정보를 받아서 물러간 거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청풍도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어림군이 실제로 이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럴 것처럼 공문서를 하나 위조해서 저들의 눈에 띄게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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