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24화 (124/201)

#   124 - 광세일소_한추영 - 157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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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태동(胎動) (6)

냉정한 눈빛으로 사태를 관망하던 기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석추명이 신교의 수라대주인 것은 맞지만 누가 쓴지도 모를 글귀만 가지고 석추명을 범인으로 단정 짓기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기하진의 말에 공애대사가 소리쳤다.

“하지만 거꾸로 저놈이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기하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공애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이 자리에 마교의 수뇌부들이 거의 다 모여 있으니 공명대사가 정말 납치되었다면 저들 수중에 있겠지요. 지금 당장 신승께서 저들 중 한두 명을 붙잡아 공명대사와 교환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요? 공명대사만 풀려나면 석추명의 말이 거짓말인지도 알 수 있겠지요.”

기하진의 말에 석추명도 급히 맞장구쳤다.

“공명대사가 납치범의 얼굴을 보았다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줄 것입니다.”

그러자 나찰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석 대주, 사내답지 못하게 자신이 한 짓을 부인하다니, 임무를 수행해놓고도 공을 포기할 셈이냐? 교주님께는 내 알아서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 호호호.”

그 말에 석추명은 나찰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지난번에도 나를 속여 달아난 주제에 또다시 나를 모함하다니. 내 눈에 다시 띄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거늘!”

석추명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나찰녀에게 신형을 날리려고 하자 갑자기 눈앞에 흰 그림자가 언뜻 비치더니 신승 무학대사가 팔을 뻗으며 석추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승의 움직임이 아까 음양사자 못지않았다.

“멈추시게.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거늘 감히 어디로 내빼려고 하는가?”

신승의 말에 석추명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이번에는 신승이 나찰녀를 바라보며 준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공명을 데려오시오. 감히 본사 승려의 살해와 납치를 사주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시주들을 용서할 수 없소이다.”

“호호호, 우리는 석 대주에게 공명을 데려오라고 했지 공승을 죽이라고 시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석 대주가 공승대사를 일 장에 때려죽일지 누가 알았겠어요? 원래 석 대주는 성정이 음험하고 손속이 악랄하여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긴답니다.”

신승이 석추명을 의심한다고 생각한 나찰녀가 온갖 요망한 말로 신승의 의심을 더욱 키우려고 했다.

“원래 공명을 납치한 이유는 이번 침공 전에 소림사의 약점을 찾으려고 한 것인데, 그 늙은이의 입이 워낙 무거워 아무런 정보도 빼낼 수가 없더군요. 이제 그 늙은이는 우리에게 쓸모없으니 소림사에 돌려드리지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쪽에서 지닌 의문점이라도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호호호.”

나찰녀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신승을 바라보더니 수하들에게 말했다.

“공명을 데려오너라.”

잠시 후 비쩍 마른 꺽다리 스님 한 분이 양팔은 무쇠 수갑으로 결박당한 채 나찰녀 수하들의 손에 이끌려 왔다. 가뜩이나 야윈 데다 며칠 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두 볼이 움푹 패고 눈빛은 초점이 없이 멍했다.

소림방장 공애대사는 사제의 수척한 모습에 마음이 아파 큰 소리로 사제의 이름을 불렀다.

“공명 사제, 몸은 괜찮은가?”

공애대사의 말에 공명이 멍한 표정으로 공애대사와 신승 무학대사를 포함하여 자신의 앞에 늘어선 소림승들을 바라보았다.

“장, 장문인, 공승 사제가, 공승 사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갑자기 공명대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몸을 휘청거렸다.

“집안 얘기는 가서 하여라. 그리고 공승을 누가 죽였는지 그 의문은 꼭 풀어주도록 하고. 호호호.”

나찰녀가 공명대사의 무쇠수갑을 풀어주며 말했다.

손이 풀린 공명대사가 비틀거리며 공애대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공애대사가 한달음에 달려가 사제를 부축했다.

“그래, 얼마나 고초가 많았는가?”

“제가 받은 고초가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다만....”

공애대사의 안타까운 표정을 바라보던 공명대사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문사형, 공승 사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승 사제가 말입니다.”

“진정하시게. 이 또한 공승 사제의 업인 것을. 공승 사제는 아마 해탈했을 것이네.”

공애대사의 위로에도 공명대사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이게 모두 제 잘못입니다. 사제가 죽은 것은 모두 어리석은 제 잘못입니다.”

공명대사가 사제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자 공애대사는 안타까워 공명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때 신승 무학대사가 공명대사에게 다가왔다.

“한 번 나고 죽는 것은 인연 따라가는 것이니 우리가 어쩌지는 못한다. 하지만 시비곡직은 가리지 않을 수 없지. 공명, 확실히 말하거라. 공승을 죽이고 너를 납치해간 자가 누구냐?”

신승의 목소리가 벼락같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석추명은 혹시라도 공명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할까 봐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공명대사 앞으로 다가갔다.

“공명대사님, 저 간악한 무리들이 저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대사님은 불법에 정통하시고 사리가 밝은 분이시니 부디 저의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하지만 공명대사는 석추명을 보자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어찌하여 여기에 서 있는 것이냐? 공승을 죽이고 또 누구를 죽이려고 여기에 왔냔 말이다!”

공명대사가 석추명에게 삿대질을 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석추명은 공명대사가 뜻밖에도 자신을 살해범으로 주목하자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대, 대사님. 똑똑히 보십시오. 공승대사를 죽이고 대사님을 납치해간 사람이 정말 제가 맞단 말입니까?”

그러자 공명대사가 벌떡 일어서 당장이라도 석추명에게 달려들 기세로 소리쳤다.

“내 두 눈으로 네놈이 공승을 죽이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거늘, 어찌하여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이놈!”

공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승의 손이 한차례 출렁이더니 석추명의 가슴을 때려왔다.

석추명은 공명대사의 말에 경황이 없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신승의 공격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리릭. 석추명의 몸이 그대로 뒤로 서너 척 움직였다. 신승의 공격도 빨랐지만 이를 피하는 석추명도 빠르기 그지없었다.

“시비가 명백히 밝혀졌으니 무릎을 꿇고 죄를 받아라.”

신승이 석추명을 따라오며 연거푸 주먹을 떨쳐냈다. 갑자기 허공에 수십 개의 주먹이 일렁이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어느 주먹이 허상이고 어느 주먹이 실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석추명은 공명대사의 말에 충격을 받아 심기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석추명이 무의식적으로 비천검을 뽑아 한차례 빙그르르 돌렸다. 주먹의 환영이 검에 부딪히자 연기처럼 허공에서 깨지며 사라져 갔다.

석추명의 무공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고강하자 신승은 두 손을 합장한 채 한 차례 뒤집더니 벼락같이 앞으로 뻗어냈다. 신승의 두 손바닥이 어느새 금빛으로 물들어 환하게 빛을 냈다.

“불영신장(佛影神掌)이로구나!”

소림승 중의 누군가 신승의 무공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신승의 손바닥이 이르는 곳마다 허공에 기다랗게 금색 잔상이 남았다.

석추명은 자신의 눈앞에 거대한 황금 손바닥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간, 어디로 피해야 할지 막막했다. 위로 몸을 솟구쳐도 손바닥을 뛰어넘을 수 없고 뒤로 내빼더라도 순식간에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그 순간 기하진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며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살아남아서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밝혀내야겠다!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며 불안한 마음이 즉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석추명이 화산의 검동에서 깨우친 것은 모든 것이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심검(心劍)의 경지. 한번 마음을 먹자 애써 생각지 않아도 검이 스르르 저절로 움직였다. 석추명은 어느새 공중으로 수십 척 뛰어올라 거대한 불장(佛掌)의 손바닥 한가운데 검을 꽂고 단번에 아래로 내리며 파죽지세로 잘라갔다.

쾅!

비천검이 바닥을 때리면서 바위가 갈라져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신승은 석추명의 검법에 또 한차례 감탄하고야 말았다.

‘설마, 이 청년이 검의 절대 경지라는 심검을 익힌 것인가?’

신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약관에 불과한 나이인데 검술로는 이미 상대할 자가 없다. 그런데 이런 고수가 마도(魔道)에 물들어 있다니! 자신이 이 청년을 제압하지 않으면 앞으로 무림에 무궁한 후환이 생기리라.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자질이 아까우나 천하 무림의 평안을 위해서 어쩔 수 없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아미타불.’

신승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먹을 허공으로 뻗어냈다. 백보신권이었다. 아까 총포부대의 공격에서 석추명을 구해냈던 바로 그 무공으로 다시 석추명을 공격했다.

백보신권은 주먹이 실제로 닿는 것이 아니므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막기가 불가능한 무공이었다. 게다가 주먹마다 엄청난 공력이 응집되어 스쳐 맞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석추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어디를 때릴지 모를 백보신권을 막아내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상대방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석추명이 죽을 힘을 다해 혼원일기검을 펼쳐냈다. 이미 체력은 한계치에 다다르고 공력은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있었다.

찌지직.

석추명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그물망처럼 촤라락 펼쳐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림 승려들과 나찰녀 일당들은 신승과 석추명의 싸움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이 싸운 지 이미 백여 초에 다다르고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 어느 누가 소림신승을 상대로 백여 초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석추명이 비록 수십 초식을 신승과 대등하게 싸우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공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어서 점점 패색이 짙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강자보다 약자를 응원하기 마련. 지금은 잘잘못을 떠나 소림승들조차 손바닥에 땀을 쥐며 속으로 석추명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석추명과 신승의 싸움을 지켜보던 기하진도 눈에 이채를 띠었다. 경이로웠다. 지난번 임예린의 방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석추명의 무공은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아래였다. 그런데 이제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공력은 아직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 같으나 신묘한 검술은 공력의 부족함을 다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다.

잠시 상념에 빠져 석추명을 지켜보던 기하진은 석추명의 기운이 다 빠졌음을 눈치챘다. 마침 신승의 손바닥이 소림의 또 다른 절대 신공, 수미산장(須彌山掌)을 펼치며 석추명의 가슴을 강타하는 중이었다. 공력이 모두 소진된 석추명은 산을 뒤엎을 듯이 다가오는 공세를 막아내기는커녕 이제 팔을 들 힘조차도 없어 보였다.

위험하다!

그때 멀리서 카랑카랑한 중년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승, 손에 사정을 두시오. 그 아이는 화산신검이외다.”

하지만 이미 신승의 손바닥에서 격출된 내기는 해일처럼 석추명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그 순간, 기하진이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며 튀어나가 신승의 수미산장을 대신 받아냈다.

펑!

응집된 두 내기가 터지면서 신승과 기하진의 주위 반경 십여 척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흙이 뒤집히고 나무가 뽑히며 풀잎과 돌멩이가 온 사방으로 날렸다.

사람들은 갑자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빼고 뿌연 흙바람에 휩싸인 두 사람의 희미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흙먼지가 가라앉자 신승과 손바닥을 맞대고 있는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신승의 수미산장을 정면으로 받아낸 사람은 역시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무림맹 용봉단주 기하진이 아닌가.

신승조차도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젊은이들이 계속 나타난단 말인가.

화산신검이라는 소리에 공력을 일부 급히 회수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내뻗은 수미산장에는 8성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소림의 절대 무공인 수미산장에 백 년을 수련한 자신의 내공 8성을 실었으니, 당금 소림의 방장인 공애라 하더라도 이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이 이를 받아내다니.

“아니, 요혜신니 아니시오?”

공애대사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말했다. 요혜신니와 그 일행들은 아직 수십 장의 거리 밖에 있었다.

“요혜신니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그리고 저자가 화산신검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공애대사의 말에 요혜신니는 여전히 이삼십 장 밖에서 차분히 말했다.

“저 아이가 화산신검이라는 사실은 앞에 있는 마교의 무리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저희가 소림사로 온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편, 갑자기 요혜신니 일행까지 나타나자 나찰녀는 초조한 듯 공명대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공명대사가 알겠다는 듯이 눈빛을 한차례 교환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석추명, 내 오늘 기필코 공승 사제의 복수를 하겠다!”

공명대사가 돌연 탈진한 석추명에게 달려들었다.

요혜신니와 함께 온 임예린은 아까부터 공명대사와 나찰녀가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명대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불길한 느낌이 들어 소리내어 외쳤다.

“저자를 막아야 해요!”

임예린의 목소리에 기하진은 공명대사가 석추명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소리인 줄 알고 즉시 몸을 날려 석추명의 앞을 지켰다. 그런데 공명대사는 석추명에게 달려오는가 싶더니 돌연 방향을 홱 바꾸어 옆에 있던 신승의 복부를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공명대사가 신승을 공격한 장법은 아름드리 통나무도 단박에 쪼개는 금강열타장(金剛裂打掌)이었다.

신승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사질에게 공격을 받고 시뻘건 핏물을 울컥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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