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 광세일소_한추영 - 1572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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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태동(胎動) (5)
음양사자가 왕취선의 등을 떠받치며 앞으로 밀자 그때까지 뒤로 밀려 나가기만 하던 왕취선이 앞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달마팔로는 자신들 여덟 명이 내쏘는 내기를 한 사람이 막아내자 그때까지 고요하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걸어가라.”
음양사자의 말에 왕취선은 공력을 돋워 다시 달마팔로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호호호, 마 장로, 사마 대주, 생각보다 늦었군요.”
나찰녀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석추명이 바라보니 어느새 음양사자 뒤에 탈명검 마립과 명왕대주 사마곤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있었다.
“나찰녀, 큰소리 탕탕 치더니 아직 소림은 어쩌지 못했나 보오이다. 으하하하.”
마립이 눈앞에 서 있는 소림 승려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호호호, 소림사에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더니 신승 말고도 달마팔로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분들은 연세가 저렇게 많아도 아직 팔팔하시니 비결이 참 궁금하군요.”
“흥! 소림사에만 원로고수가 있다던가? 신교에도 원로가 있음을 보여주지.”
나찰녀의 말에 백골마군이 달마팔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음양사자가 돌연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백골마군을 저지했다.
“이 늙은이들은 우리가 맡겠소이다. 당신들은 소나무 꼭대기에 있는 신승이나 상대하시구려.”
음양사자의 말에 왕취선, 귀면쌍살이 앞으로 나서 달마팔로와 맞섰다.
그때까지 소림신승 무학대사는 나무 위에 앉아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마 사제들이 저 세 사람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 평소에 소림 무공이 궁금했었는데 당신들이 정말 무림의 태산북두인지 내 한번 시험해봐야겠소이다.”
말을 마친 음양사자가 갑자기 달마팔로 중 한 명의 뒤에서 나타나며 갈고리 손을 불쑥 내밀어 고승의 목을 움켜잡으려 들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건만 달마팔로 앞에 있던 사람이 언제 그 뒤로 신형을 이동했는지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귀면쌍살조차 속이 뜨끔하여 음양사자를 곁눈질할 정도였다.
‘저 여편네의 무공이 정말 괴이하기 짝이 없구나. 공력은 모르겠지만 경신법 하나만큼은 확실히 나를 능가하는군.’
음양사자가 공격해오자 달마팔로는 일제히 좌우로 갈라지며 진법을 펼쳤다. 그러자 귀면쌍살과 왕취선이 즉시 앞으로 나서며 음양사자의 측면을 지원했다.
“우리도 같이 재미 좀 봅시다.”
귀면쌍살이 웃으며 말하더니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장력을 발출했다.
음양사자, 귀면쌍살, 왕취선 이렇게 세 사람이 달마팔로와 맞서자 무공의 고하가 금방 드러났다. 왕취선은 한 명을 겨우 상대할 정도였고, 귀면쌍살이 두 명을 상대하며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음양사자는 나머지 다섯 명을 모두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림 승려들은 소림신승을 제외하고 소림사에서 무공이 가장 높다고 여기던 달마팔로가 세 사람을 상대하여 싸우면서도 여전히 승기를 잡지 못하자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마교의 무리가 승승장구한 것은 벽력탄에 의지했기 때문일 뿐, 만약 무공을 써서 제대로 겨룬다면 자신들이 절대 뒤질 리가 없다고 믿었는데 오늘 그 믿음이 여실히 깨지고 있었다.
달마팔로는 싸울수록 승포자락이 팽팽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정수리 끝에서는 하얀 김이 눈에 보일 정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면 음양사자는 아직 신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석추명은 음양사자가 나타나자 마음이 착잡했다. 신교의 교주 남무궁에게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진 음양사자가 신교를 도와 소림사를 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맹주 남궁진악에게 빚진 은혜를 갚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남무궁을 돕는 셈이니 그 속이 어찌 편하겠는가?
그때 왕취선이 갑자기 무쇠 곰방대에 입을 대고 ‘후’ 부는 모습이 석추명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곰방대 끝에서 허연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흑묘아, 백묘아가 튀어나와 왕취선을 경계하며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추명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공각대사도 저 수법에 당하지 않았던가? 독 연기가 분명하다.
“독연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석추명이 달마팔로를 향해 소리쳤다.
달마팔로를 비롯해서 소림승들은 독연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얼른 호흡을 막았다.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숨을 참은 채 싸우느라 달마팔로의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무공을 펼칠 때는 기혈의 순환이 중요하며 특히 강적을 맞아 싸울 때는 기혈의 흐름이 더욱 원활해야 하는데 이제 숨을 막자 기혈의 흐름이 방해받아 달마팔로가 펼치는 무공에 허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음양사자의 흰 손이 승려들의 가슴 앞자락을 가로지르며 다섯 줄기 기다란 혈선을 그어 놓았다.
“윽!”
드디어 달마팔로 중 한 사람이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음양사자의 손이 쉬지 않고 다시 다음 사람을 노리며 달려드는 찰나, 석추명이 몸을 날려 음양사자를 막아섰다.
“선배님! 손을 멈추십시오.”
음양사자는 손을 갈고리처럼 벌리고 내려찍으려다가 갑자기 석추명이 나타나자 허공에서 손을 멈춘 채 석추명을 노려 보았다.
“비켜서라.”
“선배님! 그때 하신 말씀을 잊으신 겁니까?”
석추명이 음양사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석추명이 음양사자를 선배라고 부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배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달마팔로 중 얼굴이 해골바가지처럼 야윈 고승이 의심에 찬 눈길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두 사람이 서로 아는지 몰랐군요. 암요, 모두 같은 편인데 힘을 합쳐야죠. 잘했어요, 석 대주.”
나찰녀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이미 피어오른 의심의 불길에 기름을 퍼부었다.
해골바가지 고승이 다시 준엄하게 석추명에게 물었다.
“같은 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석추명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나찰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소림신승께서는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구해주신 것은 아니겠지요? 이 사람은 여러분들이 마교라고 부르는 우리 백련신교의 수라대주예요. 그러니 같은 편이 아니겠어요? 호호호.”
나찰녀의 말에 소림 승려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림신승마저도 표정이 굳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석추명을 쳐다보았다.
“같은 편이 아닙니다. 같은 편이라면 왜 저들이 벽력탄을 쏘며 저를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석추명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거야 집안 단속을 위해서이지. 제자가 잘못하면 어느 문파라도 당연히 벌을 주지 않겠소이까? 그렇다고 그 제자가 그 문파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이번에는 백골마군이 나찰녀의 말을 두둔하며 나섰다.
“석 대주, 네 입으로 말해 보아라. 네놈이 신교의 수라대주가 아니란 말이냐?”
나찰녀는 소림신승이 석추명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듯 석추명을 몰아갔다.
“나, 나는....”
석추명은 여기서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하면 소림사의 오해가 더욱 깊어질 듯하여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호호호, 네놈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네놈 정체를 알려줄 사람이 또 한 명 있지. 우리가 아무리 얘기해봐야 소림사의 고승들께서는 마교 놈들이 하는 소리라고 믿지 않으실 테지만, 무림맹의 용봉단주가 하는 말이라면 다들 믿으시겠지.”
나찰녀가 갑자기 기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소림사 승려들도 모두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소림승들은 아까 공각 대사가 기하진에게 “기 단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기 단주, 당신이 한번 말해 보시지. 이 자의 이름은 석추명, 직책은 백련신교의 수라대주야. 내 말이 맞지 않나? 내가 지금 거짓을 얘기하는가?”
나찰녀의 말에 기하진이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나찰녀의 말을 시인한다면 나찰녀의 손에 놀아나는 꼴밖에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찰녀가 묻는 말은 거짓으로 말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부분이 아닌가. 잠시 기하진의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며 그 자리에 있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기하진의 입에 주목했다. 기하진은 말없이 석추명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소. 이 사람은 백련신교의 수라대주였소.”
기하진의 말에 수백 명이 모인 소림사 산문 앞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네놈이로구나. 공승을 죽이고 공명을 납치해간 놈이 바로 네놈이로구나. 이 노옴! 공명을 어디로 데려갔느냐?”
갑자기 누군가 울부짖으며 석추명에게 달려들었다. 석추명은 공격을 받자 무의식적으로 얼른 피했으나 상대방은 뜻밖에 고강한 무공으로 제2수, 제3수를 연달아 펼치며 석추명을 공격해왔다. 놀랍게도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은 소림사 장문인인 공애(空碍)대사였다.
석추명은 구대문파의 수장인 공애대사가 자신을 공격하자 반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방장대사님, 왜 이러십니까? 혹시 무슨 오해가 있지 않습니까?”
“네 이놈! 오해는 무슨 오해라는 것이냐? 네놈이 한 짓을 네놈 스스로 잘 알 텐데 뻔뻔하게도 소림사 산문을 다시 넘어들어오다니!”
소림방장 공애대사가 펼치는 한 수 한 수는 모두 지독한 살수였다. 평소에 인자하기 그지없는 방장대사가 오늘따라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사람처럼 살수만 펼쳐내니 주위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찰녀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언뜻 미소 짓는 모습이 기하진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여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자신도 어떤 연유로 소림 방장이 저토록 사생 결단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문인, 잠깐 멈추시게.”
드디어 신승 무학대사가 소나무 꼭대기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사숙뻘인 신승의 명에 공애대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두 눈은 석추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문인,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공승이 죽고 공명이 납치를 당했다니?”
신승의 물음에 공애대사가 무너지듯 신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숙, 며칠 전에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침입하여 공승 사제를 죽이고 공명 사제를 납치해갔습니다.”
장문인의 말에 소림 승려들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공승과 공명대사가 보이지 않은 지 이삼일 되기는 했으나 아무도 이들이 죽거나 납치되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감히 소림사에 잠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납치를 한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신승도 마찬가지였다.
“장문인, 자세히 말해 보시게. 감히 누가 소림사에 잠입한단 말인가?”
추상같은 신승의 추궁에 공애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며칠 전, 저와 공승, 공명 사제 두 사람은 마교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제 방에서 대책을 강구하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무당파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공승은 아랫배에 일장을 맞고 절명해 있었고 공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승의 참혹한 모습이 떠오르는지 이야기를 하는 공애대사의 두 눈이 시뻘게지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시에 아무도 방장실 경계를 서지 않았더냐?”
신승이 준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승들이 교대로 경내의 번을 서고 있었고 방장실 주위에도 열두 명의 제자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 사실이 이상하여 경계를 서던 제자들을 모두 불러 물어보았으나 침입자를 보았다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석추명이 억울해하며 공애 대사에게 물었다.
“침입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찌하여 저를 콕 찍어서 범인이라고 단정하십니까?”
그러자 공애대사가 석추명을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뭣이라? 네놈이 직접 글을 써서 남기지 않았느냐. 신교의 수라대주가 공명을 데려가니 만일 이 사실을 외부에 누출할 시에는 공명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이다!”
울분에 찬 장문인의 말을 듣자 소림 승려들은 그제야 왜 장문인이 지금까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는지 알 수 있었다.
“사숙 어른, 억울하게 죽은 공승과 모진 고초를 당하고 있을 공명을 생각하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제가 잠시 본분을 망각했나이다.”
공애대사가 눈물로 아뢰었다. 공애대사의 말을 듣던 신승이 시퍼런 안광을 내쏘며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석추명은 누명을 쓰자 당황하여 소리쳤다.
“모함입니다. 누가 저를 모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랬다면 뭣 하러 다시 소림사로 돌아왔겠습니까?”
석추명은 소림신승을 바라보며 해명했으나 석추명을 노려보는 신승의 눈초리에는 이미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석추명은 답답한 마음에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야. 누명이야!”
자신도 최근에 무림맹의 계략으로 누명을 쓴 적이 있던 기하진은 지금 이 순간 석추명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지 공감이 되었다. 그때 문득 나찰녀가 미소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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