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 광세일소_한추영 - 157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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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태동(胎動) (4)
나찰녀는 옆에 있는 백골마군을 바라보며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백골마군이 나찰녀에게 알았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찰녀가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고승들에게 다시 눈길을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위에서 부처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건가?미안하지만 그 위에 앉은 꼴을 보니 참새 떼밖에 연상되지 않는군.”
나찰녀의 말에 소나무 위에 앉은 고승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백골마군이 나찰녀에게 경고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저들은 소림사 달마원의 8대 장로로 신승의 사제들이오. 소림사 제일의 원로고수들로 절대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자들이오.”
“호호호, 마군께서는 연세가 들더니 겁도 많아지셨군요. 이래서 사람은 나이 들면 소용없다니까. 젊은 제가 보여드리지요, 저 땡중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나찰녀가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크게 웃더니 별안간 소리 높여 명을 내렸다.
“새 몰이 한번 해보자꾸나. 총포부대는 즉각 발사준비를 하라.”
나찰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벽력탄을 장전한 총포부대원 20여 명이 우르르 달려 나와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즉각 소나무 위의 신승과 달마팔로를 향해 총포를 겨누었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석추명은 총포부대가 소림 고승들을 겨누자 깜짝 놀랐다. 벽력탄이 발사되면 소림사도 화산파와 같은 아비규환에 빠질 것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멈춰라!”
석추명이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더니 비천검을 뽑아 들고 총포부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쇳덩어리도 단박에 자르는 비천검으로 총포를 한꺼번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석추명이 몸을 날리자마자 마치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찰녀가 명을 내렸다.
“쏴라!”
그러자 뜻밖에도 소나무 위의 고승들을 겨냥한 총포부대가 아니라 그 좌우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나더니 벽력탄이 석추명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석추명은 깜짝 놀라 즉시 공력을 최대한 개방하여 신형을 공중 높이 뽑아 올렸다.
탕! 탕! 탕! 탕!
석추명을 향해 날아오던 벽력탄 수십 발이 석추명의 발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그 자리에 있던 총포부대원 20여 명이 그대로 벽력탄을 맞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참혹한 모습으로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럴 수가!”
공중 높이 떠오른 석추명은 발밑에서 벌어진 참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찰녀는 석추명이 뒤따라오는 것을 눈치채고 총포부대를 셋으로 나눈 다음, 그중 두 부대를 비밀리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마침 소림신승과 달마팔로가 등장하여 석추명의 주의를 분산시키자 나찰녀는 수하 20여 명을 제물로 삼아 석추명을 죽이려고 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악인이기로서니 수하들의 목숨마저 티끌같이 여기는 나찰녀의 지독함에 석추명은 치를 떨었다.
한 마리 학처럼 하늘 높이 떠오른 석추명을 바라보며 나찰녀가 느긋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새가 되고 싶은 놈이 많군. 네놈이 어디까지 날아오르는지 두고 보자. 벽력탄 재장전!”
철커덕. 벽력탄이 재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석추명의 몸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벽력탄이 다시 발사되면 석추명은 꼼짝 못 하고 온몸으로 그 벽력탄을 다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무공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꼼짝없이 온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판이었다.
그때 좌측 총포부대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총포부대원들을 향해 강력한 장풍을 일으키며 돌진해왔다.
“썩 총포를 놓지 못할까!”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하진이었다. 기하진은 사마경의 꾐에 빠져 누명을 쓰고 혼자 달아난 후 이를 갈며 귀면쌍살을 추적했었다. 그러다가 겨우 자취를 찾은 기하진은 귀면쌍살이 소림사로 향하자 역시 은밀히 몸을 숨기고 뒤따라 왔던 것이다.
기하진과 석추명의 무공이 모두 뛰어나고 워낙 은밀히 움직였기에 두 사람 모두 석연찮은 기색을 느끼면서도 그때까지 누가 또 귀면쌍살과 나찰녀를 뒤쫓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콰쾅!
기하진이 내쏜 강맹한 손바람이 회오리바람처럼 좌측 총포부대를 휩쓸면서 총포가 나뭇가지처럼 허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흥! 네놈 상대는 내가 해주마. 내 진즉에 네놈이 뒤따라 오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 말과 동시에 강물이 범람하여 둑을 무너뜨리듯 강대한 기류가 기하진의 등을 향해 부딪쳐왔다. 바로 귀면쌍살의 독문무공, 철산장이었다.
기하진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귀면쌍살이 기하진을 가로막은 것이다.
찰나지간에 두 사람이 서로 한 번씩 손속을 주고받았으나 그 순간에도 석추명의 몸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좌측 총포부대가 기하진의 장력으로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측 총포부대가 남아있었다.
탕! 탕! 탕!
드디어 총포가 불을 뿜으며 벽력탄을 내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총포 소리가 몇 번 나지도 않았는데 우측 총포부대원들이 갑자기 양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마치 강맹한 내가고수의 주먹에 얻어맞는 듯이 보였다.
기이한 광경에 나찰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뜨악한 눈길로 백골마군을 쳐다보았다. 백골마군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 이것은 백 보 밖에서도 적을 쓰러뜨린다는 백보신권(百步神拳)!”
그와 동시에 백골마군의 시선이 소나무 꼭대기에 있는 신승을 향했다. 나찰녀도 백골마군을 따라 소나무 위로 눈길을 돌리니 놀랍게도 신승이 소나무 꼭대기에 앉은 채로 허공을 향해 연신 주먹을 뻗어 내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측 총포부대원들의 몸이 낙엽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좌우로 튕겨 나갔다.
소림신승이 소림사에서도 실전된 것으로 여기던 전설의 무공, 백보신권을 펼쳐낸 것이다.
“오오, 내 눈으로 백보신권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소림사 승려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 경탄을 금치 못하며 불호를 외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석추명은 뜻밖에도 기하진과 소림신승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석추명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한 마리의 백룡처럼 신룡보를 펼치더니 수중에 든 비천검을 휘둘러 수십 정의 총포를 모두 두 동강을 내어 버렸다.
한편, 귀면쌍살이 나타나자 공각대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귀면쌍살 네놈이 감히 소림사를 노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기 단주, 물러나시게. 그놈은 내가 상대하겠네.”
공각 대사는 무림맹 천림원의 원주로 기하진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각대사의 말에 기하진이 어쩔 수 없이 물러나려고 하자 갑자기 복면을 쓴 또 한 사람이 공각대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대사는 내가 상대해 드리리다.”
복면인은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뾰족한 쇠막대기를 휘두르며 공각대사를 공격했다. 뾰족한 쇠막대기는 담뱃대와 같이 끝부분이 뭉툭했는데 순식간에 열 군데도 넘는 상반신 주요 혈도를 때렸다.
“내 평소에 대사의 무공이 상당히 궁금했는데 마침 잘되었소이다. 하하하.”
복면인이 휘두르는 쇠막대기는 느린 듯하다가 번개같이 휘몰아치고 왼쪽을 공격하는 듯하다가 돌연 오른쪽을 때리는 등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공각 대사는 예측을 불허하는 상대방의 뛰어난 무공에 놀라면서도 한 가닥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왠지 이 복면인의 병기와 무공이 눈에 익은 듯해서였다.
쇠막대기를 피해 순식간에 서너 걸음이나 뒤로 물러선 공각 대사가 돌연 불호를 외며 선장을 휘두르며 복면인의 쇠막대기를 막아섰다.
“아미타불. 네놈은 또 누구냐? 썩 정체를 드러내지 못할까!”
공각 대사가 휘두르는 선장은 무쇠를 녹여 만든 것으로 무게만도 이삼십 근에 달했다. 공각 대사의 무쇠 선장과 복면인의 쇠막대기가 서로 부딪치자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공각 대사는 싸우면 싸울수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 가느다란 쇠막대기와 알 듯 말 듯 한 저 무공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하하하, 아직도 생각이 안 나셨나 보군. 이러면 좀 아시려나?”
복면인이 돌연 쇠막대기 한쪽 끝을 입에 물고 후 불자 쇠막대기 반대쪽 뭉툭한 끝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공각 대사는 이 자가 누군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설마 왕취선, 왕팔야!”
“하하하, 천림원주께서 아래 거느리고 있던 무공강사를 몰라보다니 이거 섭섭하외다.”
그 말과 동시에 복면인이 복면을 벗어 던졌다. 과연 그 안에서 코끝이 늘 빨간 왕취선의 얼굴이 나타났다.
“앗!”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자 놀란 사람은 공각 대사만이 아니었다. 기하진과 석추명도 깜짝 놀라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설마하니 왕취선도 맹주의 심복이란 말인가?
“하하하”
왕취선의 담뱃대가 다시 공각 대사를 공격해 들어왔다. 왕취선이 귀면쌍살, 마교의 무리와 함께 소림사를 공격해오다니! 공각 대사는 왠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전신 대혈을 노리고 날아드는 왕취선의 담뱃대 공격부터 피하고 봐야 하리라.
공각 대사가 담뱃대를 피하려고 하는데 돌연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끝을 찌르더니 한쪽 무릎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뿔싸, 당했구나! 설마 독연(毒煙)인가?’
공각 대사가 미처 피하지 못한 사이, 시뻘겋게 달궈진 왕취선의 담뱃대 머리가 아랫배의 천추혈을 때려왔다.
지지직.
“으윽!”
그다음 순간, 살이 타들어 가는 누린내가 나나 싶더니 화기(火氣)가 침투하여 단전과 심장을 공격해왔다. 병기도 특이했지만 무공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공각 대사가 쓰러지자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달마팔로가 앉은 자세 그대로 날아 공각대사 앞을 막아섰다. 붉은 가사를 입은 고승들이 앉은 자세 그대로 일제히 허공을 날아 내려오자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물러나라.”
달마팔로가 일제히 좌장을 내뻗자 왕취선은 강력한 무형의 기운에 부딪혀 뒤로 나뒹굴었다. 왕취선은 자신도 무공 고수인데 뒤로 나뒹굴자 수치심에 대번에 얼굴을 붉혔다. 즉시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천근추 무공을 써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달마팔로가 뻗어 낸 장력이 누에고치가 명주실을 뽑듯 쉬지 않고 뻗어 나와 계속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그렇게 십여 장이나 뒤로 나뒹굴자 왕취선은 이제 부끄러움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왕취선의 등을 떠받치고 강력한 내기를 뿜어내어 달마팔로의 신공을 막아냈다. 고마운 마음에 왕취선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새하얀 은발에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가늘고 길쭉한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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