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 광세일소_한추영 - 1556576
#
제119화 태동(胎動) (2)
요혜신니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비천검 독고양이 선택한 사람이니 틀림없겠지.”
요혜신니가 드디어 자신의 말을 들어줄 기미를 보이자 임예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니까 맹주 남궁진악이 자신의 가문인 남궁세가가 맹주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귀면쌍살을 이용하여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각 문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을 미리 제거한 것이지요.”
“흠”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맹주에게 대항하려면 우리도 뜻이 맞는 사람을 모아야 합니다. 다른 문파들을 설득하려면 장문인께서 정도련의 련주를 맡으셔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늙은이보다 덕망 있는 다른 사람에게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안됩니다! 이 문제는 겸양하실 게 아닙니다. 현재 장문인보다 맹주에게 맞설 만큼 강단이 있고 무공이 높으며 지도력이 있는 분은 없습니다. 장문인께서 나서시지 않는다면 다른 문파는 정도련에 가입하고 싶어도 맹주가 두려워서 그런 마음을 품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보다 더욱 급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가냘파 보이는 임예린의 몸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임예린은 당당하고 씩씩했다. 일봉은 옆에서 임예린을 지켜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더욱 급한 일이라니?”
요혜신니가 물었다.
“지금 무당파와 소림사가 위험합니다. 화산파를 멸문시킨 걸 보면 다음번 목표는 아마 아미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맹주는 화산과 아미를 먼저 치고, 그다음 무당과 소림을 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미파가 서쪽 깊숙한 곳에 떨어져 있는 데다 지난번 사천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니 맹주는 아미파를 제쳐 두고 바로 무당과 소림을 치려 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무림맹에 아무리 고수가 많다고 해도 무당과 소림을 동시에 치기는 어렵지. 게다가 소림사에는 독고양에게 견줄 만한 무학 신승께서 아직 건재하시다네.”
요혜신니의 이야기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토록 상징적인 인물이 있다면 맹주에게는 더욱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신승마저 자신에게 굴복한다면 그 누가 더 반항하려 하겠습니까? 맹주의 음험한 성격으로 보면 아마 오래전부터 신승 주변에 간자를 심어놓았을 것입니다.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이 불시에 공격한다면 아무리 신승이라 하더라도 막기 어렵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제 생각에는 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고 무당을 먼저 공격할 가능성이 클 듯합니다. 무당이 무너지고 나면 소림은 고립무원이라 신승이 계시다고는 하나 오래 버티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남이가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하지만 임 소저, 먼저 벽력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제아무리 소림과 무당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는 하나 화산파 사례에서 보듯이 벽력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아니겠어요?”
남이의 말에 요혜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구나. 벽력탄이 아니었다면 화산파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게야.”
요혜신니가 임예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임 소저, 이에 대한 방도가 있겠소?”
어느새 요혜신니는 임예린에게 존칭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임예린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무림맹에서 벽력탄을 손에 넣기 위해서 틀림없이 사람을 매수했을 것입니다. 저희 쪽에서 지금 즉시 황상께 이 사실을 은밀히 고해 화포의 조제를 책임지는 화통감을 감찰하게 하고 더 이상 사사로이 벽력탄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조처를 하겠습니다.”
요혜신니는 임예린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겠구려. 그런데 임 소저, 그게 과연 가능하겠소?”
“가능합니다. 제 아버님은 황궁에서 쓰는 모든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황상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물품도 있고 하니 황상을 배알하고자 한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제가 이번 일을 소상히 아버님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황궁에 한 번 다녀오시기만 한다면 무림맹은 더 이상 벽력탄을 이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임예린이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장문인의 명의로 정도련 결성에 관한 서찰을 작성하여 은밀히 발송하는 게 좋겠습니다. 각 문파에서 최정예 고수들을 선별하여 일단 저희 상단으로 보내게 하는 것이지요. 형식적으로는 호천대의 외곽부대인 별천대가 되겠으나, 실제로는 정도련의 세 개 단과 아홉 개의 대대를 이끌어 갈 병력이 될 것입니다. 제가 정도련의 조직도와 직급별 임무를 구상해보았습니다. 장문인께서 살펴보시고 고견을 주시면 즉시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임예린이 미리 작성한 정도련의 조직도를 올렸다. 요혜신니는 임예린이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를 해오자 놀라워서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 놀랍구려. 임 소저의 주도면밀함이야말로 제갈공명을 찜쪄먹겠소이다, 하하하.”
요혜신니의 칭찬에 임예린이 그제야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미천한 재주인데 장문인께서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미천한 재주라니, 당치 않은 소리. 그렇지 않아도 정도련의 군사(軍師)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임 소저가 맡으면 되겠구려.”
요혜신니의 말에 임예린은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러면 군사, 우리는 이제 당장 무엇을 해야 하오?”
“각 문파에 서찰을 발송하는 일은 아미파 여협들께 맡기시고 장문인과 저희는 지금 즉시 무당산으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맹주가 무당산에 마수를 뻗치기 전에 저희가 먼저 도착해서 방비토록 해야 합니다. 그 전에 적들과 싸울 만한 고수 몇 분을 추려서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갑자기 나직이 탄식했다.
“우리 아미파에도 화산파의 매화검수단이나 소림의 백팔나한 같이 정예 부대가 있으면 좋으련만. 쓸만한 인재들은 이미 지난번 사천대전 때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고 남아있는 제자들 가운데는 이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별로 없구려.”
요혜신니의 말에 좌중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미파 제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죄인인 양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임예린이 요혜신니에게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이미 정도련의 련주이신데 어찌 아미파에서만 인재를 찾으려 하십니까? 잊으셨습니까? 저희 쪽에도 두 명의 절세고수가 있습니다.”
“절세고수라니 누구를 말하는 게요?”
요혜신니의 물음에 임예린이 빙긋 웃었다.
“지난 사천대전에서 용봉단주 기 소협의 도움을 받으신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리고 석 대주가 이제 화산신검이 되어 화산파의 진전을 이어받았으니 이 두 사람만 영입한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무릎을 딱 치며 말했다.
“기 단주를 내가 잊고 있었구려. 어찌 된 일인지 그때 당시 기 단주의 내공은 나를 훨씬 능가할 정도였소. 기 단주의 무공이라면 능히 맹주와 겨루어볼 만하지.”
요혜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예린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비천검 독고양 장로님께서 선택하신 화산신검도 능히 마교 교주를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테지.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늙은이는 기 단주보다 화산신검의 경지가 더욱 궁금하다오. 얼른 만나보고 싶구려.”
할 말을 다한 듯 요혜신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오늘 밤은 늦었으니 모두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합시다.”
*****
요혜신니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마룻바닥에 부들방석을 깔고 정좌했다. 요혜신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밤에 누워서 잠을 자는 대신, 그 시간을 이용해 수련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련을 하고 있었다. 공력이 어느 궤도에 오르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수련해도 그다음 날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요혜신니의 반개한 눈이 입정(入靜)에 들려는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왔으면 들어올 일이지, 뭘 그렇게 서성이는가?”
요혜신니의 말이 떨어지자 잠시 후,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웬 청년이 들어와 요혜신니에게 오체투지를 했다.
“아니 되는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또 발걸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장문인께서도 저의 고통을 부디 한 번 더 헤아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삼경이 지난 깊은 밤, 요혜신니의 처소를 찾아온 청년은 다름 아닌 일봉이었다. 일봉은 이제 곧 임예린이 무림맹과 백련신교라는 무림의 두 강자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려는 이때,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 괴롭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임예린을 노리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하나같이 무공이 고강한 자들로 자신과도 아마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눈 멀뚱히 뜬 채 임예린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한단 말인가.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낮에는 먹는 것도 잊고 수련했습니다. 하지만 검을 아무리 백 번, 천 번 휘둘러도 그때 사태님께서 한번 깨우쳐 주신 것만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미파의 무공을 이용해서 일신의 영예를 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벌어질 힘겨운 싸움에서 제 주인을 제대로 지키고 싶을 따름입니다. 만약 제 주인의 죽음을 두 눈으로 지켜보거나, 주인을 전장터에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주인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죽어서도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습니다.”
요혜신니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일봉을 안쓰러운 눈길로 잠시 바라보았다.
“충성도 과하면 독이 되나니, 네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바람이 과연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더냐, 아니면 주인에 대한 연모의 정이더냐?”
요혜신니의 말이 벼락같이 일봉의 귓전을 때렸다. 제 속마음을 들켜버린 일봉은 엎드린 그 자세로 굳어 버려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봉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충성심과 연모의 정을 굳이 둘로 나눠야 합니까?”
한참 뒤에야 일봉이 겨우 입을 열고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요혜신니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바세계의 모든 것이 다 공(空)으로 돌아가나니, 애초에 그 둘을 나눌 필요도 없지.”
요혜신니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일봉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게나, 일봉. 우리가 이렇게 만난 지가 벌써 세 번째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서로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렇구먼. ”
일봉은 묵묵히 요혜신니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아미파는 조사께서 문파를 창건하신 이래 대대로 여인들에게만 무공을 전수해왔네. 특히 상승무공은 불문에 귀의한 비구니들에게만 전수한다는 전통이 있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허상(虛像)에 불과하네. 아미파의 무공을 익히는데 남녀의 구별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승속(僧俗)의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모든 것이 인연 따라 흘러가는 것을. 게다가 자네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이 있으니 내 어찌 자네의 청을 더 거부하겠는가? 내 자네를 아미파 제18대 제자로 받아들이겠네.”
요혜신니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일봉은 귓전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듯했다. 갑자기 온 세상에 꽃비가 내리는 듯 벅찬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다.
“정, 정말이십니까?”
일봉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요혜신니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부터는 사부님이라고 부르거라. 나도 앞으로 너를 제자의 예로 대할 것이니라.”
“예, 사, 사부님.”
일봉은 자신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짓는 요혜신니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미파 요혜신니의 제자가 되다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요혜신니가 일어나 방 한구석에서 작은 목합을 꺼내왔다. 그 안에는 영단 세 알이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받거라. 소림의 대환단과 겨룰만한 우리 아미파의 보물, 아미백호단(蛾眉白虎丹)이니라. 아미백호단은 만들기가 지극히 어려워 남은 것이 이 세 알밖에 없구나.”
“이 귀한 영단을 어찌 저에게 모두 주십니까? 제자는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세 알밖에 없다는 말에 일봉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허허, 이 녀석.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게냐? 모든 것이 인연 따라간다고 하지 않더냐? 내가 이 영단을 보관해온 지 오랜 세월이 흘렀거늘 오늘에야 영단의 주인이 나타났구나. 지금 즉시 한 알을 잘 씹어 삼키거라.”
아미백호단은 내공 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영단으로 사실 아미파 장문인만 복용할 수 있었다. 다른 아미파 제자들은 이름만 들었을 뿐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일봉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요혜신니가 주니 그대로 한 알을 씹어 삼켰다.
“앞으로 백 일에 한 알씩 나머지 두 알도 모두 복용토록 하여라. 일봉 너는 무공에 대한 오성이 뛰어나니 삼백 일 이내에 반드시 아미 무공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너에게 먼저 아미심공(蛾眉心功)을 전수하니 잡념을 끊고 내가 이르는 대로 기를 운행토록 하여라.”
일봉은 요혜신니가 알려주는 구결 따라 내공을 일으켰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돌면서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바야흐로 아미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종사(一代宗師)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