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19화 (119/201)

#   119 - 광세일소_한추영 - 1555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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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태동(胎動) (1)

원무개의 말에 용봉단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했다.

기하진은 현장에 남무개가 나타나자 뭔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자신이 귀면쌍살인 줄 알고 얘기를 하던 맹주의 얼굴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원 단주, 내가 맹주 영패를 훔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이 영패는 총군사께서 직접 주신 영패요. 총군사께 확인해 보셔도 좋소이다!”

기하진의 말에 원무개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바로 그래서 훔쳤다는 것이다. 방금 네놈도 네놈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그 황금 영패는 맹주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맹도의 생사여탈권을 좌우할 수 있는 영패라고. 총군사도 이 영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늘 이렇게 중요한 영패를 총군사가 어찌 내어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므로 황금 영패는 무조건 맹주님께 직접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맹주께서는 네놈에게 그 영패를 준 기억이 없다고 하시더군.”

원무개의 싸늘한 눈빛을 바라보던 기하진은 그제야 맹주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맹주는 이 한 건으로 부맹주와 자신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정말 기막힌 일석이조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부맹주야 워낙 맹에 끼친 패악이 많으므로 맹주가 직접 목을 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어째서 제자인 자신마저 없애려고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 맹주가 귀면쌍살과의 관계를 자신에게 들켰음을 눈치챈 경우뿐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맹주가 사실상 귀면쌍살을 이용해 무림에 분란을 조장한 것도 믿기 어려운데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까 두려워 제자까지 없애려고 하다니. 무림의 수호자로서 정파 무림의 존경을 받던 맹주가 이 정도로 타락한 인간이었던가!

그동안 맹주에게 속아온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동시에 그토록 철저하게 진면목을 숨겨온 맹주가 새삼 가증스럽게 다가왔다.

“그렇군. 이 모든 게 다 가식이었던 거야. 정말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기하진이 죽은 천계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잡아들이지 않고.”

원무개의 호통에 용봉단원들이 주춤거리며 기하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기하진이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검을 허공에서 한 차례 휘둘렀다.

그 순간, 기하진의 검에서 시뻘건 화염이 번쩍이나 싶더니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용봉단원들은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가오기는커녕 서너 걸음 더 뒤로 물러나야 했다.

“누구든 타죽고 싶다면 가까이 와도 좋다.”

기하진이 성큼 걸음을 내딛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용봉단원들이 옆으로 쫙 비키면서 길이 생겼다.

남천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하진의 검에서 용암처럼 끓어 오르는 검기가 사방으로 분출되자 아무도 선뜻 기하진의 앞을 가로막을 생각을 못 했다.

기하진이 원무개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맹주에게 전하시오. 이 은혜는 꼭 갚겠다고 말이오.”

기하진이 2층 계단으로 내려가며 원무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원 단주, 정말 능력이 대단하시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부맹주 옆에 찰싹 붙어 알랑방귀를 뀌며 맹주 흉이나 보던 사람이 단 하루 만에 이렇게 주인을 싹 바꿀 줄이야. 크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기하진이 돌연 손에 든 장검을 원무개를 향해 던졌다. 장검이 부러질 듯 거친 파공음을 내며 쏜살같이 원무개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 엄청난 기세에 원무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기하진의 장검이 원무개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원무개 뒤에 있던 나무기둥에 박혀 들어갔다.

원무개는 얼굴에 무엇인가 끈적이는 것이 흐르는 듯해서 만져보니 어느새 왼쪽 뺨 위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상처는 별것 아니었지만 원무개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정도 거리에서 던진 장검을 자신이 제대로 피하지 못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수하들이 일제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원무개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기하진이 던진 검이 기둥에 손잡이 부분까지 박혀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그 광경에 원무개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

“임 소저,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소리인지 알고 하는 것인가? 맹주와 귀면쌍살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니, 내 아무리 맹주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기로서니 아무런 물증 없이 현 무림맹주를 모함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는가?”

요혜신니의 눈이 신광을 번쩍이며 자신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소녀를 쏘아보았다. 무공을 익힌 일봉조차 그 눈빛에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임예린은 허리와 목을 꼿꼿이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임 소저, 내 아무리 자네를 예쁘게 여기기로서니 이번에는 자네가 금도를 넘었어. 무림 맹주 직은 천하 무림을 호령하는 자리일세. 그 자리는 단순히 무공만 뛰어나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네. 그것보다 오히려 너그러운 덕망과 출중한 지도력을 겸비해야 하는 자리야. 내 비록 개인적으로는 맹주에 대해 불만이 많으나 그렇다고 확실한 물증도 없이 맹주를 비방하는 소리는 절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네.”

요혜신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임예린은 그렇다고 물러설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맹주와 귀면쌍살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목격된 사실입니다.”

“좋아, 그럼 내 물어보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자네가 직접 보았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그 두 사람의 관계를 목격했다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요혜신니의 물음에 임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련신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껄껄껄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미파의 제자들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

“지금 나보고 마교의 대주가 목격했으니 믿으란 겐가? 그놈이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가? 내 평소에 임 소저가 총명하다고 여겨왔는데 오늘 보니 이렇게 순진한 구석이 또 있구먼.”

요혜신니의 질책과 비웃음에도 임예린은 기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석 대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곤륜검객 초의공도 함께 계셨으나 안타깝게도 그분은 신교의 총단으로 잠입했다가 그만 목숨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는 소리가 아닌가? 유일하게 증인이 되어줄 정파 인사가 마교놈들의 손에 죽었는데 마교 대주의 말을 믿으라?”

요혜신니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섰다.

“먼 길을 왔으니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고 내일 떠나게나. 자네 아버님과의 교분을 생각해서 이번 일은 내 문제 삼지 않겠으나 또다시 이렇게 무림에 분란을 조장한다면 자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게야.”

단호한 요혜신니의 말에 임예린은 묵묵히 눈앞의 찻잔만 바라보았다. 그런 임예린을 남이와 일봉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저 계법이옵니다.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요혜신니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들어오너라.”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미파 대사저인 계법사태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분위기로 봐서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장문인, 화산파가 마교의 손에 멸문했다고 합니다.”

난데없는 소식에 요혜신니 뿐만 아니라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알아듣게 얘기해 보거라.”

“화산파의 장문인 거양자를 비롯해서 화산파 제자 대부분이 마교 놈들의 손에 죽고 살아남은 제자가 30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혜신니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느냐? 화산파에는 백여 명도 넘는 매화검수가 있지 않으냐? 실제 전력으로 따진다면 무당파를 능가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화산파가 어찌 마교 놈들의 손에 당해? 게다가 화산파에는 무림의 최고 어른인 비천검 독고양 장로도 계신데.”

“전령의 말에 따르면 마교에서 이번에 벽력탄을 대규모로 동원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화산파 고수 대부분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벽력탄?”

요혜신니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력탄을 정면으로 맞는다면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벽력탄은 관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물품입니다. 그동안은 외국과 교전하거나 백련신교를 토벌할 때만 사용해왔었지요. 그런데 오히려 신교에서 이를 사용하다니 이는 필시 관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임예린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듣고 있던 남이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임 소저, 관리들도 머리가 있을 텐데 자신들을 상대로 사용할지도 모를 벽력탄을 대량으로 과연 신교에 주려 했을까요?”

그러자 임예린이 입가를 지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바로 그 점입니다. 관에서 자신들의 적인 신교에게 직접 벽력탄을 건넸을 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신교가 벽력탄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평상시 신뢰하는 사람이 은밀히 요청했다면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요.”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 보시게.”

“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단체라면 국법에서 금하는 벽력탄이라도 뇌물을 좀 쓰기만 하면 금방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임예린의 말에 요혜신니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단체라면.... 설마, 무림맹을 말하는 것인가?”

요혜신니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임예린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무림 맹주가 요청하면 관에서도 마냥 무시하기가 어렵겠지요.”

임예린은 여기까지 말한 뒤 계법사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산에서 혹시 무슨 특이한 사항은 없었나요? 무슨 얘기든지 다 좋아요.”

“살아남은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마교의 수뇌부 말고도 복면을 쓴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자가 벽력탄 사용을 관장했다더군요.”

그 말에 임예린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자가 무림맹에서 파견된 자가 분명해요.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복면을 썼겠지요. 또 다른 사항은 없나요?”

“마침 올해가 화산검전이 있는 해라 싸움이 끝날 무렵 화산십수가 검동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드디어 이번에 화산신검이 나타나서 독고양 태상장로께서는 검동을 폐하고 입적에 드셨다고 합니다.”

계법사태의 말에 요혜신니가 놀라움과 애석함을 담은 탄식을 터뜨렸다.

“드디어 비천검 독고양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가 나타난 것인가? 그래, 그자가 누구라고 하더냐? 화산신검이 된 자이니만큼 마교 놈들을 소탕했겠지?”

“예. 그자가 단 몇 수만에 마교의 고수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보내온 전령에 따르면 이번에 화산 신검의 중임을 맡은 자는 화산파 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계법사태의 말에 요혜신니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화산파 제자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어느 문파 제자라고 하더냐?”

“그것이 저....”

갑자기 계법사태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평소에도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요혜신니가 버럭 호통을 쳤다.

“얼른 말하지 못할까?”

“그, 그것이...”

계법사태가 계속 요혜신니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자, 임예린이 갑자기 눈치를 챈 듯 미소를 띠고 말했다.

“혹시 그자가 마교의 인사가 아닌가요? 그래서 사태께서 그토록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임예린의 말에 계법사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저께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제 생각이 맞다면 이번에 화산신검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마교의 수라대주, 석추명 대주가 아닙니까?”

임예린의 입에서 ‘석추명’의 이름이 나오자 계법사태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이다. 임 소저께서 어찌 그 사실을 아시는 것입니까? 혹시 화산파에 따로 연락망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계법사태의 말에 임예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추측해 봤을 뿐입니다. 석 대주가 화산으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30여 년 만에 나타난 화산신검이 뜻밖에도 마교의 인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 요혜신니는 잠시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임예린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태님, 공자 앞에서 문자 읊는 격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배경이나 소속 문파라 하는 것이 모두 허상이 아닐는지요? 허상을 깨뜨리면 그 안에 있는 실상이 자연히 드러난다고 배웠습니다. 석추명이라는 사람의 실상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절대 거짓말로 누군가를 속일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제가 어린 시절, 그분을 겪어봐서 잘 알아요.”

석추명을 떠올리는 임예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옆에 앉은 일봉은 그런 임예린의 표정을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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